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 생명ㆍ치유ㆍ회복

요한복음 10:10b; 로마서 8:18-19; 미가 7:8; 시편 91:2-3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20-06-13 1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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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20-06-14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헛되지 않은 은혜(고전 15:9-11)

  

 

 오래 전 고향집에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지금까지 맡아본 냄새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냄새로 인해서 치울 것들은 거의 치웠습니다. 그런데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더 진동을 합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있을 수 없어서 더 찾아봤더니 아주 구석진 곳에 까만 봉지가 나옵니다. 열어서 봤더니 삶은 계란이 썩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썩은 계란 하나가 온 집안을 아주 고약한 냄새로 진동하게 한 것입니다. 온 가족들이 며칠간에 걸쳐서 이로 인해서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습니다.

  은혜가 썩는 곳에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곳에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국가 대표 골키퍼로 크게 활약을 했던 선수에게 관심이 크게 집중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그에게 맞춰 터지면서 누구와 이 영광을 나누겠느냐?”는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수가 갓 결혼을 했었는데, 그랬습니다. “내 아내와 함께 이 영광과 기쁨을 나누겠다.” 그런데 그 선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어느 학부모가 그 인터뷰를 듣고 나서는 저에게 그럽니다. “,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자기를 위해서 부모님이 지금까지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부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쎄빠지게 농사를 지어서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불멍에 쓸 나무도 팔고 이마트 편의점에서 1시까지 알바하면서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식에 어머니가 행색이 초라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어머니를 보고서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를 않습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아들이 시큰둥하게 이야기합니다. “, 신경쓰지 마.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식모야.” 그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고는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고는 몇 달 뒤 다시 찾아간 아들의 집은 벌써 외국으로 이사를 가버린 후였습니다. 못된 놈이지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놈입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놈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세상에 태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자라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공부할 수 있었습니까. 은혜가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지요.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도 없지요. 드러낼 것도 없습니다. 천수답과 같은 인생살이에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중에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말씀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늦은 밤 교회당 문을 열고나서니 뒷산 너머에서 구슬픈 소쩍새 울음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집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서정주의 시입니다. 그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읊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저절로 자기 혼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 꽃을 피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은 ‘6·10 민주 항쟁 33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폭압적인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축소, 조작되어지고, 이한열이 시위과정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것을 계기로 불길이 확산되어졌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MBC에서 2018년도에 방영되었던 다큐, ‘어머니와 사진사를 재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를 축으로 유가협 분들이 나옵니다.

  제가 그 방송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 아비의 찢어지는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를 위해 눈물과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간 민주 열사들의 그 피맺힌 울음소리를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내가 알바를 간 사이에 성결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그때의 일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때에도 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옵니다. “성결아, 우리가 이렇게 오늘날 자유의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먼저 간 그들의 피눈물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도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듯 민주주의라는 나무도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는 중에 터져 나오는 고백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 예수님.” ‘내가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지.’ ‘그래, 난 오늘도 예수님으로 인해 사는 것이지.’ ‘악한 마귀의 독재 치하에서 가난과 저주, 허무, 죄와 사망에서 허덕이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나를 십자가의 주님께서 구원해 주심으로 나는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악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셔야만 하셨던 주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우주의 깊은 밤에 우리를 위해 피울음을 우셨던 것입니다.

  소쩍새가 한 밤에 웁니다. 가을에 피어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울던 소쩍새가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에까지 울어 한 밤을 채워가듯이 나와 같은 한 영혼을 꽃피우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렇게 그 동산에서 우셨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울음과 골고다에서의 피 흘리심으로 오늘 내가 살아가고 영원히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럼 나는 이 한맘 동산에서 얼마나 울고 있는가. 이 동산에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울고 있는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깊은 밤을 채워가는 소쩍새 울음소리처럼 인생의 깊은 밤에서 많이 울어갈 수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해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여전히 씨름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한 밤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했습니다만 저도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그 씨름은 다름 아닌 나를 드러내려는 어리석음입니다. 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높아지려는 모습을 깎아내야 합니다. 아주 지난한 씨름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옆집 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두 청년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한 청년이 자랑스럽게 자기가 헬스장에서 150kg을 들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무게지요. 그런데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 내가 150kg을 들었는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더라.” 그런 자기를 아무도 봐주지를 않아서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서 으르릉거리면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를 두고 싸웁니다. 그러는 중에 대뜸 개가 한 마디 합니다. “, 고양이 자식아, 나를 우습게보지 마라. 이래봬도 내 삼촌은 늑대다 늑대.” 그랬더니 고양이가 콧방귀를 끼면서 그럽니다. “네 삼촌이 늑대냐? 내 삼촌은 호랑이다 호랑이.” 그때 갑자기 저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기고 있는 지렁이가 듣고서는 한다는 말이, “내 삼촌은 용이야. .” 여러분들의 삼촌은 누구입니까.

 

 

 한 번은 포항제이교회당에서 경북노회에 속한 여신도회 찬양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늦게 그곳에 갔습니다. 갔더니 한창 열기가 뜨겁습니다. 보니까 제가 예전 전도사 때에 있었던 교회 분들이 보입니다. 그 옆에는 전임지에 있었던 분들과 또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이 쭉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갈등을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기에 가서 인사를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할까.’ ‘내게 몰려드느라 성가제가 마비되지나 않을까.’ 그런 나를 보게 되는 사람들이 나를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 생각에까지 미칩니다. 그러다가 결국 인사를 하지 못한 체 자리를 빠져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그 분들과 아는 체를 했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런 곳에 나로 있게 하시는가? 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드러낼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뭘 잘난 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을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만하기 그지없었던 자아를 죽이시기 위해서 이곳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9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길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떡이나 포도주를 먹이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떡이나 포도주와 같은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이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훈련을 시키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6월호 묵상 에세이에 나오는 허운석 씨의 나는 왕바리새인입니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아마존 정글에 예배당과 건물을 합쳐 17개 동 규모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해 기고만장했습니다. 내가 일해 드릴 테니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라며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지난날의 죄를 낱낱이 회개하고 보니, 학교 건물을 짓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했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15년 연장 받은 히스기야 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다 죽었던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까. 그 주어진 생애 동안 생명을 주신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높이면서 살아가야 마땅하지요.

  이제 병에서 나음을 얻었다는 소식이 다른 곳까지 전해집니다. 이웃 나라 바벨론 왕이 축하는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한껏 들뜬 모양입니다. 그 사신들을 데려다가는 자신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다 보여줍니다. 우리 집에 이런 금송아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뭐가 있는지 아느냐.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히스기야가 보여주었던 그 보물과 무기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나 있었던 것들입니까. 그것들이 자신의 생명을 11초라도 연장시켜 줄 수 있었던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히스기야는 그것들을 자랑하고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자리에서 다른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헛된 자랑거리로 삼았던 그 모든 것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론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빼앗겨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보물고와 무기고가 있습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 있습니다. 학식이나 신분, 건강과 젊음, 자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내 생명을 연장시켜 주거나 내 생명을 영원까지 이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직 우리의 보물고에는 주님으로 채워져 있어야지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이 세상과 행복과 바꿀 수 없네 /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 세상 자랑 다 버렸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예수 밖에는 없네.’

  우리의 무기고에는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어야지요. 나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 내게 능력주시는 자가 우리의 무기여야 합니다. 어린 목동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면서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말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지렁이는 밟혀도 꿈틀거린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전히 죽지 않아서입니다. 내 자아가 죽지 않으면 계속 꿈틀거립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바울되기 전의 사울은 그의 이름의 뜻처럼 큰 자였습니다. 학식에서나 신분에서나, 열심으로 보나 그는 그 어떤 누구들보다 단연 최고였고 으뜸이었습니다. 하나 빠질 것이 없이 그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주님 앞에서 완전히 고꾸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뒤바뀌게 됩니다. 큰 자가 작은 자로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됩니다. 겸손한 자가 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됩니다. 9절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주님을 알게 된 고상한 지식을 가지게 되면서 이전까지 자신이 가졌던 학문이라는 것이 고작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초등학문에 불과한 지식을 가지고 대학원 박사 과정에 가서는 아는 체 했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믿게 되면서 자신의 신분이 마른 막대기에 불과하고, 만물의 찌끼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열심은 죽이는 열심이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지난날 자랑했었던 모든 것들로 인해서 부끄러움만 가지게 될 뿐입니다. 이제까지는 그것들이 자기의 자랑이었고, 자기의 전부였으며, 자기를 자기되게 해주는 존재의 이유였을 것들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남들에게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들이었을 것이지만 주님을 만나면서는 오히려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때는 유익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3:7,8)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주님 앞에 엎드리고 엎어졌습니다. 자기를 높이거나 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 찾고 찾았습니다. 그에게 부어졌던 은혜가 헛되지 않은 것이지요. 1

 0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그는 오직 주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살아낼 수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조심해야지요.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수고와 애씀은 은혜요 감사입니다. 그 일들을 하면서 누가 나를 안 봐주나.’ ‘누가 나를 안 알아주나그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자리는 은혜를 깨달아가는 자리이지 내 인간적인 의를 쌓아가는 자리가 아닌 것이지요. 내가 기도하는 그 시간이 내 의를 쌓아가는 시간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행에 있어서조차 그 동기가 자기를 알아 모셔 달라는 욕구의 발로일 때가 있습니다. 열심과 수고가 나를 드러내는 수단과 방법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이것이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통렬하게 율법주의자들을 질책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우리가 무엇에든 열심을 내야지요. 너나 할 것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 공동체를 막론하고 우리가 사는 곳에는 누군가의 수고와 봉사, 헌신과 희생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들로 세워지는 것이지요. 허나 여러분,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수고와 열심이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세우는 수단과 자기 의를 이루는 발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지요.

  교회에서 받게 되는 직분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크기를 깨달아 감당하라고 맡기는 것이지 그간에 행한 수고와 열심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공로와 업적에 따르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직분인 줄 알게 되니 오늘날 교회들이 이리도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입니다.

 

 오래 전, 홀로 산골짜기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홀로 피어나고 있는 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와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꽃을 본 것입니다. 그 꽃을 보면서 요새 하는 말로 심쿵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예쁜 꽃이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피어날 수 있었을까.’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만약 나라면 그곳에서 피어날 수 있었을까.’ ‘만약에 나였으면 아무도 봐주지 않을 그 자리에서 꽃을 피어낼 수 있었을까.’

  지금도 온 산하의 꽃들이 자기 자리에서 누가 봐주든 봐주지 않든 고운 빛깔로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피어오르는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그 꽃들이 고맙습니다. 우리네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그곳에서 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봐주지 않아도 피어나는 꽃들이어야지요. 알아주지 않아도 피어나는 꽃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이지요.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심령에서 기쁨은 샘솟듯 솟아날 것입니다. 그럴 때 인격과 신앙은 깊어져가게 될 것입니다. 마냥 웃고 마냥 즐겁고 마냥 행복한 우리네 복된 생애가 되길 원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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