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8-2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63:1-11)한맘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시편 63편의 표제어를 보니까,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윗이 광야에 있었을 때에 이 시를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그가 예전에 젊은 날에 사울의 핍박을 피해서 갔었던 그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이 광야는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이 자기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 아들을 피해서 가게 된 자리입니다. 그랬으니 참 꼴이 말이 아니지요. 그 고통의 크기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겨 가는 아버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날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색동저고리 채색옷 대신에 노예복을 입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잘나가던 사업체의 사장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게 될는지 몰랐던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 인생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게 될는지, 어디에 있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신약의 야고보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며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4:13,14a)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 안에서 우리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하십니다.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꼴이 말이 아닌 자리였지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다윗이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그 당당함이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 황폐한 광야의 자리에서 시를 적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붓을 꺾어버리고 목소리를 꺾어버려야 할 판에 그는 붓과 목소리를 하나도 꺾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우리는 원치 않는 자리에 있다 보면 너무나 쉽게 푸념을 늘여놓고서는 체념에 젖어서 운명을 탓해버릴 때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흐느적거릴 때가 참 많습니다. 죽은 고기가 흘러가는 물결에 따라 휩쓸려가는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환경이 자신의 감옥이 되게 해서는 불평과 원망, 근심과 걱정으로 채워내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려니’ ‘내 운명이려니’ ‘사납고 더러운 내 팔자려니하고서는 살아가고들 있는 것입니다. 인생무상,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를 읊어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못미더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늙어가고 그러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그러면서도 너무나 자주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인지라라는 말입니다. ‘나도 인간인지라.’ ‘목사도 인간인지라.’ 인간이다 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염려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쉽게 쓰는 이 말에 사로잡혀 버릴 때가 너무나 많아요. 툭하고 내뱉는 이 짧은 말 한 마디가 믿음을 흐트러지게 합니다.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이제 자주 쓸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기에라는 말보다는 신앙인이기에라는 말을 자주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신앙인이니까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면 어떻게 되든 괜찮아요. 그렇지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는지 걱정과 염려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이 자리는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지요. ‘, 저 분은 참 믿음이 좋아.’ 그러지 않습니까. 믿음을 그 사람에게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열어주신다는 믿음이 얼마 정도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욥은 그러나(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을 두고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협박 앞에서도 왕이시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 또 에스더는 어떻습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보여줄 자리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없을 수 있어도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가져갈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들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까마귀를 들어서라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당당해야지요. 담대해야지요.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말아야지요.

  다윗은 그 황폐한 광야의 자리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설사 죽었을지라도 그 믿음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열악하고 척박한 상황 가운데에 처해졌지만 오히려 그는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하늘소망과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을 살고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영생을 책임져 주실 하나님으로 우리는 흔들림 없이 후회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했습니다. 그의 대적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다닐 때에 그는 오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했습니다.

  그가 처한 현재의 자리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2절에서 보면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성소에서도 찾았던 그 하나님을 이 광야에서도 찾고 또 찾으면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구비되어진 자리에서나 아무 것도 구비되어 있지 않는 자리에서나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앙모한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들 때면 물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만 그 하나님을 힘들 때에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필요할 때만 찾는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교역자 시절 때였습니다. 어느 집사님네 가정에 대학생 아들이 있었습니다. 타 지역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아들이었지만 나름 교회당을 찾아오는 빈도가 잦았습니다. 이 청년이 주일날 교회당에 올 때면 장안의 화제라는 말이 딱 어울렸습니다. 어떤 때는 노랗게 물들였었던 머리카락을 다음에 올 때면 파랗게 하고 오지를 않나 또 어떤 때는 찢어진 바지에 귀나 코에 피어싱을 해서 오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아드님은 그래도 다른 집 아들네들보다 자주 오는 것 같네요.” 했더니 들려주는 대답입니다. “목사님, 우리 집은 다른 집들 같이 용돈을 안 부쳐줍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용돈을 부쳐달라고 할 때마다 부쳐줬더니, 글쎄 집에를 거의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그때부터 용돈 부치는 것을 끊었더니 저렇게 자주 내려오네요.” 아들 녀석이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 그러면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어머니의 지혜를 발휘하셔서 그렇게 행하실는지 모를 일이지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내 삶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면 날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새 군에 있는 기문이가 2명을 데리고 밥 잘 주는 교회를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잘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기문이가 달라졌어요.’ 예전에 제가 군에서 철책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주일이 되어 소대원 몇 명 중에서 함께 예배를 작은 식당에서 둘러앉아 드렸습니다. 그때 저보다 3주 선임이었던 한 사병이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송을 부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그 믿음이 좋은 병사를 보면서 믿음이 적은 저를 질책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그 병사에게 문제가 생겨서는 본부 중대로 가게 되었는데, 좀 지나서 철책 근무지에서 빠져 일반 근무지에서 대대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그 믿음이 좋아보였던 병사가 제일 뒤에 앉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잠을 쿨쿨 자는지요. 그렇게나 눈물이 많았던 병사가 또 잠이 많은지 몰랐습니다. 신병 때와는 다르게 고참이 되니까 좀 지낼 만 했나 봅니다. 신병 때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믿음의 병사가 고참이 되고나니 그 눈물이 다 말라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여전했습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여전하여 찬양이 그의 삶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왕궁에서나 광야에서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있었을 때나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을 때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다음 자리가 어떻게 되어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높아질 때나 낮아질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똑같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이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항상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기를 구해주시고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자와 곰, 골리앗, 사울왕, 블레셋과 아말렉 족속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의 자리에서도 능히 지켜주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를 택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인자하심은 자신의 생명보다 크고 나음을 알았습니다. 3,4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바울도 실라와 함께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지금 다윗은 아주 충만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 아주 넉넉함으로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냐?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좋다고 했습니다. ‘골수라는 단어를 찾아보니까 헤레브라고, 소의 안심살 부위를 말합니다. 기름끼가 좔좔 흐르는 안심 스테이크를 먹음과 같이 자기의 영혼이 만족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세상에서 여러분, 누가 이렇게나 다윗처럼 그 심령에 만족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왕궁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앉아 있는 왕의 자리가 그에게 내적인 영혼의 만족을 충족시켜주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다윗은 또한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찾았습니다. 그 광야의 자리에서도 능히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이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날 내셨으니 나는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을 향한 근원적인 갈망을 주셨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불만족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가져야, 얼마나 커져야, 얼마나 높아져야 만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속아 넘어갑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지요. 아닌 줄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나중에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된 인생이라고 말하면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찰나와 같은 쾌락을 좇아 사느라 영원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 존재에 있어서 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을 쉬고는 있지만 언제 이 숨이 멎어버릴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지요. 가져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높아져도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닙니다.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윗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간절함과 애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그랬습니다. 그 황폐한 자리에서의 물은 생명입니다.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죽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마를 수밖에 없고 메마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라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못사는 것입니다. 왕궁에 있어서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잘사는 것입니다. 광야기에 황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황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했습니다. 다윗은 황폐한 그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그 영혼이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도울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29:12,13) 잠언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 했습니다.

  다윗은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초를 당하였지만 그 이상으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그래서는 그 도움이신 하나님을 향해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했습니다. 아들을 피해 쫓겨난 자리였던 광야였지만 다윗에게 있어 그 자리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두 손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송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더 친밀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이 6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새벽에 주의 말씀을 읊조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면서 찬송하듯이 우리네 일상 모든 곳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왕궁에서나 광야에서나, 새벽에나 밤에나 말이지요.

  한 번은 하나님께 기도문을 짧게 써봤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정철이에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불렀던 하나님을 오늘 이 자리에서도 부르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했을 때가 참으로 많았는데, 그 순간순간들이 많이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날들도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엄마, 엄마를 참 많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서 보니 엄마보다 하나님, 하나님을 더 많이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감사해요.]

  종종 밴드에 우리 집사님들이 예쁘게 디자인한 성경구절을 올려주실 때가 있습니다만 그 구절들을 자주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을 읊조리게 될 때면 힘을 얻고 힘을 내갈 수 있습니다. 주보 글에 조근조근 하나님과 이야기하기라는 제목을 달아 글을 실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희 아들 녀석들이 자기들 딴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들이 아빠인 제가 들으면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습니다. 고향에 계신 저희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전화 자주 하는 자식이 제일 좋고, 전화 자주 안하는 자식이 제일 싫다.” “전화하는 자식은 다 주고, 전화 안 하는 자식은 하나도 안 준다.”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전화를 하라고 합니다.

 

 종종 보다 보면 딸아이가 자기네 엄마 아빠에게 착 달라붙어서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봅니다. 딸 같은 아들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며칠 전에 고등학교 1학년 축구부 여자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포항에 있는 축구부 숙소에 들어가면서 대구에 있는 집으로 가는 아빠와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담배 끊어라.” 아빠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빠, 안전벨트 꼭 매라.” 그러고 나서 가면서 또 뒤돌아서서는 한 번 더 다짐을 받습니다. “아빠, 안전벨트 꼭 매라고 했다.”

  그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빠를 생각해주는 그 딸의 마음이 얼마나 눈물이 나고 고마울까. 물론 딸을 향한 아빠의 마음은 하늘같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그 딸아이처럼 조근조근 하나님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자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루에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묶어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자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며 기뻐하실 아버지 하나님이시지 않으실까. 딸아이 키우는 재미가 있다는 말처럼 이런 즐거움이 하나님께도 있도록 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윗과 하나님 사이를 보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서로 간에 넘어지면 밟아주는 사이라고 합니다만 하나님과 다윗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했습니다. 다윗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죽이고자 했던 대적들은 다 죽어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찾았던 다윗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신 것이지요. 다시 왕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우리네 인생의 결론이 이렇게 끝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보면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앉는 자세도 그렇고 걷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자세도 중요하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신앙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축구 레슨을 할 때 자세를 배웁니다. 그때 감독이 그럽니다. “이 자세를 가져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 배운 자세를 계속해서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잘 들어라.” 그럽니다. 그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를 가지고 드리블을 할 때나 수비를 할 때나 슈팅을 때릴 때나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세를 가진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신앙하는 자세가 여건과 환경에 따라서 조금도 흐트러지거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중요하지만 그 다짐한 것을 계속해서 가져가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또 한 명의 다윗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다윗을 우리 한맘이네에서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