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목사 
설교일 2019-05-0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131:1-3)한맘

 

  본당에 앉아서는 산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5월 초순의 날들을 보내면서 보게 되는 이 산은 푸른빛으로 가득합니다. 싱그럽게 자라나는 푸른빛들로 인해서 눈만 편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편합니다. 삶도 영혼도 편합니다. 그런 생각에 미칠 때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시편 121편의 시도 떠오르면서 말이지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어릴 적 고향집에서처럼 여기 이 자리에서도 산을 가까이에서 대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의 원천이 되십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 산처럼 거뜬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앙상한 가지가 여실히 드러난 채로 회색빛과 낙엽으로 뒤덮인 갈색 빛 천지였습니다. 10월 말 잎사귀가 떨어진 때로부터 해서 5개월이 넘게 그랬습니다. 그 기간이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하며나, 하며나하면서 둘러보았습니다만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빛과 갈색 빛뿐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푸른빛으로 완연히 물들어져 있습니다.

  조급한 생각으로 속히 푸른빛으로 물들어지길 바랐던 저와는 다르게 이 산하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것 같더니 이제는 울창한 푸른 숲을 이루어서는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될 성 싶지 않아 보였던 것들이 어느 새 다시 보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서두르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어느 새 다시 보면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유업을 이을 후사가 없었던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고, 그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고, 또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으면서 한 민족의 기틀을 이루어나갔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이 자연에서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 어머니께서 꾸신 태몽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했습니다. 양지 바른 앞동산에 닭이 달걀을 소복이 안고 있는데, 거기에서 병아리들이 껍질을 까고 나오는 태몽이었습니다.

  그 태몽을 오늘 이 자리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그 태몽의 자리가 오늘 이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지요. 오늘 이 한맘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해 가실지를 기대해보게 됩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어 보였던, 기대하고 꿈꾸는 것조차도 사치처럼 여겨지면서 잿빛과 갈색 빛만이 넘쳐났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게 하실지 기대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산을 마주보면서 앉았습니다. 2년이 두 달 남짓 좀 못 미치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때로는 당장이라도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기를 바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만 쓰시면 금방이라도 되지 않겠느냐고 떼를 쓸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저와의 생각이 다른 모양입니다. 저는 조급한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급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저는 서두르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서두르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갈 길이 바쁜 저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바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가진 조급하고 서두르는 모습을 내려놓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의 차이가 있음을 꼭 가르쳐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 보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했습니다. 여기에서 젖을 뗀 아이는 젖을 먹을 나이가 지난 아이라기보다는 젖을 넉넉히 먹어서 배가 부른 아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로 이루어야 할 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눈에 보이는 어떤 엄청나고 큰일을 이루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고요함과 평온함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이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엄마의 젖을 실컷 빨고서는 배부름으로 그 어미의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우리가 보잖습니까. 아무 걱정도 없어 보입니다. 무슨 걱정할 것이 없지요. 새근새근 거리면서 잠자는 아기에게서 무서움이나 두려움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내 영혼이 젖 뗀 이이와 같()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통해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길러갈 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힘을 길러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자리를 허락해 주시고 계시는 것이지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불안과 염려스러울 것 같으면 질병과 늙음 가운데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자리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할 것 같으면 앞으로 주어지게 될 죽음의 자리는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풍랑이 칠 때에 그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 있는 우리네 심령이 잠잠해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치는 그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당신께서는 능히 우리들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실 것이니 당신을 향한 믿음으로 젖을 뗀 아기가 어머니 품에서 새근거리면서 잠을 자듯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 안에서 그가 누리는 삶의 모습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온한지 몰라요. 시편 27편에서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27:3) 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도대체 어떠했으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지 너무 부럽습니다. 저는 아내가 건네는 안 좋은 말 한 마디에 파르르 떱니다. 누가 저를 보고 인상을 쓰면서 고개만 돌려도 마음이 요동을 칩니다. 그 날 밤에는 곧장 복수혈전 영화를 몇 편씩 제작합니다.

  다윗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오늘 저도 믿어가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욥을 봐도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많은 환난 풍파를 맞았던 욥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욥이 겪었던 것 중에서 하나만 겪게 된다고 해도 살아있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향해서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욥은 그러지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b) 그랬습니다. 전혀 그의 영혼이 요동을 치지 않습니다. 미동도 없습니다. 떨림이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욥이 가진 믿음의 경지가 어떠했기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과 제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다른 분이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지요. 그가 믿었던 하나님도 여호와요, 제가 믿고 있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 다를 뿐입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동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인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길 원하십니다. 얕은 물가에서 손을 짚고 첨벙첨벙 헤엄을 치는 자리에서 깊은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흔들림이 없고 흐트러짐이 없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로 장차 이르러야 할 자리가 바로 자기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의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면서 빚어 가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입술에서 당신을 향한 신앙고백이 이렇게 터져나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니’ ‘먹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굶기시는 이도 여호와시니’ ‘살리시는 이도 여호와시오, 죽이시는 이도 여호와시니’ ‘가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시오, 머물러 있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내 삶을 인도하시고 모든 만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떠한 여건과 상황에서도 고요함과 평온함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기가 어머니에게서 배불리 젖을 먹고서는 그 품에 안긴 아기처럼 고요하고 평온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갖추어야 할 것이 있음을 귀띔해주고 있습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들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랬습니다.

  저는 이 고백이 얼마나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가슴팍에 팍팍 꽂히는 말씀입니다. 저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 한맘에 와서 한숨을 쉬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언제 이 한맘을 부흥시켜서 큰일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서 성도들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면 픽픽 쓰러지게 하는 능력이 종이 되리라 각오를 다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전부터 저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박목사님은 내가 보기에 불의 종이야. 그런데 불의 종이 될 사람이 아직도 그런 시골에 있어. 빨리 대도시로 나와야지.”

  이것만이 아니지요. 나 같은 사람은 만 명이 되는 교회에서 목회를 할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첫 단독 시무지에서는 월포 전 지역을 복음화 시키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양남에서는 500명 출석 교인을 목표로 두고 큰소리를 쳤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 정도는 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래놓고서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하겠다는 말들을 내뱉어놓았으니 뒷수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굳이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없었습니다만 제 스스로 중압감에 못 이깁니다. 강박관념이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랬으니 제 심령이 무슨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큰일을 벌이려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고백은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어떻게 작게작게 믿으면서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다윗은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있으면 누구나 큰일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점검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 속에 있었습니다. ‘능력의 종’ ‘불의 종’ ‘큰일을 할 사람’ ‘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큰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 것으로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많은 빚을 내서라도 교회당을 짓습니다. 크게 지을수록 능력이 많은 종이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교인이 없어도 교회당만 크게 지으면 믿음이 좋은 증거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누가 크게 짓나경쟁이 붙습니다. 한때 한국의 교회들이 한국의 은행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융자를 많이 받아서 썼습니다.

  전성갑 집사님 내외분이 서울에 있을 때에 한 교회에서 교회당을 지을 때를 이야기 해 줍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보증을 서게 해서는 교회당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서 시험에 들어서는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크게 크게’ ‘많게 많게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오다 보니 오늘날 우리네 한국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되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고요와 평온이지요. 그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누리는 고요와 평온이었습니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남들은 결코 할 수 없는 크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일들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자랑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하는 이들의 명함을 받아서 보게 되면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소속된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활동하고 있는 이력이 화려합니다.

  목사님들이 은퇴식을 할 때 지나온 이력을 소개될 때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력이 펼쳐집니다. 그러면 제가 걱정을 합니다. ‘내게는 무슨 이력이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그 이력서에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내가 뭐라도 해야 되지 않는가. 한두 줄만이 아니라 적어도 한두 장 정도는 채워야 되지 않을까.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을 읽는데, 이런 비슷한 문장이 있습니다. 자기는 어떤 사역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시간 단위로 하지 않고 분초 단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2315초까지는 책을 보고, 3518초까지는 설교 준비를 했다가, 4628초에는 상담을 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아껴서 잘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부분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게으른 제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동기회 모임 때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ktx를 타고 왔습니다. 경기도 지역에 있는 친구들은 몇이서 어울려 봉고를 타고 왔습니다. 일정을 끝내고서 신경주역으로 그 친구를 바래다주면서 그랬습니다. “, 올라갈 때에 친구들하고 봉고차에서 이야기 하면서 가다가 서울로 가면 안 되느냐.” 그랬더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시간은 돈인데 말이야.”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 나는 남는 게 시간인데, 나는 떼부자다. 떼부자.”

  이렇게 친구들을 봐도 목회자로서 참 바쁘게 살고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삽니다. 예전에 한 번 보험 설계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적이 있었지요. 이 사람은 봄이 왔는지, 봄이 가는지를 전혀 모른 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자기에게서 얼마나 흘러갔는지, 자기에게 남은 세월이 얼마인지도 모른 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줄 압니다. 아니지요. 여유도 없이, 겨를도 없이, 생각이나, 사색이나, 성찰도 없이, 쉼도 없이, 안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결코 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을 잘 보이고 싶은 은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크고 많은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동기회 모임을 하는 중에 한 친구 목사에게 사모가 그럽니다.  , 너무 힘들었다. 왜 우리 남편은 그렇께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거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겠지요. ‘자기는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을 교회에 보여주겠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해 보겠다는 것과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혼재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 당신들이 보고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하느라 얼마나 수고하고 고생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 열심들이 자칫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잘 보이는 것과 잘 보이고 싶은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잘난 것과 잘난 척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과 공부도 못하는 것이 잘난 척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잘 보이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위험합니다.

 

  이번에 두어 주 전부터 저희 매형네 가족 분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제게 퍼뜩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잘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멋지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좋은지를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좀 불러다 앉혀 놓을까.

  그런데 여러분, 꼭 이럴 때면 제 의도와는 다르게 뒤틀리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연숙 집사님이 그래요. ‘자기네는 다음 주에 시댁에 가야 한다.’ 봄나물 비빔밥을 맛있게 먹다가, 순간 그 이야기를 들으니 비빔밥 맛을 잘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또 좀 지나서 사택에 가 있으니 전화가 옵니다. 대구 집사님네입니다. “자기들은 연휴를 맞아서 가족 여행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집니다. ‘누나네를 내려오지 말라고 해야 되나.’ 집사님들로 시댁과 가족 여행을 가지 말라고 해야 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속만 끓이고 애만 태웁니다. 잘 보이고 싶었던 그 마음에 큰 스크래치가 생겨난 것입니다. ‘꼭 이럴 때 내려온다는 건 뭐야.’ ‘꼭 이럴 때 시댁에 가고, 가족 여행을 떠날 게 뭐야.’ 더하여 목요일에 경주 시내팀이 모여서 천년 밀면 가게에 가서 밀면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중에 김정희 집사님네가 그럽니다. “자기네는 이번에 안동에 간다.”는 겁니다. 안 들었으면 좋았을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여러분,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빨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내 속이 심히 상할 때’ ‘내 속이 염려와 불안으로 뒤틀릴 때’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는 기도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잘 정리해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정리해 주시는 생각이 있습니다.

  ‘네가 문제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짚어주시면서 일러주십니다. ‘네가 문제다.’ ‘그 누나네나 성도들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다.’ ‘잘 보이고 싶은 인정의 욕구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붙들고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네가 제일 큰 문제다.’ ‘네가 이 욕구를 떨쳐내지 못하는 한, 너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니, 내 너를 사랑하여 이 때를 허락하였노라.’ 그 생각까지 미치니 속마음이 그나마 누그려집니다. 살 것 같습니다.

 

  가까이에서 산을 보니, 이 산은 자기를 꾸미지 않습니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그냥 둡니다. 꽃이 지면 지는 대로 그냥 둡니다. 자기를 돋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숨기지 않습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를 여실히 다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서둘러 꽃을 피우거나 잎을 내지 않습니다.

  지금은 푸른빛이지만 말씀을 드렸듯이 일 년 중에서 오 개월 정도는 우중충한 잿빛과 갈색 빛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게, 뭐 어때서그러는 것 같습니다. ‘너도 나처럼 살아. 그래야 네가 살아.’ 있으면 있는 모습이 보이겠지만 없어도 괜찮아. 부족해도 괜찮아. 모자라도 괜찮아.

  결혼식을 막 끝낸 신혼부부가 숙소에 들어갔습니다. 신부가 얼굴을 씻고 나오니까 신랑이 누군지를 몰라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지 않습니까. “당신, 누구세요.” 이제까지 너무 과하게 꾸민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너무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좀 서툴러도 되니까 괜찮습니다. 좀 못나도 되니까 괜찮습니다. 좀 어설퍼도 되니까 괜찮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다 못나고 서툴고 어설픈 사람들이니 꾸미려 들거나 숨기려 들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맨 얼굴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만나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이지요. 신앙의 세계는 성과물이나 이력서를 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러한 것들을 털어버리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흰머리 갯수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월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날들을 걱정거리들로 채워갈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채워갈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걱정거리들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힘들게 뒤틀려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힘 있게 살아갈 것인지를 말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말씀을 들려줍니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어라고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만 찾아야만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죽어라고 하나님만 찾는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 엄마, 엄마만 찾습니다. 그 아이는 껌 딱지처럼 엄마만 찾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백점을 맞았다고 신이 났을 때에도 엄마를 찾습니다. 밖에서 놀다가 배가 무진장 고파서 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도 엄마를 찾습니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에도 엄마를 찾습니다. 이렇게 아이는 죽어라고 엄마만 찾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엄마만 있으면 만사가 OK입니다. 엄마 손만 잡고 있으면, 엄마 품속에만 있으면 그렇게 좋고 편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14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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