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8-17 11:07:05
0 23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8-18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지어져가야 할 성전(4:6-10)

 아직까지도 무더운 8월입니다만 그래도 이 여름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여름이 마지막까지 자기의 때인 줄 알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란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군에서 아무리 남은 제대 날짜에 동그라미를 쳐댄들 빨리 가주지를 않습니다. 
  이 여름날에도 이때가 지나가고 있음을 못내 아쉬워하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는 매미들이 있습니다. 가지는 계속해서 가지를 줄기마다 맺어가고 있습니다. 오이도 그렇습니다. 호박은 넝쿨을 이루어 큼지막한 이파리를 펼쳐내면서 그 위세를 당당히 떨쳐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잘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고, 잘 보내주는 것도 중요하구나.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어느 때나 자리에서도 이런 마음이 중요한 것이구나!’ 
 지난주일에 보니까 호박잎 찐 것을 여러분들이 맛있게 드시는 것을 봤습니다만 이 때가 지나면 그 호박잎도 못 먹게 됩니다. 지난주부터는 어느 새 이파리가 누렇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합니다. 주어진 때를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학창시절에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시 오지 않을 때지요. 어느 때보다 귀한 때인 줄 알기에 기성세대들이 곧잘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들 같이 공부할 때가 제일 좋은 때다.” 고기도 씹을 수 있을 때 많이 씹으라고 하잖습니까. 

 

 박선갑 집사님이 요새 많이 걷고 계십니다만 걸으면서 찍은 작품 사진도 밴드에 올리셨습니다. 종종 그렇게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일에 함께 하면서 걷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다리가 불편하신 이점춘 집사님이 다짜고짜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걸어라.”고 하셔서 웃픈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등산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이집사님이 이제는 다리가 불편해서는 좋아하는 산을 올라가기가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때가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잘 살려갈 수 있어야 하지요. 그때에 뽑아야 할 풀이 있어요. 그 풀들을 그냥 두면 뿌리가 깊어질 뿐만 아니라 씨가 맺혀서는 다음에는 뽑아내기가 얼마나 더 힘들어지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꼭 해결지어야 할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풀어야 할 매듭이 있습니다. 드려야 할 인사가 있습니다. 전해야 할 복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미루거나 늦추면서 그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때에 뭘 해야 하겠습니까.” “이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로 하게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그래서는 주시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 총독이었던 스룹바벨로 하여금 성전 재건 공사를 마무리 짓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에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스룹바벨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로 하나님께서는 이 한맘교회를 세워가게 하십니다.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맘교회를 세워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와 영감과 동역자와 필요한 여타의 것들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자리에서 뼈대 있는 신앙의 가문을 세워내기를 원하십니다. 진실과 성실함으로 직장과 사업터를 세워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이웃과 지역을 살려내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세계 평화의 주역으로 우뚝 서 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런 귀한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본문이 쓰이게 되는 정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성군 다윗은 누구보다도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막으셨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손에 전쟁을 치르느라 묻은 피가 많음으로 해서 그가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전이 7년여에 걸쳐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기원전 587년에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성전이 완전히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 백성들은 바벨론의 땅으로 포로로 사로잡혀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7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70년의 때가 지나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감동시키심으로 포로로 사로잡혔던 유다 백성들을 귀환하게 하면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줍니다. 3차에 걸쳐서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만 1차 귀환 때에 유대의 총독으로 스룹바벨이 오게 되면서 성전 재건 작업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들이 처음에 와서 무너져 내린 성전을 보았을 때에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솔로몬의 성전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그 성전을 향해 찾아드는 순례객들과 예배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세계 각지에서 찾아들었던 그 성전이 지금은 누구도 찾아올 수 없이 처참하게 부셔져서는 무너져 있었으니 저들이 심정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서진 집터나 비어있는 공장만 봐도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식당에 손님이 없이 파리만 날리는 것만 봐도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예배 자리인 성전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 모습을 봤을 때에 저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오는 즉시로 성전 재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역에 남아 있었던 지역민들의 방해공작을 펼쳐집니다. 결국은 방해공작으로 말미암아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새롭게 마음을 먹고서는 시작하려고 하면 꼭 방해하는 것들이 등장을 하잖습니까. 이것을 이겨내야지만 되는데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은 포기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간 70년에 걸쳐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저들에게는 성전이 다시 재건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이 다시 수축되고 나면 그 성전을 구심점으로 해서 유대 백성들이 뭉치게 되면서 그간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에 아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갖은 음모와 모략을 획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해서 공사가 중단이 되고 맙니다. 그 중단되어진 기간이 무려 16년 동안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성전 재건 작업을 다시 착수하도록 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공사가 중단된 지 16년입니다. 그랬으니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작심한 것이 3일만 지나도 흐지부지해 질 때가 많은데, 16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그랬으니 처음에 품었던 사명감이 흐지부지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꼭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는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는 지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해야지했지만 꼭은 아니지하면서 넘어가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중단되어진 공사의 자리는 황폐해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제는 성전 재건에 대한 열망과 열의가 꺾여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야 품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들이 흐물흐물해졌을 것입니다. 여전히 방해하는 세력들은 건재해 있었습니다.

  옆길로 가다 보면 부서진 집터가 하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어지럽고 더러운지 모릅니다. 무성한 풀이 뒤덮고 있습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버려져서는 쌓여 있습니다. 보기가 너무 흉합니다. 한 끼 설거지만 안 해도 살림 안 하는 사람들이 사는 것 같잖습니까. 며칠만 손을 안 움직이고 그냥 두어도 풀들이 얼마나 무성하게 자라나는지 모릅니다.

  해야 할 일도 안 하고서는 그냥 두다 보면 나중에는 하기가 싫어집니다. 쉽게 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도 한두 번 서너 번 내버려두고서는 한꺼번에 하려고 하면 힘이 들어서는 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처음에 고국으로 귀환했을 때에 성전 재건을 이루었다면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 상황이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 주위를 둘러보면 풀들이 많이 웃자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 나름 애써서 뽑고 또 뽑았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언제 또 그렇게 자라났는지 엄청납니다. 풀과의 전쟁은 늘 현재 진행형입니다. 장맛비가 계속되던 날들에 훌쩍 자라나서는 그 기세를 쉬지 않고 뻗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풀들이 씨를 맺지 못하게끔 뽑아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 더위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힘쓰지 않으면 나중에는 훨씬 더 힘들어질 줄 알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먹고서 해 보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미루고 늦추면서 나아지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풀들을 보면서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이 힘들고 지쳐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위를 핑계 삼아 한껏 게을러지고 느슨해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더위만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들을 두고서도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쳐지고 풀어진 모습으로 이 날들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폭염주의보가 발령이 되고, 열대야로 인해 잠을 설치게 되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 더위를 핑계 삼아 숨어들어서는 웅크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것이지요. 이런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판의 벼들은 이삭을 패가고 있을 것이고, 이런 날들을 벗 삼아 열매들이 영글어가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수확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뜨거운 날에 뜨겁게 역사해 주시는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변명과 핑계에 익숙해져서는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2019년 새해가 시작되던 그 추웠던 날에 품었던 다짐과 결단들이 이 더운 날에 풀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빠졌을 때에 힘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막힐 때에 뚫어주시고, 넘어졌을 때에 일으켜주시고, 죽고 싶을 때에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손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이러한 날들이 자칫 길어지게 되면 낙심하게 되고 침체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굳어져 버리면 문제가 커지는데, 무기력한 증세가 오래 지속됩니다. 의욕이 없어지고 의지가 꺾이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껏 지내면서 보면 그렇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안 되나 보다.’ ‘우리 가정은 안 되나 보다.’ ‘우리 교회는 안 되나 보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인식을 하게 되고,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대인기피증세가 나타나게 되고, 현실 도피를 하려고 하면서 시쳇말로 잠수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노숙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왜 저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들이 노숙자가 되는 과정이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야 물론 있겠습니다만 우리들에게도 이런 증세가 나타나게 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져서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자기 생각과 자기 몸을 어디까지나 몰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가 상당히 위험하지요.

  어릴 때부터 공차는 것이 좋아서 축구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성인 무대에 들어가기 전쯤 되어서는 축구를 접는 경우를 참 많이 봐왔습니다. 몇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큰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막혀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축구를 접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럴 수 있는 것이지요. 막다른 골목에서 오갈 데 없어져서는 막혀버리니 접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에라, 이제 모르겠다.’ ‘될 때로 되라.’ 그러면서 생각과 몸과 세월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16년의 세월도 그렇게 해서 지나가버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열어주시고 삶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것은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른 수건을 짜낸들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자기가 잘난 것 같고 잘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한계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과 실력, 내가 가진 기술과 방법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하며 큰 소리쳐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막다른 골목 한계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되지요. 오늘 점심 메뉴가 칼국수입니다. 이 간단한 메뉴를 정하느라 아내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떤 메뉴를 정해야 될지 몰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무 것이나 되는 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 잘 맞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숙고하면서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의 설교를 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설교의 주제와 성경 본문, 구조를 정하고 줄거리를 써나갈 때에,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를 입에 달고 있습니다. “성령이시여, 제 생각을 열어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다 막혀버려서는 한 줄도 나가지 않는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야 말해가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숨이 막히고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마치 넘지 못할 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잔뜩 실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넘실거리면서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괴롭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기도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전성갑 집사님 회사에 집사님보다 젊은 두어 사람 정도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저께도 집에 있는데, 아내의 폰에서 카톡 소리가 연이어서 들립니다. 고등학교 예고 때에 함께 했던 남자 친구가 폐에 있던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이 놀라서는 카톡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양남에 있었을 때에 울산에서 악기점을 하는 그 분이 양남 솔밭과 바다에 왔다가 인사차 수박 한 덩이를 들고서는 잠시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게만 느껴지는 죽음 앞에서 삶의 우선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간 그들도 어떻게든 힘든 이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애쓰고 발버둥치지 않았겠습니까. 그 애씀이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다음 차례가 누구일까.’ ‘그 다음 차례에 내가 있지는 않을까.’

  오늘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가치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 우선 가치를 전혀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 우선 가치를 혹여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우선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은 다름 아닌 성전 재건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결코 늦추거나 미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버린 성전을 재건하면서 저들의 신앙과 삶도 함께 재건해야만 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저들의 구심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그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저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방해하는 세력에 의해 마땅히 해야만 했던 그 공사를 하지 못한 체 무려 16년 동안이나 방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초 공사만 하다 만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배가 아닌 온갖 쓰레기 잡동사니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저들 백성을 하나로 묶어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성전의 자리가 그러했을 것이니 저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들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을 것이지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저들이 제일 먼저 해야만 했던 것이 성전을 수축하여 재건하는 것이었듯이 여러분, 악한 마귀에게 사로잡혀 포로 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해방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을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지어져가야 할 성전으로 잡았습니다만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곧 성전이 되어져가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 성전을 지어가는 작업을 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성전에서 시와 찬미가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날 구원해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이것이 얼마다 크고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절대 작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작다고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수 없습니다. 10절에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위해 구심점 역할을 하는 성전을 지어가는 것,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되도록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가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크고 귀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술을 벌려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면서 기도하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좌우되지 않아 언제 어디에서나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삶이 가장 복되고 존귀한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 해설에서 제 일문,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에서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일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여 함이니라.’(43:21) 아멘.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찬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뽑고 뽑아도 끝없이 자라나는 그 풀들을 또 뽑으면서도 기뻐하고 있는가. 폭염과 열대야, 장맛비와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들에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인생의 제일 된 목적에 합당한 자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존귀히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34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