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성령이여, 하나 되게 하소서!

요엘 2:28-32; 고린도후서 5:18-19; 요한복음 7:22-23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5-19 09: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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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5-19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살다 사랑하다(24:61-67)한맘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살이에서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들 중에서 오늘 우리는 교회 가족들로 만나서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김정희 집사님이 주중에 이마트 편의점을 경영하시는 이정양 집사님하고 사택에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쉴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진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함께 먹고 웃으면서 보낼 수 있는 교회에 가는 것이 기다려지면서 좋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가시는 걸음에 한맘마트에 있는 채소들을 많이 뜯어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귀하지요.

 

  특별히 그 만남들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이요 귀한 만남이라 한다면 단연 부부간의 만남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일이지요. 세상에는 별별 남자들과 별별 여자들이 많지만 그 별별 사람들 중에서 유별나게도 한 사람을 만나서는 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은미, 동미, 철미와 선을 봤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철미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금미를 만났으면 달라졌을 수도 있었는데, 금미는 못 만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장로님 딸이 선교사님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혼을 하게 되는 스토리가 참 재미있습니다. 둘이서 선을 봤다고 합니다. 그때 남자 선교사님이 선교하는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여자 쪽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손으로 닦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남자의 마음에 딱 든 것입니다. ‘, 이 여자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나서 물어보니까 그러더라는 것이지요. 그때 선을 보는 자리에서 눈에 티가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티를 빼느라 눈에 손을 가져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 쪽에서는 착각을 한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이뤄 가시는 역사를 보게 되면 재미있습니다. 드라마틱할 때가 있고, 코미디 같을 때도 있어요.

 우리 교회 어떤 분은 여자 집안 쪽에서 반대를 하니까 술을 한껏 마시고 들어가면서 화분을 다 두들겨 부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한 주일씩 정해서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로 드렸습니다. 오늘 주일은 특정하게 부부주일로 제정되어지지는 않았지만 모레면 21일로, 부부의 날이지요. 둘이 하나가 되어졌다는 의미로 부부의 날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부주일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해 가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도 역사해 가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가정은 모든 사회 공동체의 가장 최소 단위입니다. 그 최소 단위 가정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은 부부지간입니다. 이 부부가 기본이 되는 가정은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어떤 때는 참기름이 볶아져서는 고소한 냄새가 십리 백리까지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너무 많이 지지고 볶는 바람에 세계대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모두들 그렇게들 살아가는 것이지요. 저희도 똑같습니다.

  지난주일에 공동체 나눔의 시간에 들으니, 이점춘 집사님은 몰래 따로 챙겨두고 있는 비타민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비타민 L’입니다. ‘LOVE 최현주입니다. 저는 낯간지러워서 전혀 그런 말을 쓸 줄도 할 줄도 모릅니다만 우리 이점춘 집사님은 참 대단합니다. 먹이를 찾아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는 늑대에게서 목을 안 물리고 살아남는 방법을 너무나 잘 터득하신 것 같습니다.

 

 

 부부가 서로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우리네 인생은 성장해가고 성숙해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결혼의 신비를 통해서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더 많이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생활신학자 전성갑 집사님은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을 결혼한 후에 아내와 함께 살아가면서 배웠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만나서는 가정을 꾸리면서 알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 중심이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그대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가 웃어야 내가 웃을 수 있습니다. 그대가 편안해야 내가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배불러야 나도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잠들어야 나도 잠들 수 있습니다. 그대가 힘을 내야 나도 힘이 납니다. 그대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상대방을 이렇게 부릅니다. “자기야, 자기야그 상대방에게서 나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정선희 집사님이 한맘텃밭에서 캐간 파를 집에서 손질했나 봅니다. 쪽파나 대파를 손질하면서 물에 씻을 때면, 푸른 잎사귀와는 다르게 밑 부분은 얼마나 희고 깨끗한지 모릅니다. 아기들 피부를 보는 것처럼 기분이 맑아집니다. 집사님이 그 손질한 파뿌리를 쟁반에 담아 사진을 찍어서는 이런 글과 함께 밴드에 올렸습니다. ‘다시물 내려고 남겨둔 파뿌리가 참 깨끗해요. 목사님 마음 같이.’

  저는 집사님께서 쓰신 그 밴드 글을 읽으면서 또 주세요.’ ‘더 주세요.’로 읽혔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래서는 아내를 크게 불렀습니다. “봐라. 내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지 아나.” 그랬더니 아내가 한다는 말입니다. “아이구, 무슨 소리를 하냐. 자기는 요새 가면 갈수록 좁쌀영감이 다 되어간다.”

  가까이에서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좋게 인정받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요. 가끔씩 한두 번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야 잘 대해줄 수도 있고 잘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파뿌리 같이 아주 깨끗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눈만 뜨면 보게 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지요. 잔소리꾼 좁쌀영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와 산 지 20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이 말이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살면 살수록 더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납니다. 부부는 살면서 닮아간다고 하는데, 저희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송화 가루가 많이 묻어서 세차장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집사님은 동전을 바꾸더니 물을 마구잡이로 뿌려댑니다. 그리고는 금방 거품이 나는 비누칠을 해댑니다. 쓱쓱 닦는가 싶더니, “다 했다.” 그러면서 조수석에 털썩 앉아 버립니다. “빨리 가자.”고 합니다. 저는 이곳저곳을 닦느라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아내는 앉아서는 빨리 집에 가자는 겁니다.

 이렇게 아내는 시작도 빠르고 끝도 빠른 반면, 저는 시작도 느리고 끝도 느립니다.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없습니다. 닮아간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연초에 한두 번 쓰다 만 공책을 다 써내가느라 고생을 하는 것은 여전히 남편인 제 몫입니다. 이런 아내와 살면서 숨을 골라야 할 때가 많습니다. 자칫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코에서 더운 콧김이라도 거칠게 나올 때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고르게 숨을 쉬느라 제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성격이 안 맞는 남녀끼리 둘씩 묶어서는 부부로 만나게 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안 맞는 사람들끼리 묶어놓고서는 어떻게든 살아가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살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지요. ‘, 나로 하여금 아내를 통해서 깎여 다듬어져가게 하시는 모양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성인이 되어가는 출발점으로 아내를 만나게 하신 것이겠구나!’

  서재에 있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사택에 들어섭니다. 현관문 입구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어 마십니다. ‘가구가 재배치되어 있지는 않을지.’ ‘택배기사가 왔다 가지는 않았을지.’ ‘또 어떤 일을 벌여놓았을지.’ 숨을 길게 내쉬면서 제 자신을 다독이면서 각오를 다집니다. ‘그래, 나는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부부가 살아가는 한 가정에서는 6명이서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양가 부모님 네 분과 함께 말이지요. 아내가 저에게 어떻게 당신은 당신 아버지하고 그렇게 똑같아지느냐.”고 합니다. 그래서는 제가 그랬지요. “나는 지금 장모님하고 사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여섯 명이서 한 집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사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어떤 때는 장인어른과 시어머니가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아내가 저에게서 시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다들 엇비슷하지요. 오늘날 우리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도 보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과 리브가가 들판에서 부부가 되어 한 가정을 꾸리기 전에 처음 만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가슴 설레는 장면입니다. 처음에야 얼마나 좋습니까. 이 둘이 만나는 들판은 지금 노을이 붉게 물들면서 들꽃과 함께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좋지요 붉게 물드는 노을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이 둘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만나는 과정을 잠시 보면 그렇습니다. 이삭의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은 자신이 신임하던 늙은 종으로 하여금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해오게 했습니다. 이방 가나안 땅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땅까지 가서 구해오라 했습니다. 그렇게 할 것을 맹세까지 하게 했습니다. 이에 종은 낙타 열 필에 각양 보석을 싣고서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가 마침 동네의 여인네들이 물을 긷기 위해서 우물가로 나오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성 중의 딸들 중에서 우물물을 길으면서 자신에게 물동이의 물을 마시게 할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해주신 이삭의 신붓감인 줄 알겠습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리브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빠르게 응답해 주시는지 몰라요. 어떤 때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그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미처 생각도 하기 전인데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비해 주시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리브가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할 정도였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배려심이 있는 여인이었고, 적극적인 여인이었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 과정에 있어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리브가에게 간곡하게 요청을 합니다. 열흘이라도 아니면 며칠만이라도 더 묵고서 가라고 했습니다. 정을 더 나누고서는 가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리브가는 가족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곧장 그 다음날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보통 성격의 여자가 아니었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누가 이 리브가를 닮았을까요. 이런 리브가의 기질과 성격에서 우리는 야곱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에 이삭은 네게브 지역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그는 저녁 묵상 중이었습니다. 생각이 살찌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63절에,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했습니다.

 이삭은 들판에 있으면서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가운데 묵상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활달한 성격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삭입니다. 성경에서 보게 되는 이삭은 유순하고 온순하고 온유한 사람의 대명사요 아이콘입니다. 느긋한 편입니다 본문에서도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에 묵상하는 중이었습니다. 묵상은 생각을 농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콜드브루, 더치커피를 한 방울 한 방울 내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삭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러고 있었겠지요. ‘사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어머니 사라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이별의 상실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를 물었을 것이고, 죽음 이후를 내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신 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붙여 주실까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삭과는 달리 리브가는 이삭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낯선 환경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전혀 갖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모험정신이 강하고 적극적입니다. 이렇게 지금 리브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중인데 반해서 이삭은 발걸음을 멈추고서는 묵상하는 중입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지요.

  저희 어머니는 잠시도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시는 편입니다. 그에 반해서 아버지께서는 잠시도 생각을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손이 바쁘고, 아버지는 생각이 바쁘셔요. 그래서 어머니는 많은 일들을 하시고, 아버지는 많은 생각을 하십니다. 너무 안 맞지요. 느려터진 아버지로 인해서 어머니는 속이 터지려고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너무 놀라운 것은 이 두 분은 같이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리브가로 하여금 부부로 묶어주시기 위해서 들판에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이삭이 눈을 들어 리브가를 바라봤고, 리브가 역시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봤습니다. 그때 리브가가 얼른 낙타에서 내렸습니다. 64절에서 종에게 묻습니다.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그랬더니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립니다. 남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늑대의 영민함을 가졌을 리브가가 한 번의 몸동작으로 이삭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는 이들의 다음 삶이 이어지지요. 67절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이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세월이 흐르는 중에 자식도 태어납니다. 가축도 늘여갑니다. 재산도 늘여갑니다. 누구나 그렇게들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사역지를 옮기시고는 얼마 되지 않아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에게서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애 놓으려고 왔나.” “여기가 애 키우는 데야.” 그 말을 듣고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목회자로서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우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뭐라고 그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니지요. 흘러가는 세월 따라 무작정 흘러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인지라 함부로 살다 갈 수 없어야 하겠기에 게을러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쳐서 곧추 세워내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만 때워갈 수는 없기에 어떻게든 시간을 채워내려고 애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왜 많고 많은 자리에서 하필 이 자리를 내게 허락하셨는지를 헤아리면서 어떻게든 이 자리를 살려내고, 이 자리에서 살아나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말이지요. 먹고 마시면서 말입니다. 풀을 뽑고, 야채를 심고, 이웃을 만나가면서 말이지요. 누구든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누구든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어우러져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충족시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오게 하신 삶의 축적된 소중한 경험을 이웃들과 나누어 가게 하시고, 더하여 후대들에게 전수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기옥 목사님이 계십니다. 농촌 지역에 위치한 한 교회에서 27년간 목회하시다가 후배 목회자에게 자리를 주신다는 생각으로 65세에 자원 은퇴를 하셨습니다. 이 분이 살아낸 삶의 크기는 참 대단합니다. 농촌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뭐 대수로울 것이 있습니까. 드러낼 만하고 화려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연세가 드신 분들이 주를 이루는 농촌 교회의 현실은 그야 말로 뻔합니다. 농번기 때에는 교인들이 거반 예배 시간에 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드는 생각이 있지요. ‘, 이 분들에게는 예배 시간을 빨리 끝내주는 것이 은혜이겠구나!’

  그런 농촌 지역에서 이 목사님은 목회를 하시면서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로 섰습니다. 누구나 살아가야 할 인생에 있어서 한 그루의 거목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줄기 가지를 솟구치게 해야 하는지를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농촌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무성한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내셨는지 모릅니다.

  27년간이었으니 자식들을 그 교회에서 다 키워내셨겠지요. 결혼도 거기에서 시켰습니다. 거기에서 큰 병으로 수술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지난 세월 동안에 태풍에 비바람이 치는 때에 하천이 범람하면서 교회당과 사택을 완전히 쓸어가 버린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세월 속에서 그런 일들은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예전에 한 번은 사모님께서 그러십니다. “우리 목사님은요. 누가 배추나 무 같은 것을 가져다주시면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는 들어오세요.” 그러니 사모님 입장에서는 누가 얼마나 가져왔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가져다주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 미주알고주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나중에 그 채소를 가져다주신 교인이 사모님께 묻습니다. “사모님, 다 드셨어요.” 그럴 때면 사모님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난처할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뭐든 이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장목사님요. 왜 모든 것을 그런 식인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럽니다. 그러면서 사모님이 종다리처럼 종알종알거려요.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면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모님 말씀이 목사님의 흉을 보면서 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님을 칭찬하면서 높여주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이렇게들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목사님께서 사모님을 뛰어넘으신 것 같습니다. 아름드리나무 그늘로 이 사모님을 아예 덮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모님이 종알종알거려도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시기만 할 뿐입니다. 사모님의 이런 마음을 목사님도 알고, 목사님의 그런 마음도 사모님도 아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도 그렇게들 살아들 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살다보면 그렇습니다. 살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나로 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한 사람을 묶어놓으시고는 부부로 살아오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두루두루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부부에게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일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뤘기에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부부에게서는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붙여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했기에 사랑할 만하고, 저렇게 했기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안 보고 싶으면 안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안 봅니다. 그게 오히려 편하기 때문이지요. 더럽고 치사하다 싶으면 그냥 피해버릴 수 있습니다. 안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에게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검은 머리가 팥 뿌리가 되기까지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일어날 때나 잘 때나, 죽으나 사나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고 싶다고 해서 지고, 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겁다고 해서 벗어 내던질 수 없는 것이지요. 바로 그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이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쓰디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물만 삼키는 것이 아니라 쓴 물도 들이켜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이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감할 수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의 흉허물과 과거와 상처와 약점과 단점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었음을 부부관계 속에서 깨우치고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부생활을 통해서 우리 인생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미와 크기를 크게 더 크게 가져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살아내야만 했던 인생살이가 힘에 겨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힘 있게 써주셨습니다. 자신들에게서 태어난 야곱과 야곱을 통해서 낳은 열 두 아들을 통해서 열 두 지파를 형성하게 하시면서 한 민족을 이뤄가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네들은 주어진 인생을 그저 살았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주어진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시지요. 필요한 믿음도 가져가게 하시고 의미도 채워주시고 사랑도 채워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살다 믿어가는 것입니다. 살다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살다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다 믿다. 살다 소망하다. 살다 사랑하다. 이러한 삶과 영원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4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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