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 생명ㆍ치유ㆍ회복

요한복음 10:10b; 로마서 8:18-19; 미가 7:8; 시편 91:2-3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20-08-16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9:1-12)한맘

  

 

 화요일이면 우리 재현이가 훈련소에 입소를 해서는 한 달 정도 군사 훈련을 받고서 퇴소한 후에 공익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이 날을 두고 김정희 집사님께서 감사하게도 밥을 한 끼 사신다고 합니다만 고생하게 될 재현이를 생각하면 음식이 잘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곧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벌써 기문이는 제대 날짜를 채 5개월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를 잘 안 가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을 찌워서라도 과체중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제 외 조카가 그랬습니다. 제 아들 녀석은 키를 작게 낮추려고 시도했습니다. 저도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병명으로 진단서를 끊어서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고 해서 인성검사로 정신병이 있는 것처럼 해보려고도 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군대에 갑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잡혀서라도 끌려가게 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네 저마다의 인생들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고 뜻한 바가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본문 속에 나오는 맹인이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핏덩어리 모세가 나일강에 버려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왕궁에 가게 된 것도, 바로에게 쫓겨서 미디안 광야로 내쫒기게 된 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는 과정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옆의 옆집의 성경 침례 형제가 한 번은 같이 모여들 있는 자리에서 그럽니다. “, 나는 내가 여기서 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기는 다른 곳에 살기 위해서 충북 음성에도 집을 봐 두었었고, 여기저기 물색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살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혹자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이것은 운명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할 것이고, 혹자는 하나님의 섭리다.’라고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군대라고 해서 오만상을 찡그리며 지낼 것인가. 아니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마치 자기는 군대 체질인 것처럼 지낼 것인가. 그 자리에서 죽자고 한 번 살아보는 것이지요. 제가 군에서 들었던 최고의 말씀 중의 하나는 행복은 계급순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서 제가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한맘에 있으면서 한숨이나 푹푹 쉬면서 체념하듯이 못 살겠다.’ ‘죽겠다.’ 그러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살아가는 저나, 저를 바라보는 여러분들이나 하나님이나 참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마음으로 원해서 계획했던 곳은 아닐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어 하나님의 뜻과 때를 찾아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을 여러분,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살 것이 아니라 눈 만난 강아지처럼 살아가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하루를 기대하며 흥에 겨운 삶을 살아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삶이 복되고 귀합니다. 철없는 남편처럼 보이지만 한 없이 사랑스러워 로또 맞은 경자씨처럼 살아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집에서 한 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로또를 맞더라도 1등을 맞은 것처럼 살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복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만 요새 보면 그렇습니다. 2020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연초부터 불거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서 온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는데, 연달아 긴 장마에 따른 폭우까지 쏟아지면서 설상가상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야말로 난리가 따로 없는 듯 합니다. 또 이제는 폭염 경보까지 울려대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공공 안전 경보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폰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 며칠 새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 폭풍우 흑암 속 외치사 빛으로 /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2절은요?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벌써 절기상으로는 입추가 지나고 말복도 지나가 버렸지만 장마가 언제 끝날는지,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는지 기약조차 할 수 없습니다. 논밭이 물에 잠기고, 수확철을 앞두고 있던 농산물이 버려지고, 집이 부셔져 내리면서 삶도 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심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두고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여,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쳐 몰아칠 때에 주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재해로 인한 시련과 환난 앞에 우리네 인생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한꺼번에 이런 일들이 밀어닥치는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몇 년 전에 이 지역에 지진이 몇 차례에 발생하면서 혼돈에 빠졌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럴 때에라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내 자신을 온전히 지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시련과 환난들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지긋지긋하다 하면서 몸서리를 쳐도 우리 신앙인들은 지긋이 내 자신을 잡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이 들수록 입술의 문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지켜야 합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욕지거리 한 한 마디라도 새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허튼 생각 하나라도 삐져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욥이 엄청난 고난이 겹쳐서 올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 심정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그랬습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예배했던 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자기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또 고백하지요.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0-2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가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느냐.’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던 아내의 말대로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때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해 가시는 일이니 자기는 주실 때에도 물론이거니와 거두실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욥이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그냥 죽어버렸더라면 그의 생은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였습니다. 그 길에서 맹인을 만납니다. 이 맹인은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보고서는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어떻게 생각을 해도 고딴 식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그렇게 되어진 것에는 모르면 몰라도 죄에 기인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욥이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 괴로워할 때에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죄 값을 받는 것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지요.

  여러분, 날 때부터 눈이 멀었으니 어쩌면 그의 인생은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최악에 처해 있었던 사람에게 죄악까지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살기가 버거워 고통스러웠을 그에게 영적으로도 올가미를 씌우는 것입니다. 오랏줄을 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책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죄책감에 사로잡혀 옥죄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인 냥 몰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일으키는 오해와 착각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의 때를 해석하는 방법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거다.’ 얼마나 하기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한 성도가 어떤 목사님을 찾아가서 삶에 일어나는 어려움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럽니다. “회개 기도하십시오.” 생각나는 잘못을 두고 회개기도 후에도 여전히 형편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하니 한다는 말입니다. “아직까지 숨겨 놓은 죄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교인을 죄책감의 올가미로 꽁꽁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신병훈련소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철책선까지 갔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만 굽이굽이 눈이 덮여 있는 산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가도 가도 눈 덮인 산이었습니다. 그러다 철책선 초소까지 갔습니다. 그곳에 제일 먼저 도착했더니 말년 고참이 하는 말입니다. “너도 전생에 엄청 죄를 지었구나!!” 이런 산골짜기 오지에 온 것은 전생에 죄를 짓지 않았으면 올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한결이가 갓난아기 때에 가와사키 병에 걸려서 고생고생 하다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어린 것이 고열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만 들으면 믿음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처럼 보여질 한 중직자가 저를 보고 그럽니다. “목사님, 어린 아이가 병에 걸리는 것은 부모의 죄 때문인 줄 아시지요.” 꼭 그렇게 말해야 직성에 풀리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전혀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꽤나 있다는 사람에게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죄와 잘못에 대한 징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하기 좋은 말로 전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실 하나님의 일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한 우리는 그들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범하는 너무나 크나 큰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자기 판단에 빠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겐, 무엇에겐 가리지 않고 판단을 내려서는 정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판단을 내려 정죄하는 것에 빠르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으려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제가 제 인생에 있어서 더 부드러워지지 못하고 누그러지지 못한 이유 중의 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판단을 내리는데 빨랐다는 것입니다. ‘왜 저렇게 밖에 안 돼.’ ‘왜 저렇게 밖에 못해.’ ‘왜 저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수없이 내린 그런 판단과 정죄들로 인해서 결국은 제 자신의 심성이 강퍅해지고 완악해져 버립니다. 정말 옳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며칠 전에 먼저 일본에서 그런 폭우가 내렸습니다. 그래서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옳다구나!’ 아주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sns상에 일본에 대한 혐오성 발언이 폭우만큼이나 잔인하게 퍼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놈들이 죄값을 받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지요. 그러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런 장대비가 한국에도 얼마나 쏟아져 내렸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혀끝과 손끝, 생각의 끝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의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109:17,18)

 

 올해 들어서 얼마나 비가 많이 와서 피해를 봤던지 어떤 이들은 빗소리에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라고 합니다.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자연적인 재해가 임하는 것을 보면서 들게 되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의 결국이 이와 다를 바 없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재해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처럼 평생에 걸쳐서 쌓아온 것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꺼져 버립니다. 하루아침에 다 끝이 나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사 세상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러한 때에 우리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논과 밭, 그리고 집들과 사업장까지 잠기고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물음은 장차 우리가 죽음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묻게 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서신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죽음 너머 심판의 때를 위해 인생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 시킨 말씀입니다. 그렇겠지요. 죽음을 생각하고 살면 죽음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노후를 생각하면서 젊은 때를 보내듯이 사후를 생각하며 생애를 보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지간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변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우리말에, ‘철들자 망령난다.’고 했을까요. 성경에서 보게 되는 탕자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 집을 떠올리면서 발걸음을 옮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돌이킵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어서야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 어떤 시련이나 환난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피해 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로 그런 것들 앞에도 서게 하십니다. 그때를 통해서 보여주실 것이 있고 알게 해야지만 되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치고 있는 이러한 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깨우치시고자 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나버릴 것 같지 않은 것들로 이 세상이 다 끝나버릴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내 삶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던지시는 말씀도 들을 수 있어야 하지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오만에 취해 끝없이 높아지려는 교만과 끝없이 취하려는 탐욕으로 인해서 타락과 나락으로 밑도 끝도 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이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무나 큰 소리로 말씀하시고 계심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인류를 위해서는 기도를 별로 한 적이 없습니다만 요새는 기도 속에 인류라는 단어가 그나마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과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 찾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묻게 됩니다. 제가 다리가 아파 걷기조차 힘이 들었을 때에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찾았었던 하나님으로 인해 오늘날 제가 이 자리에게 버텨가는 힘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낯선 환경으로 가게 될 재현이도 그 자리에서 다른 때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봐 왔던 예배의 현장 중에서 제일 뜨거웠던 자리가 신병교육대에서 드렸던 예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배당을 가득 메운 신병들이 너무나 뜨겁게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아이가 힘에 부칠수록 엄마를 더 찾듯이 신앙인은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쪽으로 기운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이고 축복인 것이지요. 키질을 하면 할수록 알곡은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쭉정이는 밖으로 밖으로 향합니다.

 

 예전에 시골의 한 권사님이 새벽 기도회를 드리기 위해서 오시다가 돌부리에 걸려서는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그때 제일 드는 생각이 다른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이구 하나님, 제가 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작은 일에도 하나님을 먼저 부르면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옆집의 목사님이 며칠 전에 유튜브에서 봤다면서 이야기를 해 줍니다. 중국에 코로나 같이 생긴 우박이 떨어지는데, 유튜버가 하늘을 보면서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더 부어봐라. 그래도 내 차는 부셔지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지요. 이미 그 마음은 부셔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일어서다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도 그러지요. ‘하나님, 저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인지요.’ ‘하나님, 제가 뭐라도 잊고 있는 것이 있는지요.’ 하나님을 안 믿는 이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재수가 없으려니 더럽게 없네.’ 그럽니다.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같은 것에도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 포로기를 거칩니다. 그때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29:11-13)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시련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 당신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재앙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얼룩진 자리에서 미래와 희망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그 평안과 미래와 희망은 하나님 당신에게서 올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지요. 미래를 책임져 주시기를 원하시지요. 희망을 안겨다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이 주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맹인의 자리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현장에 있었을 때에 그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그 자리가 어디이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당신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나타내 보여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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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주님께 꾸어 드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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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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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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