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성령이여, 하나 되게 하소서!

요엘 2:28-32; 고린도후서 5:18-19; 요한복음 17:22-23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1-18 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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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1-20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2019년도 한맘녀(16:7-14)한맘

 

  지난주일에 저희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 팔순 잔치를 열어드렸습니다. 가족들끼리 한 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팔순을 두고 준비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어머니에 대해서 정말 잘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어머니께서 특별히 좋아하시고 즐겨하시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어린 날부터 보면 함께 모여서 밥상을 나눌 때에 어머니께서 어떤 반찬에 특별히 손이 가시는 것을 거의 못 봤습니다. 고기를 함께 먹을 때면 몇 점만 드십니다. 그것만이 아니지요. 그 자리에 없는 자식을 위해 남겨두시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더하여 다음 끼니를 위해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으로서 어머니가 뭘 좋아하시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느 어머니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한 번 제대로 살펴드리지 못하고 내 중심에서 어머니를 대했던 지난날들의 모습들이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온종일 일하는 중에 일찍 일어나며 늦게 누우면서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으셨던 어머니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가슴에 걸렸습니다.

  살아오면서 보니까 함부로 말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짜증과 신경질을 부렸던 적도 많았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처럼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는 언제나 제일 밑이었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던 사람이었고, 화풀이의 대상이었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이었고, 적당히 무시해도 될 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효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렇게 슬피 우는 모양입니다.

 

  그 어머니께서는 교회에서도 참으로 많은 세월 동안 열심이셨습니다. 쓸고 닦고 치우셨습니다. 힘들고 궂은일을 거의 도맡으셨으며 앞장서서 하셨습니다. 교회 분들이 어머니를 두고 밥 권사님으로 불렀습니다. 그 별칭에 걸맞게 어머니께서는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밥과 국을 끓어내셨습니다.

그래도 군소리 한 번 내뱉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일한 만큼 말할 권리가 있었다고 한다면 저희 어머니께서 제일 많은 말씀을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도 여전히 어머니께서는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여자였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여자였기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꾹꾹 눌러 속에만 담아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팔순의 어머니께서 살아오셔야만 했던 그 세월이 흘러서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여성들의 헌신이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여성의 지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분위기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 오늘날 교회 밖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교회 밖 사회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는 중이지요. 그렇지만 교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당의 대표 자리를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시대를 볼 때면 그 변화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교회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곳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고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가부장적 성차별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묵인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새 시대를 여는 변화의 주체가 되어 주도하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처럼 남아 있어서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목사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처럼 성경에서는 여자들로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고린도서신을 통해서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보면 달리 해석해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맘교회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다 보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요. “여성들이여, 남자들도 말 좀 하게 좀 잠잠하라.”라고 말입니다. 2019년도 한맘녀들이 말이 많으니 남자들이 낄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의 교회 상황에서는 여성들의 발언권이 셌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지요.

  더하여 문자주의 해석이라는 것이 또 있습니다. 문자주의 해석은 문자 그래도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그대로 쓰여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잠하라했으니 잠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오늘날 교회에서는 천주교에서 여성들로 하여금 머리에 수건을 쓰게 하듯이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문자대로 할라치면 그것도 그대로 해야지요.

  그런데 지금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주의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의 모순에 걸려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보다는 그 법이 제정될 수밖에 없었던 법정신이 중요한 것처럼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요 정의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남자들이 행주를 들고 식탁을 훔치고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여성을 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남성이요, 지금까지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살아왔기에 어떠한 모습이어야 차별이 없는 교회인지에 대해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켜켜이 쌓여왔던 것들을 털어내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어렴풋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배워가야 합니다. 알아가야 합니다. 미처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지난 세월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왔을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해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고, 정책과 비전을 수립하는 일에 있어서 같이 참여하는 것이지요.

  이점춘 집사님이 정성스럽게 머리를 기르듯 여신도 중에서 빡빡 머리를 밀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성갑 집사님이 허세를 과하게 떨 듯 이연숙 집사님도 그에 못지않게 허세가 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남자는 그렇게 해도 되고 여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않아야지요.

  사람이나 교회에 있어서 여러분, 우리가 어떤 틀에 가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자가 말이야.’ ‘애들이 말이야.’ ‘목사가 말이야.’ 그러지 말았으면 합니다. 많은 교회에 멍들고 병든 사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모라는 틀에 가두고서는 골병과 화병에 시달려 고통하는 사모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 아들이 말이야.’ 그러지 말았으면 합니다. 목사가 욕도 할 수 있고 화도 낼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평소에 화를 내면서 욕을 하면 아이들이 그래요. “, 아빠 목사 맞나?” 그래요. 제가 자기들을 목사 아들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누구라도 가두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가두려고 할 때에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역시 나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서는 나를 가두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로이 부는 바람처럼 성령의 사람으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며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에 하갈이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학창시절에 이 본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지난 세월에 있어서까지 이 본문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갈과 같은 여인네까지 신경 쓰시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갈이 뭔데말이지요.

  하갈이라는 여자는 애굽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입니다. 미천하고 비천한 여인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사라가 오래토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그녀를 취하게 했습니다. 이에 임신을 하게 되지요. 그랬더니 이 하갈이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서 여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이에 사라가 괘씸하게 여기고는 하갈을 학대하게 되고, 그 학대로 인해서 하갈은 도망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보내셔서는 광야의 샘물 곁에 있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통 하던 이 하갈을 만나주십니다. 예전에는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 말이지.’ 그랬습니다. 이방인이요 여종에 불과한 이 형편없는 이 여인이 도대체 뭐라고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나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고 만나주지 않았던들 그게 큰 문제라도 되는 것인가.

  목말라 죽든 말든, 사자 밥이 되든 말든, 다른 남자들에게 끌려가든 말든, 혼자서 어디 가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든 말든, 신경을 끄고 내버려두었던들 말이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유다와 요셉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지 그 외의 주변인 같은 사람이 뭐가 그리 중하다고 굳이 그 여인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셨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에도 그 대상을 바꾸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살기 위해 찾아든 난민과 탈북민들에 대해서, 다문화 가정과 타문화권 사람들에 대해서, 노약자, 성소수자, 장애인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이 도대체 뭐라고 말이지.’ ‘이들이 어떻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굶든 말든’ ‘어디서 자든’ ‘떨든 말든’ ‘죽든 말든’ ‘손가락이 잘리든 말든어차피 이들은 사회를 좀 먹을 자들일 것인데, 안 될 자들인데, 어차피 이들은 구원에서 배제된 자들일 것인데, 지옥에나 가서야 정신 차릴 자들일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임신을 하게 하심으로 이삭이나 빨리 허락해 주실 것이지 하필 하갈이라는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니 이게 웬 말인가.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바로 하갈과 같은 처지의 여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신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한 가운데 울부짖어야만 했던 그 하갈이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채로 비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내 부모님, 내 형제, 내 자식들이 바로 이방인이요 타인이요 나그네요 병든 자요 노약자라는 사실을 미처 헤아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내가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렇게 하갈을 밀어내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배제와 차별 속에서 숨죽여 살아온 내 자신이 나와 너무나 닮은 하갈을 보면서 싫은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갈이면서 하갈로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나는 다른 것처럼, 나는 괜찮은 것처럼, 나는 문제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압니다. 어리석은지를 알지요. 미숙한지를 압니다. 상처와 허물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흐느끼는 것입니다.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억울하고 원통하여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하는 원한 맺힌 한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눈물을 닦아주시고, 한숨을 거두게 하시고, 넘어짐에서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타문화권 타종교권에 있었던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을 주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낮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높아진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에 하와가 하나님을 고백하지요.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아멘.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다 만나주셨지요.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마녀를 사냥하듯이 혐오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을 만나주셨지요. 거라사 광인을 만나주셨지요. 돈밖에 몰랐던 삭개오도 만나주셨지요. 남자만을 찾아 헤매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지요.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도, 어린이도, 세리도, 창기도, 십자가 한 편의 강도도 만나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만나 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교회에 그 어떤 누구라도 차별을 받거나 배제될 수 없습니다. 지난주일에 변창열 집사님 첫 기도 기념으로 수제 만둣국을 한다고 했을 때 양승기 집사님이 차별할 수 있느냐 하시면서 진담 같은 농담으로 밴드를 도배했던 적이 있습니다. 붉은 띠를 매야 한다고 했지요. 저는 이 농담 같은 진담 속에서 이 차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입니다. 미국 어느 마을에 백인들만 다니는 교회가 있었고 흑인들만 다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흑인 꼬마 아이가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는데 백인교회를 지나가야 되는 위치에 살았습니다. 백인교회를 지나갈 때마다 들어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백인교회에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이 꼬마가 큰마음을 먹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관리인에게 사정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꼬마는 저녁에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백인교회에 가보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잠깐 구경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얘야, 나도 그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단다.”

 

  제가 요새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 힌트를 얻어서 오늘 제목을 정했습니다. ‘2019년도 한맘녀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여러분, 주변인이나 열등한 존재는 없습니다. 아랫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감히 개돼지라 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 신앙의 고백자들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존재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명 존중의 신앙인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어제 서울에서 외조카의 결혼식이 있어서 주례를 섰습니다. 그 주례사의 일부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제가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존중입니다. 존중이 최고입니다. 존중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지요. 나한테 맞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쳐보려는 것이 아니지요. 감정싸움, 주도권 싸움은 개에게나 줘버리는 것이지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으셨듯이 상대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버릇과 기질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치약을 위에서부터 꾹 눌러서 짜는 것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냉장고에서 버리는 음식이 있어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코고는 것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삐치는 것도, 토라지는 것도, 투정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욕을 하면 욕도 받아주고, 화를 내면 화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못한 어린 날의 모습과 상처와 눈물, 아픔과 옹이까지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좌절 된 꿈과 함께 할 꿈을 받아주는 것이지요. 처가댁도 받아주고, 시댁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내 자신이 바다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헤엄을 치면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만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야지요. 매일 매일의 삶이 생애의 최고 정점에 서게 되어야 합니다.

 

  84살이 되신 저희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야들아, 네 엄마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철두철미 아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없이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설교를 할 수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로 인해서 힘을 얻어 소리치면서 설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서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면서 어우러지고 버무려지면서 신비로운 맛과 향과 색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에서 하나 되어 사는 기쁨과 행복을 더할 나위 없이 누려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4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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