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8-11-23 10: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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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1-2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쉼이 있는 터(11:25-30)한맘

 

 

  어떤 사람이 카톡 사진에 마지막 잎새를 찍어서 올려놓은 것을 봤습니다만 이제 이 주간만 지나면 한 장만 남게 되는 달력을 보게 됩니다. 달력의 수가 적어지니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빠르게 지나는 세월 속에서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마지막 잎사귀까지 다 떨어지게 되는 이러한 날에는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는 성찰과 영적 사색이 꼭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그러면 앞으로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하시면서 따로 홀로 기도하셨지요. 제자들에게도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재충전의 장소였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을 며칠 전에 만났는데, 그가 하는 말입니다.  “자기는 가을이 이렇게 많이 지나가버렸는데, 한 번도 가을이 왔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단풍이 이렇게 많이 든 것은 오늘에서야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잘사는 것이 아니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반갑게 맞이하고 가을이 떠나려고 할 때에는 잘 떠나보내야 한다.” 

 

 

  쉼 없이 달려가는 현대인들을 보게 됩니다. 촌놈이 서울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갈 때면 그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씨는 라면이 나온 때부터 우리 민족이 바빠졌다고 했습니다. 뜸을 들여서 밥을 먹는 가마솥 문화가 사라지고 인스턴트식품이 나오면서 더 바빠졌다는 것이지요.

  한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이 특징들은 결국 인간의 삶에서 쉼을 앗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는 콘크리트 사회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아파트나 빌딩 콘크리트 속에 갇혀서 살다보니 마음과 사고까지도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자기 아파트 옆에 사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몇 번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한 날은 자기에게 그러더라는 것이지요. “아주머니, 저는 아무도 알고 지내고 싶지 않으니 이제부터 인사를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합니까. 그래서는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는데,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때면 그게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남보다 좀 더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목표치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메시지를 보냈는데, 행간을 보니까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죽이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곁들여 이야기를 했더니 그럽니다. “이제야 한결 편해집니다.” 그래요.

  그렇게 살게 되니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지 몰라요. 두려움, 불안, 공포, 분노, 그리고 짜증을 증대시킵니다. 그 외 모든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콘크리트 시대, 스피드 시대, 스트레스 시대에 살고 있는 인생들은 저마다 쉼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지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뱉는 말이 쉬고 싶다’ ‘푹 쉬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쉼을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염려와 욕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잠간이라도 쉬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집니다. 계속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잠시의 시간도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염려와 욕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브레이크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들 있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편의점 알바를 월화목금에 저녁 6시에서 밤 10시까지 하고 있습니다만 언뜻 드는 생각이 시간을 늘려서 돈 좀 더 벌어오면 좋겠다.’ 한 번은 밤에 육수를 진하게 내서 어묵을 내왔습니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자기야, 알바 10시에 끝내고 편의점 앞에서 2시까지 오뎅 장사해라. 우리 돈 좀 더 벌어보자.” 이 말에는 인생들이 가지게 되는 염려와 욕심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공중의 새를 보게 하시고 들의 꽃을 보게 하시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낼 수가 없습니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만약 일과 쉼 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서는 그는 일이 아니라 쉼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극단적으로 바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쉬면서 할 수 있는 일, 즉 하나님 만나고 인생의 근본을 생각하며 시간을 음미하는 것이, 일하면서 이뤄지는 것보다 훨씬 인생에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을 인용하면서 설명합니다. 고래잡이배가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를 쫓고 있습니다. 바다는 쉴 새 없이 출렁이고 선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림처럼 앉아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가 바로 작살을 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말하기를 작살이 최고의 정확성을 갖기 위해서는 작살 던지는 사람이 수고 가운데서가 아니라 한가로움 가운데서 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작살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때가 되면 그는 작살을 정확하게 쏘아야 합니다. 모든 선원들의 수고와 노동은 바로 이때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을 보다 깊이 있게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분주함이라는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수고롭고 짐이 무겁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수고롭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양육해야 하기 때문에 짐이 무겁습니다. 직장에서 힘든 인간관계 때문에 짐이 무겁습니다. 이런 저런 질병 때문에 짐이 무겁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내면에 쌓인 죄의 짐이 나를 무겁게 합니다. 창세기 317절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 인생들은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부와 명예를 누린 솔로몬도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했지만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2:22,23)고 토로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생의 수고로운 짐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주로 술로 많이들 풉니다. 1인당 알콜 섭취량이 세계에서 단연 으뜸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하게 스트레스가 푸는 방법이 가장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가장 미운 상관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 잠깐이지 근본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습니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술을 마신다고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 욕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답답한 내면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무거운 짐만 얹어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멘.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지만 10대 때에 교회를 떠났다가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돌아왔습니다. 그는 신앙론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 최초의 15년간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18세 되던 때 내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톨스토이는 주님의 품에서 안식을 얻은 것입니다. 주님이 품은 쉼터였지요. 삶과 영혼의 쉼터였던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경북노회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양남교회 장로님들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박학수 장로님께 아들 샬롬이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곧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 잘 되었네요. 장로님이 계속해서 경제적으로 더 애쓰셔야겠네요.”

그러면 개척하셨던 사위되는 이목사님은요?” “. 이 목사는 지금 개척교회는 그만 두고 서울 강변교회에 담임으로 갔습니다.” 그럽니다. 강변교회는 꽤 규모가 큰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간 것입니다. “잘 되었네요. 장로님, 너무 좋으시겠습니다.” 그랬더니 흡족한 듯 웃으세요.

  그 이야기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떠오릅니다. ‘그러면 나는 뭔가?’ ‘그들에 비해 나는 뭐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를 숫자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이 얼마고, 교인 수가 얼마냐는 수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산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많이 벗어났다고 여겼는데, 아직까지 다 벗어나지를 못한 모양입니다. 영적 수양과 수련을 쌓아갈 필요성을 크게 느낍니다.

 

 

  어떤 한 분 목사님에게는 자기를 항상 짓누르는 두 개의 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대수준은 엄청 높은데 이에 못 미치는 자기의 능력으로 인한 짐이요,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성인군자처럼 고상하게 살고 싶은데 죄 때문에 위선적이 되어야 하는 이중성의 짐입니다. 이 두 가지의 짐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 보고자 몸부림 쳐봤지만 되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죄수가 수갑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옥죄어 오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이런 자기를 값없이 초청해 주셨다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너의 수고롭고 힘든 짐을 내가 대신 져 주리라.” 이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 목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자기의 죄와 강박관념을 다 내려놓았을 때에 주님께서 참 쉼을 허락해 주셨다고 합니다. 항상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쫓기는 심정 때문에 두 발 뻗고 잠도 편히 못 잤었는데, 그제야 참 자유와 쉼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쉼터 같아서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져봅니다. 내 속에 있는 묵은 짐들을 다 들어내는 교회였으면 합니다. 숨겨두었던 상처와 아픔이 승화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품 안에서 푹 쉬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부모님의 품과 같아서 푹 쉬고 잘 쉬었으면 합니다. 편안해야 쉴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에 교회 여동생 이연숙 집사님의 웃음의 지평과 몸짓의 지경이 커지고 넓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제 서로 많이 편해졌잖아요.” 그럽니다. 편해졌으니 거리낌이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집사람이 밴드에 단 댓글입니다. “주일만 되면 조증이 되는 듯해요. 매번 주일이 오기 전에는 이번 주일에는 좀 체통 있게 가만있어야지.’ 하면서도 여러분만 보면 좋아서 흥분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오늘 본문에 2526절에 어린아이들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만 우리들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묻고 따지고 계산하고 머리를 굴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고 순박한 어린아이였으면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그저 마냥 좋은 것처럼 우리도 마냥 좋은 삶이었으면 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어른스러움을 탈피해갔으면 합니다.

  25,6절에 보니까,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랬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순수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었으면 정말 복되겠다 싶습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우리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공동체를 가꾸어갈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행복하겠지요.

  은퇴하신 목사님이 한 번은 그럽니다. “박목사님,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은퇴하고 나니까 교회 공동체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어.”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공동체, 한 마음 한 뜻을 가지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것이지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가면서 나는 자연인이다.’를 찾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요. “아빠, 또 그것 보나.” 며칠 전에는 재방송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키가 작고 몸짓이 왜소한 50살 된 사람이 나옵니다. 잘 나가던 안경 사업이 IMF를 맞아서 부도를 맞게 되어서는 어쩔 수 없이 고향 산골로 찾아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하는 말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그런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상대방은 전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자격지심이 도가 넘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상대방보다 강해보이기 위해서 입에 거친 욕을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부도를 맞으면서 어디 갈 데가 없으니 고향 산천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는데, 놀랍고 감사한 것은 이 자연이 작고 왜소한 자기를 아주 크게 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자기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양승기 집사님이 이야기 했듯이 그 프로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실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 비해 나을 게 없지요.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그런 문제투성이였던 그런 사람들조차도 다 받아주면서 그로 웃게 만들고 낫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숲을 이룬 우리 교회도 그 어떤 누구라도 다 품어줌으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 말에도 웃어주고 공감해 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이 열려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비록 넘어진 모습으로 이 교회에 들어왔지만 함께 함으로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안에서 꼬여 있던 것들이 바깥으로 나와서 다 풀어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려주고 지켜봐주고 기도해줄 수 있어야겠지요. 늦게 피는 꽃은 있어도 안 피는 꽃이 없다는 말이 우리 교회에 꼭 맞는 말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프로가 진행되는 중에 진행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묻습니다. “여기 있으면서 혹 외롭다는 것은 못 느끼셨어요?” 그 질문에 십중팔구 자연인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집니다.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럽니다. “왜 사람인데, 외롭지 않겠느냐. 가족 생각이 참 많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 프로가 마쳐질 때가 되면 23일 함께 했던 이들이 헤어집니다. 그 장면에서 참 애잔해집니다. ‘이제 저 사람은 또 혼자구나.’

  그 프로를 시청하면서 우리 한맘이네 가족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게 다가왔습니다. 가끔 정선희 집사님이 잘 차려진 옷을 입고 올 때 , .’ 그러면 집사님이 계면쩍어서 이거, 작업복이에요.” 그럽니다. 저도 여기에 있으면서 직업병이 걸린 것 같습니다. 상사병입니다.

  상사병이 걸린다는 것이 참 좋지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끈끈한 정과 사랑, 의리와 우정으로 잘 묶여졌으면 합니다. 많이 있는 것은 나누고, 모자라는 것들은 채워주면서 함께 했으면 합니다.

 

 

  종종 가져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일까. 내 자신이 참으로 중요하지요. 그러면 이 중요한 나는 다른 이들에게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일까 아니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사람일까. 숨통을 트게 해 주는 사람일까 숨통을 조이는 사람일까. 밥을 먹을 때 함께 앉아서 먹고 싶은 나일까 아니면 같이 앉아서 먹게 되는 때면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만드는 사람일까.

  오래전 청년 때에 어느 어르신과 기차를 타고 김천에서 대구까지 가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옆 좌석에 꼼짝없이 같이 앉아서는 갈 수밖에 없었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는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 적잖이 긴장을 했던 모양입니다. 고개도 제대로 돌릴 수 없으면서 숨도 편하게 쉬지 못했던 지난날의 기억입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걸린 것 같았으니, 그때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 삶의 옆 좌석에 앉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귀중한 경험으로 자리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긴 기차 여행을 떠나는 중에 내 옆 좌석에 앉게 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할까 아니면 힘을 가질까. 그 여행을 나와 함께 끝까지 가고자 할까 아니면 얼마 가지 않아 중도에 내려버리지나 않을까. 당신 같은 사람이면 끝까지 가겠다고 할까.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한 정거장도 같이 못가겠다고 할까.

  나를 대하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나를 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내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들에게 대해주었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심결에 취하게 되는 몸짓을 비롯해 말투, 시선, 표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 내 자신이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꾸며서 나오는 위선적인 것들은 금방 그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작다고 여겨지는 것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배여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그 작은 것들조차도 나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심리적 거리를 재는 가늠자가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글을 써가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은 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내 자신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지요. 남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여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함으로 교만하고 괴팍해진 내 자신으로 인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지게 하신 십자가의 멍에를 지지 않으니 힘겹고 고통스러운 세상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서 찾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평생을 가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내 자신에게 참으로 모질게 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것들이 많은지 다그치고 윽박을 지르면서 내가 나를 그리도 못살게 굴었는지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나로 인해 힘이 들었던 것이고, 내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나를 대하는 이들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편해야 다른 이들도 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로 웃을 수 있어야 누구라도 내게 웃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고, 내가 내 안에서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야 모두들 내 안에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십자가의 당신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본받고 닮아가야지요. 그래야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정말 내 심령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저께 잠을 자려고 하는데 추운 날씨 탓에 코가 막힌 것 같습니다. 입으로 숨을 쉬면서 자려고 하는 중에 이런저런 얽히고설킨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떠오릅니다. 그때 주여.” 그랬더니 생각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숨통을 끊어버리려 하는 악한 영에게서 그 순간에서도 나를 건져 내사 숨통을 트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주님을 닮아 쉼이 있는 터전으로 그 지경과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14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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