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1-11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요삼 1:1-4)한맘

 

  점점 더 깊어지는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늦가을을 보냅니다. 더 깊은 사색과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 7일은 입동이 똑똑똑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왔습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형형색색 물든 잎사귀가 어느 새 낙엽이 되어 떨어져서는 바람에 뒹굴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남은 때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에 막 들어서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이 시점이 있기까지 거쳐 왔던 지난날들의 봄과 여름과 가을의 삶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내 삶의 잎사귀들도 하나 둘씩 떨어지다 보면 어느 덧 하나도 남지 않게 될 때가 있을 것인데, 그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아이들이 운동을 하기에 웃통을 벗으면 근육이 불끈불끈 솟아나 있습니다만 내 인생의 겨울에 이르러 잎사귀들이 다 떨어지면서 보게 되는 벌거벗겨진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살아온 삶의 근육들이 울퉁불퉁 잘 붙어 있을까. 나는 고목일까. 거목일까. 세월이 가면서 추해지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세월이 가면서 가치가 더해지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늦가을에 내리는 비로 인해 겨울을 재촉하고 있는 이러한 날에 진지한 물음을 던지면서 삶을 진중하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살면서 막 살다갈 수 없지요. 바쁘게만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진지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 무게 중심을 항상 아래에 두고 삽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에 힘을 쓰는 것입니다. 항해하는 배가 폭풍우를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배를 지탱할 수 있는 무게입니다. 이 무게가 없으면 배는 뒤집어집니다. 무게 있는 삶이 그래서 중요하지요. 무게가 있어야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샘물도 그렇지요. 깊을수록 좋습니다. 장마가 오든 가뭄이 오든 끄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뭄이 오고 장마가 왔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 솟는 샘물은 바깥 날씨나 기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오히려 따뜻합니다. 장마가 오든, 가뭄이 오든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양의 맑은 물을 냅니다. 영성 깊은 사람의 진가는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을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들 역시 깊은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쉽게 그 마음의 태도가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서 남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화롯불처럼 이웃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디에서나 무엇에든지 환경을 극복하고 환경을 초월해냅니다.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좌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쓰는 서신입니다. 1절에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했습니다. 이 한 구절만 봐도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스럽고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지요. 문자라도 한 통 보내면서 서로의 생각과 삶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한맘이네 가족들이 서로 간에 그 어떤 누구들보다도 평생에 걸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면 합니다. ‘어디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꼬.’ ‘어디에서 이런 자리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꼬.’ 이 자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자부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한맘동산의 울타리를 허는 작은 여우가 없도록 잘 살펴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가이오로 인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3,4절 말씀에서도 보면,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이오의 삶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더 기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맘교회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거짓을 거부하고 진리이신 주님을 좇아갈 때입니다. 세속의 가치를 좇아서 얼토당토않게 사는 것이 아니라 참과 도를 좇아서 진실하게 살아갈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참 평안과 자유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했습니다. 물고기가 물에 있을 때에만이 자유롭듯이 우리 인생들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악한 것들은 우리를 약하게 하지요. 사악한 것들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악한 세력들은 인생들을 사로잡아 속박시킵니다.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제까지 얽어매고 있었던 죄와 사망, 가난과 저주, 죄책감과 정죄의식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사로잡혀 있었던 새가 그 올무에서 벗어나 다시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이 우리 영혼이 새로워짐으로 하늘 천국까지 날아오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이렇게 울부짖지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다가 이렇게 탄성을 자아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요한 사도는 2절에서 그가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했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인간의 뿌리는 영혼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육체에 영혼이 있다는 것이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거하는 깊은 의식 너머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흙을 빚어 육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불어넣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에 인생들은 가장 큰 안정과 평안, 즐거움과 강건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영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입니까. 잘 알다시피 영혼이 떠나면 사람은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저 육체는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웃고, 울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영혼 때문입니다.

  이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갈망하지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42:1) 어거스틴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적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인생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보며 세상을 봐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방치한 체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꾸미지만 그러나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꾸미지를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용모와 신장은 보려고 하면서도 영혼이 스며있는 속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떠나가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렇듯이 영혼이 병들면 삶도 병이 듭니다. 영혼이 곤핍하면 삶도 곤핍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인생의 뿌리가 되는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영혼 상태에 관심을 두고 고심하며 늘 건강한 영혼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이 되는 기도와 영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뿌리 농작물을 심으려고 하니까 종묘사에서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거름을 주고, 뿌리병을 방지해주는 약을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썩어 들어서 거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몇 주 전에 양남에서 김순자 집사님 내외분이 오셨다가 배추가 노랗게 해서는 시들어가는 것을 보시더니 그럽니다. “목사님요, 배추는 호미 같은 것으로 뿌리를 건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저렇게 병이 듭니다. 풀을 뽑으려면 그냥 손으로 뽑으세요.”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나무를 해치는 질병 가운데 하나가 뿌리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에 걸린 나무는 여느 때와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일반인은 나무가 병들었는지 눈치를 채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장은 별반 다른 나무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뿌리병에 걸린 나무는 죽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병이 무서운 것입니다. 육체가 병든 것도 고통스럽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영적인 병입니다. 솔로몬을 한 번 보십시오. 처음에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겼을 때 그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탁월했고 지혜와 능력이 출중했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재물이 많아지게 되면서 점점 재물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더 많은 재물, 더 넓은 영토, 더 아름다운 왕비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거기에 마음이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말년에는 영성을 잃어버렸지요. 나라가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점점 국운이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윗 때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때 나라의 기초가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솔로몬이 조금씩 조금씩 물질주의, 세속주의와 타협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세속적인 가치관을 좇아 타협하게 된다면 영력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되고 맙니다. 혹 우리들 모습들 속에서 불안하고 염려스러우며, 깨지고 뒤틀린 것들이 있다고 여겨지면 우리의 영적인 면을 짚어봐야만 합니다. 영혼의 계기판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온전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다 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도 불안하지가 않습니다. 내 속사람이 충만해야 늘 내게서 나오는 것들은 넉넉합니다. 생각도 넉넉하고 말도 넉넉하고 품도 넉넉하게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기쁨이 넘치면 내 얼굴에서 말에서 행동에서도 늘 기쁨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미 소가 새끼에게 좋은 젖을 물리려면 어미 소 자신이 좋은 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끼에게 좋은 젖을 물려서 새끼를 토실토실하게 키워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양강 댐을 건설했을 때 3년 동안은 물을 내려 보내지 않고 채우기만 했다고 합니다. 남을 일으켜 세우려면 내가 일어나 있어야 합니다. 남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먼저 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뭔가를 주기 위해서는 내가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골 할아버지가 일이 있어서는 도시에 갔습니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젊은 처자들이 다른 식탁의 사람들에게 시중을 드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손님들이 식탁에 있는 벨을 누르니까 처자들이 그 식탁에 오고가는 것입니다. 이때 드는 생각이 , 저 벨을 누르면 처자들이 오는구나!’ 그리고는 가만히 그 벨을 떼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얼마나 신이 나서 집으로 왔는지 곧장 집에 오자마자 벨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벨을 눌려도 젊은 처자가 오지를 않았다는 것이지요. 우스갯소리로 만든 이야기이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우리들도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이 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어디에서 벨을 누르느냐가 중요하지요. 어디에서나 벨만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물이 귀해서 오염된 물만 먹고 살던 아프리카 콩고 사람이 외국 여행 중에 호텔에 묵게 되었습니다. 호텔에 있는 수도꼭지를 돌리니까 깨끗한 물이 한없이 쏟아집니다. 그러자 콩고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것을 고향에 선물로 가져가야 되겠다. 저것만 있으면 물 걱정은 없으리라

  그래서 그 수도꼭지를 겨우겨우 뜯어냈습니다. 그리고는 가방에 넣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우리 동네의 물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수도꼭지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원지와 분리된 수도꼭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어서 영혼이 잘되어 있지 않은데,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살면서 보니까 질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순서,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질서가 흐트러지고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모든 것이 혼잡해지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수가 없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흐트러지게 됩니다. 옷태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우리가 공동체 나눔의 시간에 순서가 중요하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여름, 강단 앞에 보이는 산 밑의 밭에 풀이 웃자라 있었습니다. 서울과 경주를 오가는 주인네가 손을 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애써 뿌린 농작물들이 풀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며칠에 걸쳐서 제초 작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주인네를 만나서 인사를 드리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 하니 고마운 마음에 귀퉁이 밭을 조금 내 주십니다. 그때의 기분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이게 사는 맛이지. 사는 게 별거냐.’ 싶은 것이 들뜬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인생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지요.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하다 보니 얻어지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얻은 밭에 마늘과 양파를 심었습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마늘과 양파를 먹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주고받으면서 삽니다. 서로 간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그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다 보면 받게 되는 것이지, 받기 위해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목적이어야지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양승기 집사님이 그러셨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금방 안다. 모를 것 같지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아예 안 주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은 고등학교 딸을 둔 엄마가 하는 말입니다. “, 이렇게 해 줘놔야지 나중에 받을 수 있어.” 얼마를 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작정을 하고서는 먼저 얼마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아주 치밀한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몸에 배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인생의 못된 처세술을 자랑스럽게 딸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뒤바뀐 순서에 따라 살아가야만 할 딸의 고통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체 말이지요.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실망을 하지요.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본전 생각이 많이 납니다. ‘나는 이렇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안 주느냐?’ ‘나는 이만큼이나 해 주었는데 당신은 왜 요만큼만 해 주느냐?’는 손해의식이 생겨나면서 서로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고 끊어져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교역자 시절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설문조사 때에 적어놓은 글이 언제까지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매점에서 자기가 친구에게 사 준 양과 친구가 자기에게 사 준 양을 비교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런 계산적인 모습이 자기에서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지요.

  그 소녀가 이제는 어떻게 그 삶을 살아내고 있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세월이 흘러간 어느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을 그 삶을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써가고 있지 않습니까. 준만큼 받지 못해 서운해 하고, 해준 만큼 되돌려 받지 못해 섭섭병에 걸려서는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볼 일입니다. 사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멋도 부리지 못한 체 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것들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하지요. 하나님과 자꾸 계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껏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내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러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부슬부슬 하루 종일 비가 옵니다. 겨울을 앞당기는 비 같아 보였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낙엽이 더 우수수 떨어지게 되지요. 이런 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겨울을 잘 준비해가야 합니다. 내 인생에도 겨울이 분명히 찾아들고야 말 것인데, 이 겨울나기를 잘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외롭거나 서럽거나 춥지 않도록 말이지요. 오히려 이 겨울을 더 따듯하게 날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의 늦가을에도 지난 계절에 있었던 푸르고 무성하고 물들었던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듯 우리네 삶에도 어느 날엔가 모든 것들이 다 떨어지게 됩니다. 건강이 떠나갑니다. 좋았던 명성이 떠나갑니다. 함께 했던 친구들이 떠나갑니다. 소중했던 가족이 떠나갑니다. 한때 내 삶을 꾸려내고 지탱해 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소중했었던 수많은 것들이 미련 없이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내 생명마저도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때에 우리는 알게 되지요. 오직 주님만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계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죽음을 넘어서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주님,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들고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늦가을에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서 주님만이 전부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밴드를 통해서 말씀을 묵상했듯이 그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겠지요.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1:31)

  그렇습니다. 어미가 자기 태에서 태어난 그 젖먹이를 잊을 수 없고 혹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28:20) 약속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게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1:9)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의 마지막 끝을 함께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 어디에다 뿌리를 내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풀과 같아서 마르고, 풀의 꽃과 같아서 결국에는 시들어버리고야 말 건강과 외모와 물질과 명성과 친구와 가족과 나를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계시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

  늦은 가을을 보내면서 우리가 다른 무엇들보다도, 다른 누구들보다도 주님과 더 친숙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들려주시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더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함으로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는 귀하고 복된 생애가 되어졌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14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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