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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0-28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21:12-17)한맘

 

  올해 들어서 이른 봄부터 정원에 난 풀을 몇 번씩이나 뽑아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지금 보면 잡풀들이 작게 작게 해서는 무진장 자라나고 있습니다. 잡풀이나 잡생각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모양입니다. 올 봄에 보니까 풀이 굉장히 많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올라오는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그래요. 가을에 자라난 풀들이 시들어서 잎사귀는 말라버려도 뿌리는 그대로 있다가 봄이 되니까 일제히 앞을 다투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제께는 매다가 냉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냉이가 겨울을 지나 초봄이 되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깨우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것을 알아 또 풀매기에 돌입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봄에 풀이 자라나지 않을 리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줄일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 그냥 두면 그 나중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10월 마지막 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만 개혁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설교의 제목처럼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잡초를 계속해서 뽑아내도 또 잡초가 자라나고, 먼지를 털고 또 털어내도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개혁을 한다는 것도 계속되는 과정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보 글에도 실었습니다만 살면서 보니까 사회 곳곳에 문제가 없는 곳이 없어 보입니다. 썩어문드러져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요새는 한유총 문제로 시끌법적하지 않습니까.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발 딛고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산적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추잡스럽고 사악한 인간 군상들이 그런 상황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네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해지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런 곳에서 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나’ ‘안 보고 마나.’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침묵하고 모른 체 하고 있나.’ 거짓된 것들이 관행처럼 아무런 제재장치 없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냥 모르는 것처럼 해서는 넘겨버린다는 것이 참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눈을 가졌음에도 못 본 것처럼, 귀를 가졌음에도 못 들은 것처럼 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체 한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불편한 것입니다. 맹인이 따로 없고,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지싶어서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하려고 하면 기존의 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비난과 회유와 협박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배척되고 배제당하고 매장되기 일쑤입니다. 그것까지 감수할 용기가 없으면 또 다시 입을 닫아버려야 하고 침묵하는 다수 속으로 숨어들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세계들 역시 다 그랬을 것인데, 그들은 어떻게 살아냈을지 궁금합니다.

 

  우리 한맘교회가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한 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 자라난 배경과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형성된 자기들만의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별, 계층, 지역이 다르듯이 정치색이 다르고 문화적인 색채가 다릅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신앙관까지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다름과 차이를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소통의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다르다고 해서 배제시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까지 수용해낼 수 있는 포용성을 우리가 갖추어야 하지요. 이게 교회의 건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것이나 먹어도 탈이 나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쇠까지 씹어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넓이와 깊이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듣기에 싫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목사님 앞에 있으면 밥이 안 넘어가요.” “나는 목사님과 밥을 먹으면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이 말이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을 듣게 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밥상을 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은 들어보니 대형교회 목사님들 중에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먹는다고 합니다. 혹여 아는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게 되면 식사에 방해를 받을까 싶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만 그런데 그랬으면 예수님께서는 식사하기가 대개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누구도 마다하지 않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호탕하게 당신의 삶을 날마다 축제로 열어 가셨던 분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께로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어울리셨지요. 그 생애가 얼마나 자유롭고 넉넉한지 몰라요. 걸리는 것이 없고 매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삶을 본받고 닮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예전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집회가 있어서 갔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어서 본당에서 나와 복도에 있는 기둥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오더니 비켜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나 싶어서 봤더니 검은 색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람 열 명 남짓 정도가 조용기 목사님을 에워싸고 오는 것입니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가 가는 길에 제가 있으니 비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던 삭개오였거나 열 두 해를 혈우병으로 앓은 여인네였거나 맹인 바디매오였다면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들, 저는 자들, 어린이들은 그 앞에서 얼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전하지만 예수님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인 것이지요.

  얼마 전 명성교회를 취재한 ‘800억의 비밀이라는 프로를 찾아서 봤습니다만 김삼환 목사님 가족이 가진 개인 차량이 몇 대인 줄 몰라요. 주차 진행 요원들이 그가 어느 자가용을 타고 오는지 차 번호와 함께 동선에 대해서 일일이 무전기로 체크하면서 그 길을 터주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은 늦으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좀 빨리 집에서 나오라고 하면서 자기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니까 차 문까지 탁 열어줍니다. 가방까지 들어줍니다. 얼마나 폼이 나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런 모습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회사 회장의 모습은 그럴 수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경계하셨던 교만과 재물에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보니까 좋은 시계와 번쩍이는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왜 저렇게 하고 있을까?’고 물었더니 그래야 성도들이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큰 교회 목사들은 보통 저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것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그런 모습들을 부러워하고 자기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목회의 성공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지은 적과 흑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당시 유럽의 청년들은 적이냐 흑이냐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이란 붉을 적을 말합니다. 적이란 바로 추기경이 입는 붉은 제복을 말합니다. 또 하나 은 판사가 입는 검은 법복을 말합니다.

  유럽의 청년 엘리트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추기경이 되는 것이 좋으냐 판사가 되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고민했는데, 이것을 스탕달이 적과 흑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것입니다. 왜 그들이 이것을 놓고 고민했느냐 하면 추기경이 되어도 부정축재를 통해서 돈을 벌 수 있고, 또한 법관이 되어도 권력을 휘두르며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이 둘을 놓고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젊은이들이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그 시대는 암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돈을 밝히니 시대가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시대가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믿음과 물질을 결부시켜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부흥회 같은 집회 때에는 강사가 공공연하게 그러지요. “집사는 집을 사야 돼. 그래야 집사지.” “아파트 몇 평 수 이상은 살아야지.” “그 정도의 자가용은 타야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이 이 정도는 살아야지. 안 그래요?” 그러면 아멘소리가 얼마나 크게 외쳐지는지 몰라요. “그렇게 못 살고 있으면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그래.” 학창 시절에 이런 말을 너무나 자주 들어서 정말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부자 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이셨지만 그래도 참 자유인으로 사셨던 주님처럼 자유인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가난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지만 가난의 영에서 해방된 이들은 부요와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tv에서 나오는 자연인이 그럽니다. 자기는 지금 이 자연에서의 생활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거친 세파와 싸우면서 사느라 몸과 마음이 다 병이 들었는데, 이 자연에 들어와서 회복되고 행복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자연이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곁들입니다. “자기는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이 자리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해보는 소리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에게 와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았지 않습니까. 죄짐을 다 풀어놓았습니다. 저주와 멍에를 벗어버렸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허락받았지요. 살 길이 열렸습니다. 인생과 영생에서 살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품속에 있는 우리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주님에게서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억만금이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고 보여주는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항의 어느 큰 교회가 교회당을 이전하면서 기존의 건물을 이단에 매각했습니다. 돈을 더 얹어주겠다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이단 척결에 앞장서야 할 교회가 그간의 눈물과 피땀을 서려 있을 그 건물을 선뜻 돈을 더 주겠다는 이단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돈 앞에 신앙도 양심도 다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의 모습도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성전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안 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뒷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요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명분일 뿐 실리는 자기들이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이 펼쳐내는 판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시장의 난장판과 다를 바 없게 했습니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서는 악하고 거짓된 자들이 자신들의 부당한 이득을 따로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성전이 존재하는 본래 정신을 잃어버리고 거대한 이익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까지 성전이 썩어버린 것입니다. 썩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할 성전이 같이 썩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주님께서는 이 망가져버린 성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가장 부패한 곳이 성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헤롯궁을 비롯한 모든 곳이 다 썩어문드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 성전은 그 시대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다른 곳은 다 썩어 있어도 성전만큼은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간절한 기도로 충만해야 했습니다. 정결과 순결한 영성이 눈물과 함께 넘쳐나야만 했던 곳입니다. 세상에 다른 곳은 다 썩어도 성전만은 그 거룩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야만 했던 성전이 세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세속화된 것이지요.

  그래서는 주님께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하고 말이지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디를 가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교회를 찾아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헌금통에 돈 소리가 나는 순간에 지옥에 있던 영혼이 천국을 가기 위한 연옥으로 옮겨진다고 했던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를 찾아가시지 않겠습니까. 기복주의와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큰 것과 많은 것이 옳은 것인 냥 여겨 숫자놀음에 빠져 있는 이 교회로 주님께서 채찍을 드시고서 그 발걸음을 재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정말 못하는 것이 헌금에 대한 설교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교회들에서는 장로님들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받습니다. 왜 헌금에 대한 설교를 안 하느냐는 것이지요. 재정이 있어야 교회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목회자나 교회의 성장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교회 재정이 줄어들었다면 제가 그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재정이 줄지 않았기에 그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종용하지 않으셨어요. 복음서 어디에도 헌금을 말씀하신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자발적으로 드려 섬겼지요. 은혜를 받은 이들이 기꺼이 드렸습니다. 이를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에든 강요가 없었으면 합니다. 어떤 것에든 압박하거나 겁박하거나 윽박을 질러내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자발적인 섬김, 기꺼이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 자리에서 결단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와 설교가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단이 곁들여져야 변화와 성숙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다른 몇 교회에서 보조금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만 내년에는 두 교회에서 오는 보조금을 끊을 생각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 둘씩 끊어갈 생각입니다. 집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집사람 알바 시간을 좀 더 늘여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호박잎을 내다 팔거나 묵을 내다 팔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묵밥을 맛보시고 장사를 해도 될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굳이 내다 팔지 않아도 주일날 우리가 함께 먹는 그 농작물들을 마트 가격으로 환산해보면 제가 농부로서 이중직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앞에 보이는 산 주인 아저씨 내외분이 밭을 고르고 있습니다. 가서 인사를 드리면서, 그간에 이 밭을 위해서 애쓴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더니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이, “친인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좋다.”면서 끄트머리 땅을 내주십니다. 보기에는 작아보여도 심어보면 굉장히 큰 땅입니다.

  이제는 그 땅에서 나는 것들로도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즐겨 불렀던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우리 엄마 살아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 콩도 심고 팥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련만 / 소중하고 귀중한 우리 땅은 어디에.’

 

  요새 가나안 교인들이 많습니다. ‘안 나가를 거꾸로 하면 가나안이지요. 이들이 교회에 대해서 실망을 한 것이지요.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있는데,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싫은 게 아니라 교회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당으로 마음과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장기려 박사에 대한 평전 책을 읽었습니다. 이 분을 두고 성자라 말하기도 합니다. 바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피를 뽑아서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고,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밤에 몰래 뒷문으로 내보낸 이야기를 우리가 들어서 잘 압니다. 그 책을 읽다가 보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장로님이 말년에 이르러 무교회주의로 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은 사실에 대한 부분을 서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도권 교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성경 속의 가르침을 좇아서 사는 종들의 모임이라는 모임에 갑니다.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해 오신 장기려 장로님 같으신 분들이 무교회주의 쪽으로 선회하는 그런 선택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이 뒤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게 되는 시기와 질투, 암투와 파벌과 패권, 금권 등등. 더 이상 교회가 교회일 수 없는 모습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한맘교회에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를 좇아갈 것인가. 아니면 탈피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합니까. 계속 찾아가는 과정에 있겠지요. 새로운 틀을 짜는 과정에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한맘에서 일 년 4개월 남짓 지나는 시간 동안 저의 삶의 화두는 자연인과 자유인으로 이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워질 것인가.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지지난주에 서울에서 이 근처로 이사 와서는 우리 교회당에서 몇 번씩 기도하시고, 주보를 챙겨보신 어느 중년의 여자 분께서 이런 생각을 가진 저와 이야기를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가 흙 속에 진주 같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블로그를 하나 만드세요. 의외로 이런 교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이도 서툴고 투박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여러 환경적인 요인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다듬어 가시고 빚어 가실 줄 믿고 있습니다. 털어낼 것은 털어내게 하시고, 가져갈 것은 가져가게 하시면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게 하시고 고민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가게 해 주리리라 믿습니다. 이 일을 함께 이루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동역자로 동지로 있게 하셨음을 알아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살아보니 개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삶을 개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알게 되지요. 기존의 낡은 틀을 깨고서 새판을 짠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생애와 생명까지 걸지 않으면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성전을 뒤엎어버리셨던 청년 예수, 33살의 나이에 십자가를 지셨던 그 분을 떠올려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호탕한 웃을 줄 아셨고, 세상을 향해 성난 사자처럼 호령하실 줄 아셨던 그 분의 생애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기존의 질서에 편입되지 아니하시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시면서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하시고 삶을 축제로 써내려 가셨던 주님의 생애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 내쳐진 자들을 보듬고 품어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눈물겹습니다. 살 길을 보여주시고 영원히 살 길을 열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그 사랑 속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랑을 받은 나는 혹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 눈치나 살피면서 침묵하고 있지는 않는가. 종교적인 피안의 세계에 빠져서는 현실과는 괴리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기우뚱거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주님처럼 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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