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성령이여, 하나 되게 하소서!

요엘 2:28-32; 고린도후서 5:18-19; 요한복음 17:22-23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8-10-19 15: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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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0-21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시가 흐르는 시월(5:15-21)한맘

 

  ‘오메, 단풍 들겠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시월의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들판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온 산하는 형형색색 불이 붙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입을 열서 .’만 해도 시가 되지요.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이 시월의 자연 속에서 우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지요. ‘, 너무 좋다.’ 이게 시가 되는 것입니다.

  영성 수련에 관한 이라는 책을 보는데, 서두에 나는 살면서 이런 것들을 사랑했다.’는 질문들 중에서 하나가 내가 본 것을 적게 합니다. 내가 본 것 중에서 뭐가 기억에 남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보니 두 가지입니다.

  군대에 있으면서 철책선 근처 진지 보수 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늦은 오후에 바라보았던 가을 산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군대가 너무 싫어서 제대를 하면 쳐다보기도 싫었던 강원도 산골짜기였지만 그때만은 달랐습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와봐야겠다.’

  또 한 가지도 군대에 있었을 때입니다. 늦가을 훈련을 뛸 때에 석양의 노을이 서산너머로 지면서 찬란한 왕국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겠다는 상상이 절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에서만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역시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시 와서 생각해보니 이 두 가지 장면이 다 마지막을 수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낙엽으로 떨어지기 전의 단풍과 석양의 노을이 그 어느 다른 것들보다 더 황홀하고 찬란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태우면서 온 산하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도 어느 시점이든 아름다워야겠지만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은 최절정을 이루어낼 수 있겠다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일에 살폈습니다만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은 천사의 얼굴로 밝게 빛나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스데반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 자신의 피로 물들여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9,60)

  우리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암울한 시대의 역사를 밝혀주었지 않습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고귀한 피를 이 역사 속에 뿌렸습니다. 그가 지은 십자가라는 시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시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시가 삶이었고, 삶이 시였습니다. 우리도 시가 묻어나는 삶, 삶이 묻어나는 시를 써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을 단풍이 물들어가면서 불타가듯이 우리도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 사회와 시대와 역사 속에서 강렬하고 장렬하게 물들고 불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눈물과 땀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시면서 우리를 적셔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눈물과 피와 땀으로 이 산하를 적시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낼 수 있는 최절정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빅토르 위고의 경구는 늘 경각심을 가져다줍니다. ‘죽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한 번도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로 이 역사 속에서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했습니다.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보면서 맞춰서 쓰듯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지요. 낭비하면서 허송세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향 교회에 연세가 지긋이 드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백발이 허연 이 장로님께서는 당신의 기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첫 번째로 읊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픈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학창시절에 성가대석에 앉아서는 그 말씀을 늘 들어야만 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분에게는 세월에 대한 무상함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월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겠다.’

  백발의 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후에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다음 세대에게 일러줍니다. ‘내가 울고 웃던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지나갔고, 내가 꿈을 꾸고 이야기하던 청년 시절에는 시간이 빠른 걸음처럼 지나갔다. 내가 완전히 성인이 되었을 때 시간은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지나갔고, 장년에 도달해 능력을 과시할 자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시간은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고, 흰 머리를 머리에 이고 완전한 노인이 된 그때, 시간이 전부 지나가 버린 것을 알았다. 시간은 참으로 짧다. 그러므로 이것을 존중해야 하며 가장 귀중하게 쓸 필요가 있다. 현재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은 결정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서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는 집으로 오는 길에 한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시간이 진짜 빨리 가지요.” 그랬더니 , 50이 되어봐라. 날아간다. 날아가.” 그럽니다. 이제는 제가 그 분이 말씀하셨던 50이 되었습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다지요. ‘50이 되니까 무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 이게 정말 남 말 같지가 않습니다. 제가 밤 9시쯤 해서 4-50분 정도 걷습니다. 그 걷는 코스 마지막쯤 가면 으뜸 요양병원에 불이 밝혀 있습니다. 한 번은 탁 드는 생각이 , 이제는 내가 인생의 길을 걷다가 저리로 가야 되나.’ 싶은 생각에 놀랐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한 해 한 해를 살아도 다를 바 없는 몸처럼 여겼었는데, 이제는 한 해 한 해가 다른 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좀 지나서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고 할 것이고, 또 지나서는 아침저녁으로 다르다고 하겠지요. 요새 집사람이 아이고, 아이고합니다. ‘나는 간다. 나는 간다.’는 것이지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흐르는 이 세월 앞에 선 50를 생각해 봤습니다. 50대 역시 날아갈 것이지만 오늘의 말씀처럼 세월을 허투루 살지 아니하고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몸에 좋은 것을 이것저것 챙겨서 먹듯이 삶에 좋은 것들을 가려서 잘 채워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농사꾼 박씨 아저씨로 적게나마 농작물을 심고 가꾸다 보니까 씨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지금 사택에는 내년에 뿌려질 몇 몇 가지 씨들이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보면 때도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씨와 때가 너무 중합니다. 시금치를 좀 늦게 심었는데, 잘날는지 모르겠습니다. 땅콩 심을 시기를 놓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는 심었더니 정작 거둘게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 때와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이 50에 느끼게 되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상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농작물을 적시는 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도토리를 말리다보니 가을 햇볕이 너무 소중해요. 가족들이 함께 하는 아침 식탁이 너무 소중해요. 함께 맞는 이 주일이 너무 귀합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자기는 좋은 일이 안 생긴다.’고 합니다. “왜 자기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느냐?”면서 아쉬움을 표합니다. 그래서 카톡 대문 사진에 올려놓은 캐릭터의 입이 쳐져서 그런가 싶어서 배경 사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일상이 다 좋은 거다. 사는 게 좋은 거다. 특별한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특별하다.” 그랬는데, 받아들이는 것이 신통치 않아 보입니다. 저보다 적게 살아서 그런가보다 싶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생겨야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있다고 여긴다면 일상의 모든 날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날들에 불과합니다. 늘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일상에 별다른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따분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권태기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일상이 좋고 사는 게 좋으면 모든 순간순간이 다 기쁨이요 감사요 행복이 됩니다. 범사에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기에 버릴 것이 없는 고귀한 생이 되는 것입니다.

  암으로 투병 중인 한 여교수의 칼럼이 있습니다. 그는 사경 속에서 고열과 통증을 견디며 문득 만약 이게 마지막이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랬을 때 새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찬란하게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병원 창문으로 보이는 한 조각의 하늘이 눈부시고, 화분에 핀 풀꽃 하나가 애틋하고, 삶 자체가 축복이며, 하루하루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회한이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좋은 세상에서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진짜 한 번 잘살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겨 썼던 표현을 써보자면 오늘 이 하루는 어제 죽었던 자들이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던 내일입니다.’

 

  일본에 100세 할머니 시바타 도요라는 분이 계십니다. 발음이 좀 거시기 합니다만 이 할머니께서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그 제목으로 쓴 시입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 햇살과 산들 바람은 / 한쪽 편만 들지 않아.’라는 예쁜 시를 적어주고 있습니다.

  ‘살아갈 힘이라는 제목에는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 하루하루 /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 전화 / 집까지 찾아와 주는 사람 / 제각각 모두 / 나에게 살아갈 힘을 / 선물한다네.’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 같고, 죽지 않아서 숨만 쉬고 있을 것 같고, 아니 숨도 제대로 쉬기가 버거워야 할 것 같은 그 100세의 나이에 아름다운 시를 적어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기쁨과 감사와 행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일상을 글로 적어 아름다운 시로 꽃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일상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로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 가난과 저주의 권세, 멍에와 사슬의 권세를 깨뜨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7절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 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프로에 한 번 보니까 산에서 나는 좋은 것들을 자식에게 먹이고 싶어서 때마다 나는 좋은 것들을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 방송은 잘 안 보고 나는 자연인이다프로는 잘 봅니다.

  저희 가정에도 보면 운동하는 아이들인지나 고기를 먹일 때가 많은데, 고기 값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모로서 먹는 시늉을 하면서 한두 점 먹는 것을 빼고는 전부 아이들이 먹게끔 합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지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저희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일을 위해 설교 준비를 하거나 점심 메뉴를 정하고는 준비를 하면서 우리 성도들에게 어떻게든 몸에 좋은 것을 대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맛은 장담할 수 없지만 정성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잘 드시고 잘 살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이지요. 여러분들도 저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가 없지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주면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짙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셨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이렇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지요.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천국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면서 우리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금 결단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숨어들거나 피해버리지 말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얽매이거나 사로잡히지 말자.’ ‘부끄러운 과거에 빠져 있지 말자.’ ‘아픈 상처에 붙들려 있지 말자.’ ‘죄책감에 젖어들지 말자.’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지 말자.’

  예수님은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셨습니다. 어떤 규율이나 교리나 이념이나 사상이 예수님을 얽매지 못했습니다. 오직 참된 것을 말씀하시며 참된 삶으로 우리 인생들의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거하시면서 우리들로 공중의 나는 새를 보게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게 하셨습니다. 시인이셨던 주님께서는 우리로 시인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전성갑 집사님께서 여정이라는 제목의 귀한 시를 주보에 게재해 주셨습니다. 그 시의 크기만큼이나 집사님의 용기와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맘이네 가족들이 시나 수필을 실어갔으면 합니다. 서로 앞을 다투어 내는지라 줄을 설 수 있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줄을 서시오최현주 집사님의 멘트지요.

  서로 자기가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통에 최집사님이 줄을 서시오그랬습니다. 내고 싶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줄을 서서 기다려서 순서가 되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주보에 실을 글들도 어허, 줄을 서시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글들을 묶어서 작품집을 내면서 우리의 삶도 잘 묶어져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번은 글도 전혀 모르는 농촌 할머니들이 글을 하나씩 깨우치면서 시를 써서 발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데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응어리졌던 한들이 시를 적어가면서 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100세 할머니 시바타 도요씨가 비밀이라는 제목을 시를 이렇게 적어가고 있습니다. ‘, 죽고 싶다고 / 생각한 적이 / 몇 번이나 있었어 /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 지금은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아 / 아흔여덟에도 / 사랑은 하는 거야 / 꿈도 많아 / 구름도 타보고 싶은 걸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그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는 노래를 틉니다. 열에 일곱 여덟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유행가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 목회자 가정에 찬송가가 나와야 되지 유행가가 뭐냐?” 그랬더니 성결이가 하는 말이 아빠, 아빠는 목사님이면서 입에서 어떻게 욕이 그렇게 잘 나오냐?” 그럽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할 말은 없습니다. 저와 우리 가정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 거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에 취해서 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육신의 쾌락과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에 취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달짝지근해 보여도 그 삶이라는 것은 방탕함으로 갈지()가 인생이요 결국은 허무요 멸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갈 때에 우리의 생은 어떻게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모습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모습으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모습으로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 수 없는 삶을 우리 신앙인들은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태도, 그리고 시간과 물질과 같은 모든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 분은 성령이 충만해’ ‘저 분은 은혜와 믿음이 충만하신 분이야.’라는 것은 그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흘러나고 있는가?’ ‘범사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면서 사는가?’ ‘기꺼이 자발적인 복종으로 섬겨가고 있는가?’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시월은 시를 부르고 노래가 찾아들게 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눈부신 가을 하늘과 불타는 가을 산하는 우리로 시와 노래가 넘쳐나게 합니다. 이 가을이 맑고 청명한 것처럼 우리네 심령도 깨끗함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불타는 가을처럼 우리네 심령도 성령으로 불타올랐으면 합니다.

  제 나이 50에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무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요양병원 불빛이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쓰라림과 허무함으로 인생무상과 일장춘몽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무덤이 아니라 천국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스데반 집사는 그 순교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지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아멘.

  이 가을에 어떻게 살다 갈 것인지를 묵상하고 성찰하게 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다윗은 어떻게 시를 짓고 찬양을 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너무나 좋은 시를 그가 지으므로 이 시를 통해서 수 천 년을 이어서 받는 충만한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우리도 다윗처럼 시편 23편의 아름다운 신앙시를 짓는 시인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 시의 운율에 맞춰서 수금을 켜듯 춤과 노래가 넘쳐났으면 합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시는 주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능히 동행해 주심으로 건너가게 하실 것이니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한맘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14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13 잘 사는 삶
12 평화와 번영의 길
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0 먹든지 마시든지
9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8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7 어떤 하루
6 고넬료 그 사람
5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4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3 나 때문에(고난주일)
2 기름 값 ― 2018.3.13 목사 은퇴/임직예식 설교
1 한울교회 여신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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