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

이사야 61:1-3; 로마서 8:24, 31-35; 마태복음 5:9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OF THE WORLD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8-08-25 15: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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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8-26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이 사람도(19:1-10)

 

 

  저희 집에서 제가 제일 키가 큽니다. 셋이서 누가 크냐?’고 제게 물을 때면 같잖아서 웃습니다. 집사람이 아이들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쉽니다. “저것들, 장가나 가겠나?” “여자들이 쟤들을 쳐다나 보겠나?” 그러면 제가 한 마디 하지요. “그런 부정적인 소리 하지 마라. 당신은 왜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했느냐.”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작았습니다. 앞 번호와 앞자리는 항상 저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할 때면 제가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한 후임병은 186cm 정도가 되는데, 저를 놀리려고 천천히 가다가는 갑자기 잽싸게 갑니다. 그러면 제가 그 걸음을 따라 잡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 후임병이 한 번은 자기 손 뼘으로 제 다리를 재면서 놀립니다. 자기 손으로 두 뼘 반입니다. “, 참 다리가 짧아도 참 짧습니다.” 그 후임병은 혀가 약간 짧습니다.

  신교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6주 훈련을 마치고 있을 퇴소식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키가 큰 순서대로 앞에서 세웁니다. 그러니 저는 제일 뒷자리입니다. 그 큰 연병장에서 조교가 기준을 세워놓고서는 기준, 양팔 간격 앞으로 나란히그러면 저는 무거운 총을 들고서는 연병장 끝까지 뛰어가야 합니다. 갔다 싶으면 또 그럽니다. “동작 봐라. 기준, 짧은 간격 앞으로 나란히.” 이만저만 제 키를 한탄했는지 모릅니다.

  총각 때 아주 키가 큰 여자와 선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저를 처음 볼 때부터 얼마나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요. 한다는 말이 저희 어머니는 키 작은 남자를 싫어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키 큰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김철미 씨에게서 삐삐가 왔습니다. 어떻게 키가 큰 여자와 한 번 잘해보려고 하는데 삐삐가 온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지요. “왜 그때 삐삐를 쳐가지고 말이지.”

 

 

  제가 키가 작다는 이유로 자라면서 수모를 참 많이 당했습니다. 누구나 저를 만만하게 봅니다. 양남에서도 저를 보고 최현주 집사님을 비롯해서 몇몇 분들이 엄지척을 해 주셨지요. ‘멋져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짧고 굵어요.’입니다. 제가 굳이 살을 빼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인물이 나폴레옹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속담도 있었습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 저에게 힘을 주었던 말씀이 아니라 힘들게 했던 성경 말씀은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악바리 근성이 생겨난 것이 작은 키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승부욕도 의외로 강합니다. 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당장은 져도 끝내는 이긴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강한 복수심 같은 것도 그래서 길러지지 않았을까. ‘두고 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

  초등학생이었을 때에 학교 근처에서 어떤 형에게 맞은 적이 있습니다. ‘각기라고 하는 형의 동생입니다. 저보다 두 살 위였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옆에 서 있다가 한 대를 얻어맞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괘씸한지요. 그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이 새끼, 너 나중에 나 힘 생기면 그때 한 번 두고 보자.” 아직까지 그 놈을 그 후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독기를 품었던 그 마음은 여전히 지금까지 기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키가 작았던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지 참 궁금합니다. 저는 한때 169cm되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키가 작은 남자로서 키 큰 여자를 만나 보상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결혼할 여자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그 기도대로 이루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으셨네요.

  본문에 굳이 키가 작다는 구절까지 있는 것을 보아 삭개오도 무지 작았나 봅니다. 길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자 해도 못 볼 정도의 키였습니다. 그랬으니 이 삭개오가 살아왔을 삶을 어느 정도는 짐작해 볼 만 합니다. 저도 여러 수모를 받았을 정도이니 삭개오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요.

  그런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얕잡아보고,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다 주었을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울분을 토하다가 나아가서는 세상을 향한 복수심 같은 것으로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자기를 깔보았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다보는 세상을 뒤엎어버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보복 심리가 있습니다. 복수심이 강하게 발동을 하지요. 며칠 전에 잠을 자는데 몇 번을 깼는지 모릅니다. 열대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몸이 근질근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모기장을 쳐놓고 잠을 잡니다만 그래서 드는 생각이 이불에서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따로 거실에 나와서는 다른 이불을 깔고 누웠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좀 있다 보니까 방에서 불이 켜지더니 , 따딱, 다다딱소리가 납니다. 전기를 충전해서는 해충을 잡는 모기 퇴치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집사람이 일어나서는 모기장에 들어온 몇 마리의 모기들을 잡고 있는 겁니다. 부주의로 인해 열어놓은 방충망 사이로 산모기가 들어와서는 뚫린 모기장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는 잠을 이룰 수 없도록 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밤에 , 소리가 들리는데, 얼마나 듣기가 좋은지요. 그 소리로 인한 쾌감은 아주 최고조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들어가서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습니다. 그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 우리 인간들에게는 보복 심리가 있구나!’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들에게 되갚아주고자 하는 심리가 있구나!’

  어릴 때에도 보면 여름 아침에 일어나서는 모기장에 갇힌 모기를 잡을 때에 터지는 피를 보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내 피 빨아먹고 어디 멀리 갈 줄 알았느냐.’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은 보복 심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집사람이 지금까지 저에게 했던 가장 무서운 말들 중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랬지. 그래, 나중에 늙어서 보자.” 그 말이 무서워서 제가 요새는 얼마나 잘해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과연 삭개오는 어떠했을까.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세리장에다가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삭개오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아 왔을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악착을 넘어서 악랄하기까지 하지 않았을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세리는 몸을 파는 여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창녀와 동급이었습니다. 세리와 개가 물에 빠져서 떠내려갈 때에 누구를 먼저 건져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세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리가 물에 빠져 있으면 그 물이 오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리는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었지요. 본문 7절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립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는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라 했습니다. 세리들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장의 자리를 맡았을 정도이니 그가 보여주었을 삶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살아냈던 삶은 아주 지독스러웠을 것입니다. 악착과 악랄한 방법이 다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면서 로마 제국은 아주 마음에 들어 했겠지요. 그래서 더 높은 자리를 맡겨줍니다. 그러면서 재산은 증식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동족들은 모두들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갖은 고통 속에서 가난했을 것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삭개오는 부자였던 것이지요.

 

 

  그럼 여기에서 여러분, 많은 이들이 가난을 경험해야만 했을 그 당시에 삭개오가 굳이 동족들의 비난을 받는 세리가 되고 세리장까지 맡으면서 부자가 되었던 것은 어린 날에 받았을 아픔과 상처에 대한 보상심리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외관상으로 보여지듯이 키가 작고 왜소한 아이였을 것이니 이리저리 치이면서 쳐 박혔을 그 어린 날을 어떻게든 보상 받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 있지 않았을까요.

  어떻게든 자기를 짓눌렀던 이들을 자기도 언젠가는 짓이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밀쳤던 이들을 자기도 언젠가 때가 되면 밀쳐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구석에 쳐 박혀져서는 자기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줄 날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자기 호주머니 속에 있던 쌈지돈을 빼앗아갔던 놈들에게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줄 것이라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었겠지요.

  그래서 택한 직업이 세리였겠지요. 지배 계급이었던 로마를 등에 업고 세리직을 감당하게 되면 자기가 부자가 되고 출세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입니다. 매국노요, 친일파요, 일본 놈들보다 더 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동족의 피를 팔아먹는 흡혈귀라는 모진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남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세리만이 아니라 세리보다 더한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주님 앞에서 결단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의 소유 중에서 절반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재산이 사실 가난한 자들에게서 갈취하고 착복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어릴 때에 가졌던 기억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에 형성된 성격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에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보에도 실었습니다만 우리 부모 세대들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열린 시각을 가지고 소통을 해가야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에 도넛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 도넛을 먹는 날에는 세상을 다 얻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외사촌 형님이 도넛 공장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꼭 한 봉지씩 저희 집에 가져다줍니다. 어린 날 그 도넛을 먹으면서 나중에 절대로 어른이 되어서라도 이 맛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오직 도넛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저희 외사촌 형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장에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그 형이 한다는 말입니다. “, 거기에서는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도넛을 배터지도록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도넛을 볼 때면 어릴 때 가졌던 생각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어린 날에 가졌던 생각 중의 하나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릴 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해보겠다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어른은 과자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과자를 어른이 되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에게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 세리의 장이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었을 그 자리까지 다 올랐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여기에서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도넛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자기가 이루고 싶었던 것을 이루고, 하고 싶었던 것을 원 없이 했을 것이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철저하게 보복도 했을 것이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했던 세상 사람들의 눈물도 피도 뽑아내면서 세상을 향한 분노도 쏟아냈을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나마 어린 날의 상처도 보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졌느냐는 것이지요. 인생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영혼의 문제가 제기되지요.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이루었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조차도 그가 인간이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과 허전함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졌지만 혼자라는 외로움은 여전했습니다. 허전함은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밀려나고 밀쳐진 느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습니다. 영혼의 빈 공백에 있는 깊은 웅덩이에는 물이 하나도 없어서 메마름과 황폐함, 피폐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 된 줄 알았고, 다 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것들로 어린 날에 받았던 아픔과 상처들이 씻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지요.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는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뭘 이루겠다는 것인가?’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자라면서 받았을 아픔과 상처를 무엇으로 보상받고자 하는가?’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 자녀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통해서라도 자기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요. 나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키는 비록 작았지만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라난 환경이 비록 어렵고 힘들었지만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똑똑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근성이 있고, 악바리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날 비웃고 업신여겼던 그 세상 사람들에게, 날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에게, 날 무시하고 무관심했었던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봤나?” “봤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봤겠지.” 그래서는 자기를 아무렇게나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여리고 마을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경주시 충효 2길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 역시 또 다른 한 명의 삭개오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 나를 높이면서 나를 보여주고 드러내고자 했다면 저는 지금 굉장히 외롭고 서럽고 허전할 것입니다.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집사람에게 그랬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 삭개오가 바로 나더라.” 그랬더니 아니다. 당신은 키 작은 것만 삭개오를 닮았지 부자는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래, 나는 삭개오가 아니라 박정철일 뿐이구나!!!’

 

 

  사건이 전개되면서 삭개오에게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그랬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자기와는 다르게 가진 게 하나도 없으면서도 다 가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평온하게 여유롭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자기를 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 모두들 실실 피해가기 바쁜데, 저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고 있는지. 자기와는 달리 어떻게 저는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지, 병든 자를 고칠 능력이 있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의 아들이라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 했다지. 그러면 그가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지지리도 못난 나도 그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가 내 아픔을 만져줄 수 있을까. 내 어린 날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내 상처를 싸매줄 수 있을까. 쉬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이 외로움과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을까. 나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 있는 모습 이대로 날 사랑하고 받아줄 수 있을까. 그래서는 작은 키로서는 볼 수 없었던 주님을 보기 위해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돌무화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 궁상맞지요. 어른이었던, 사회적 체면이 그나마 있었던 그에게 있어서 그 자리는 참 궁상맞은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리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어릴 때부터 숨어 있기에 익숙했던 것처럼 자기를 숨기기에 좋았을 최적의 자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외적인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했던 자리일 수도 있겠구요.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그때였습니다. 그 많은 인파들 속에 파묻혀 있으셨던 예수님께서 돌무화과나무 잎사귀에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삭개오만 주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도 삭개오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까지 다 헤아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는 삭개오가 있는 자리까지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지나쳐 가시지 않으셨지요.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그의 외적인 조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키가 작은 것도 보지 않으셨지요. 어른이 어떻게 그 나무 위에 있는지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세리장이라는 사실도, 그가 부자라는 것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불쌍한 한 영혼, 그 또한 잃어버린 한 영혼으로서 당신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자 하는 이들을 보십니다. 당신을 만나고자 하시는 이를 만나주십니다. 그 애절한 마음을 가진 그 어떤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시지요. 잘못 살아온 삶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다시 살아가야 할지를 두고 몸부림치는 이들을 그냥 모른 체하시고 지나쳐가시지 않으십니다. 그가 있는 돌무화과나무 자리까지 친히 찾아와 주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를 만나주시며 그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그의 의미가 되어주시지요. 목적이 되어주시지요. 기쁨과 만족이 되어 주십니다. 어린 날 받았던 그 쓰린 상처와 아픔들, 분노하고 복수심으로 일그러졌었던 그 심령과 삶을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그랬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졌던 그 어떤 즐거움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차원의 즐거움이 그에게 용솟음쳐 올랐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전까지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을 다 내어버립니다. 그는 이전까지 자기가 얼마나 육체를 신뢰하는 자였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 ‘베냐민 지파라는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 ‘바리새인이라는 것’ ‘율법의 의를 보아 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외적인 육체를 신뢰하는 자였습니다. 신분을 자랑했지요. 문벌을 자랑했지요. 자기 열심이 있는 것을 자랑하는 자였습니다. 그것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자신의 삶을 이어온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3:7-9a)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면서 삶도 바뀐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니 삶의 내용도 달라지지요. ‘내 안에 사는 이 / 예수 그리스도니 /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 그는 나의 왕 / 내 노래 / 내 생명 / 또 내 기쁨 / 나의 힘 / 나의 검 / 내 평화 / 나의 주 / 내 안에 사는 이 / 예수 그리스도니 /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삭개오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삭개오를 알던 이들은 저가 삭개오가 정말 맞나?’ 싶었을 것입니다.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했습니다.

  삶의 위대한 결단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위대한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이전에는 돈 한 푼에 이를 악물던 그에게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멘.

  삭개오는 잃어버렸던 자였습니다. 악한 영의 속임수와 궤계에 빠져 유리방황하는 자였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외적인 것이 전부인 줄 알아 살았기에 그의 내면은 혼란과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삶의 목적이 잘못되었기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지요. 신분과 물질을 그렇게 많이 가졌음에도 외로움과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어서 고통의 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지요.

  그런 삭개오를 주님께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자를 찾아주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이지요. ‘이 사람도그랬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도, 오늘 우리도 바로 그 한 사람이지요.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표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으로 삶의 위대한 결단들을 순간순간 내리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34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33 지어져가야 할 성전
32 살다 사랑하다
31 하나님의 모성애
30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29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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