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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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철 2018-07-07 1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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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7-08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고후 12:7-10)

 

  여러분들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서 차를 타고 오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지금 한맘으로 가고 있는 거지.’ ‘커피에 무슨 약을 섞은 것은 아닐까?’ 쪼그려 앉아서는 뽑았던 자리에 또 다시 난 풀을 뽑으면서 가져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 이 자리에서 있는 거지.’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제 자신도 제가 이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구석구석에 몇 년 동안 켜켜이 묵혀 있던 묵은 짐들을 치우면서요. ‘내가 왜 이것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내 짐도 그냥 묵혀두면 안 될까.’

  작은 텃밭을 가꾸고 돌보는 것이지만 여러분들의 이야기처럼 “목사님, 저러다가 농부 되는 것 아니야?” 예전에는 길을 가다 보면 교회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길을 가면서 꽃과 나무, 농작물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저 꽃 좀 갖다 심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저 나무를 조경했을까.’ ‘난 언제쯤이면 저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내년에 맛보게 될 감자는 올해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잘 지어져 있을 것입니다. ‘농사꾼 박씨’가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전에 팔리는 참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길 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옮겨지지 않을 것인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로 이곳까지 옮겨놓으신 것일까. 다른 자리는 없었던 것일까. 꼭 이 자리여야 했을까. 누군가는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나 말고 다른 이였어도 되지 않았을까.

  비 오는 날에 잔디를 깎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이곳에서 매실을 따서 담그게 하시고, 호박과 오이를 심어 가꾸어가게 하시고, 왜 미꾸라지와 미나리를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는 것일까. 왜 오지랖도 넓게 사택 주위에 나는 풀들까지 나서서 제초작업을 하게 하시는 것일까. 이곳에 오면서 제가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많아졌습니다만 이렇게 질문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잔뿌리를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중이어서 그러나 봅니다.

 

  저희 가족이 이곳에 온 지 1년이 다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 있었어도 흘러갔을 그 일 년이 오늘 이 자리에서도 흘러갔습니다. 이전 자료가 하나도 없어서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서 오늘 주일을 ‘한맘교회 기념 주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로 이 자리에서 그 1년을 맞이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작년에 첫 주일 예배 설교 제목으로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으로 잡았습니다.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잘 갖추어지지 않아서 부족한 것들이 많습니다. 열악하고 척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희로 죽도록 고생시키기 위해서 이곳에 보내셨을까요. 모기와 개미에 뜯겨가며 풀을 매고 나무를 정리하라고 이곳에 있게 하시는 것일까요.

  모세로 미워서 40세에 애굽의 궁궐을 떠나 광야로 가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죽으라고 광야로 들이셨을까요. 아니지요. 그렇게 행하셨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으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행하신 이유는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꼭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됨을 알지어다.’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이지만 그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인 당신으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모진 광야로 내 모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산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로 오늘 이 자리에서도 살게 하고 영원히 살게 한다.”는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깊이 있게 깨달아지게 될 때에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이전에는 그저 ‘도와주시옵소서’였다면 이제는 ‘도와주시고 계심을 알아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낮춰질 때가 있습니다. 낮아질 때가 있어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바울에게도 낮아질 때가 있었지요. 약점이 있었습니다. 약한 부위가 있었습니다. 몸에 질병을 안고 있었지요. 우리가 종종 하는 말에 ‘뭐라 그래도 건강이 최고다.’ 그래요. ‘다른 것보다 건강이 우선이다.’ ‘건강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필요 없다.’ 그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건강하지 못했지요. 이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것을 두고 ‘육체에 가시’라 불렀습니다. 솜털 같은 가시라도 찔리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요. 그 가시를 두고 바울은 ‘사탄의 사자’라 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으셨을 주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니, 주님 제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제게 주실 수 있는 최선입니까?” “이제 다른 이들에게 주님께 기도하라고 말도 끄집어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그랬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를 그냥 있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냈습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자랑한다고까지 했습니다.

  정말 누가 들으면 말 같지도 않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적게 했으니 그런 것 아니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습니다. 능력이 없으니 그렇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불공평한 분이라 자기를 차별해서 그렇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숨겨 놓은 은밀한 죄 때문이라고 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예전에 늦게 신학원을 다녀서 목사 된 분이 그래요. 자기 가정이 사업을 하다가 크게 망했었는데, 자기네가 그렇게 망한 이유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 죄로 인해서 자기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목회자는 ‘죄와 벌’이라고 하는 구조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가름합니다.

  누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로 인해서 자기를 찾아오면 그래요. “하나님께 숨겨 놓은 죄가 있어서 그러니 회개합시다.” 그래도 원활하게 일이 풀려지지 않으면 한 술 더 뜹니다. “아직까지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 그러니 더 기도해야 합니다.” 매번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인데, 매번 죄만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사업에서 실패할 수 있어요. 잘못하지 않았어도 가난할 수 있어요. 모세처럼 광야로 도망을 쳐야 할 때도 있고, 요셉처럼 종살이와 옥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바울처럼 원치 않는 질병에 신음할 수도 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로 인해서도 자기 자신이 고통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지나간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약점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두고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때로는 바울에게 주셨던 그 말씀을 주실 때가 있으신 것이지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육체의 가시 같은 것들, 사탄의 사자 같은 것들로 그냥 있게 하시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부족해서요. 지은 죄가 있어서요. 사람이 못나서요.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셔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 육체의 가시를 두고 고통스러워할 때에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울부짖었을 그 기도 소리에 주님의 마음은 타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찢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바울에게서 그 가시를 제거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로 자만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지요. 자만함으로 교만해져서 패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성결이가 무릎 슬개골이 절단되고 나서 핸드폰 배경 문구가 바뀌었습니다. ‘겸손’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부모로서 그 글귀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쓰라리지요. 그 글귀가 적혀지기까지 겪었어야 했을 아픔의 크기가 느껴지지요. 자기가 꺾여야 했을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일 년 전에 하나님께서 저로 많이 낮추신 것 같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게 하시면서 저로 바짝 엎드려지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보다 잘난 체를 많이 합니다. 내 자랑에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좀 한다.’ ‘좀 된다’ 싶으면 아주 기고만장합니다.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내가 목회를 제일 잘하는 것처럼 우쭐거리고 인생을 제일 잘 사는 것처럼 으스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이고, 거만은 넘어짐의 지름길이요 앞잡이가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을 너무나 자주 놓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악한 마귀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고, 에덴동산에 찾아와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면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그 유혹에서 제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교만해져서 패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낮추어 오셨습니다. 높아지지 못하도록 낮아지도록 손을 써 주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오늘 이 나마의 저의 모습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여, 있어서 교만할 것 같으면 가져가시옵소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시고 싶어도 주시지 못하시는 것들이 참으로 많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원하시지 당신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높여주시기를 원하시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지요. 그 가시로 인해서 아프고 고통스럽지요. 그렇지만 다시 보면 그 육체의 가시가 나를 붙잡아주는 것이지요. 그것이 나의 나 됨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낮아져보니까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척추병, 폐병, 직장암 등으로 고통을 겪었던 ‘미우라 아야꼬’의 말대로 병들지 않고는 드릴 수 없는 기도가 있고, 들을 수 없는 말씀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마치 제가 부평초 같지나 않았나 싶습니다. 지면에 뿌리를 박아 내리지 못하고서는 물 위에 떠 있는 듯 했습니다. 산다고 살았지만 내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을 힘써서 살지 않았나 싶어요. 남들의 시선과 눈치에 빨랐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거기에 맞춰서 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새벽에 기도하기 위해서 나갈 때에도 제일 빨리 나가고 제일 늦게 들어오면서 ‘기도하는 목사’로 보여지고자 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10년에 걸쳐서 한 번도 새벽 예배를 빠지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남들에게 보여지고자 했습니다. 삶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니 조미료를 많이 뿌린 것처럼 삶에 맛이 닝닝하고 밋밋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와서는 그나마 많이 달라졌습니다. 좀 서툴고 투박해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제가 여기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아가는 것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저처럼 살아가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신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면서 꾸미지 않고 인생과 신앙에서의 동지애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주보에 ‘한맘이네 이야기’에도 실었습니다만 목사로서 제가 여러분을 교인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요 신앙의 동지로서 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에 알게 하십니다. 교회당을 불리고 교회생활을 잘하게 하는 교인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역군으로서 세워 가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한맘을 살리라고 저를 보내신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면서 보니까 저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곳에 보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에 잔디를 깎고 있으니 옆집 목사님이 살이 빠진 저를 보더니 “야, 목사님. 운동선수 같습니다.” 그때 “이 교회에서 제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듣고자 합니다. 9-10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아멘.

  우리 아이들이 몇 달 전에 병원에서 160cm 정도로 해서 성장판이 닫혔다 합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울고불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초이 집사님이 그래요. “야, 오히려 잘 되었네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열악하고 척박해 보이는 이 한맘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 보일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가시나무에 깃들고 맺힐 은혜의 꽃과 열매를 기대합니다.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27 다 이루신 예수님 +2
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13 잘 사는 삶
12 평화와 번영의 길
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0 먹든지 마시든지
9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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