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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삶

2018.06.30 11:40

박정철 조회 수:9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7-01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잘 사는 삶(8:27-38)

 

  지난주간에 해바라기와 땅콩을 심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그랬습니다. “여보, 책 두 권 사라. 텃밭 가꾸기와 잡초 레시피.” 제가 텃밭을 가꾸고 돌보다 보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더 다양한 것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데 능력이 딸립니다. 그래서 책을 주문하라고 했습니다. 영농일기를 써야 되나 싶기도 합니다.

  작년에 와서는 이것저것 뽑아내기도 많이 했습니다. 작년에 어떤 분이 오더니 이것 방풍이네. 이거 사람에게 좋다.”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저는 그 더운 날에 뽑아내느라 고생 또 고생 했습니다. 종묘사에 가서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좀 질기다 싶으면 삶아서 계속해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솔솔찮습니다.

  저녁으로 텃밭에 물을 줍니다. 감자를 심어놓고는 물을 계속해서 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싹이 무성하게 잘 자랍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보니까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자세히 봤더니 그 싹은 감자 싹이 아니라 감자 싹과 닮은 풀이었습니다. 그 놈이 진짜 감자 싹보다 훨씬 더 잘 자라 있었습니다. 이것도 일이라고 한다고 해 보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앞으로 배워갈 것도 참 많습니다.

 

  인생도 그렇겠지요.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모르는 것이 많고 알아가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오늘이 7월의 첫 주일입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났지요. 어떻게들 잘 사셨겠지요. 이럴 때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잘 살아왔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될려나?’ ‘이렇게 살아가도 후회가 되지 않을까?’ ‘또 다른 삶은 없었으려나?’

  제 나이가 올해 50입니다. 백세 인생에서 보면 이제 반 살았습니다. 120세 인생에서 보면 더 남았습니다. 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의 묘비명에는 물론 농담이겠습니다만 먹다 죽다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담으로 내 묘비명에는 어떤 글귀가 적힐 수 있을까?’ 두 번째 설문조사를 하게 될 때에 한 번 적어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적고 싶으십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을 잘 사는 삶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잘 살고 싶지요. 못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잘 사는 삶일까?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 때에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남에 있었을 때에 가끔씩 가족끼리 큰 교회당에서 예배드리는 기독교 방송을 시청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그래요. “아빠는 저런데 못 가나?” 그러면 한 녀석이 아빠는 능력이 없어서 저런 데 못 간다.” “, 아빠가 능력이 있어서 저런 교회에 가면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아빠 때문에 이렇게밖에 못 산다.” 제가 열 받아서 그러지요. “, 교회당이 크다고 큰 교회냐? 그래서 너희는 실력이 없어서 프로팀에 소속된 유소년 팀에 못 들어가느냐?”

  보통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크고 많은 것을 최고로 칩니다. 높아진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저도 양남에서 500명 출석 교인을 슬로건으로 내 건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한 목회자라는 말을 좀 들어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나는 만 명이 되는 교회를 담임하고 싶다.”고 하면서 포부를 밝혔더니 , 여태까지 나온 사람들 다 합쳐서 만 명이라는 거지.” 우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립니다. 어떨 때는 제가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 제목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사석에서 어느 다른 교회 장로님께서 저를 보고 그럽니다. “, 우리 교회에 박 목사님 같은 분이 오셔야 교회가 부흥할 것 같은데, 혹 오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그때 제가 그 교회에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교회당 강단 옆에다가 붉고 선명한 글씨로 현수막을 늘어뜨려 놓았겠지요. ‘전도!! 전도!! 만 명 교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그렇게 적어놓고는 목소리 크다는 것 하나 가지고서 새벽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교인들을 닦달했겠지요. 그랬으면 저나 교인들이나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교회 성장이라는 우상의 포로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고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죽는지도 모르고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혹 그래 가지고서 교회가 비대해졌을지는 몰라도 저는 비실비실 배상룡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자기도 그 자리에 있을 때에는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잘 모릅니다. 여태까지 해 오던 방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지요. 그게 맞는 줄 압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하는 목사님께 한 교인이 그랬다고 하지요. “왜 목사님은 목사님의 개인적인 영광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인들을 희생시키시는 것입니까?”

  교회 성장에 지나치게 집중하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교인들 앞에서는 기도하는 목사’ ‘능력이 많은 목사로 보여졌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에게 그럽니다. “, 한약 좀 지어 먹어야 되겠다. 요새 힘이 너무 달린다.” 그러는 것입니다. 속으로 제가 아니 능력이 많으신 목사님이 본인이 평상시에 늘 그렇게 이야기했던 대로 기도를 해서 힘을 길러야지 무슨 한약을 먹는다고 그러냐?’ 아닌 삶을 살아가게 되면 아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요새 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전의 생각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해 주시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생각나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로 숫자에 매이지 않게 하시고 성장주의라는 우상의 포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분, 저는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뭐가 성공이냐?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을 떨쳐내는 것이어야 성공이라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럽니다. “아빠, 저 성공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게 되면 한 편으로 대견스럽기도 또 다른 한 편으로 두렵기도 합니다. 저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성공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신병 교육대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목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늘 생각이 납니다. 이등병 작대기 하나도 달지 못한 체 힘들어하고 고달픈 교육생 신분으로 있었을 때에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언제 행복하냐? 사람이 언제 감사할 수 있느냐?” “교육생들은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면 행복하고 감사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면 소대장이나 중대장이어야 행복하고 감사할 것이라 말한다. 만약 계급이 행복과 감사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대대장이나 연대장 사단장이 제일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행복과 감사는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 말씀으로 인해서 제가 참 많은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계급의 차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신분의 차이를 능히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잣대가 180도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행복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잘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34절의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것이 우리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삶이요 최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마을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각자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말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서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요. 이번에 뉴스엔조이라고 하는 기독교 사이트에서 보니까 경기도 지사에 당선된 이재명씨가 자기는 예수님을 혁명가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민중들을 규합해서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을 예수님께서 뒤엎으려고 했었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낭만가’ ‘몽상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4대 성인 중의 한 명이라고도 하지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생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제각각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게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아주 크게 칭찬해 주셨지요. 이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고백 위에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그 놀라운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서 뭐라고 합니까? ‘개독교라고 합니다. 정말 통탄할 만한 말이 아닐 수 없지요. 곱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랄하고 날카롭습니다. 목사를 가리켜서 먹사로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적폐 세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교회를 보는 그들의 눈이 비뚤어서가 아니라 이 교회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고 하는 목회자가 자기 배만 불리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자기들 영광만 쫓아서 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할 교회의 모습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서 알게 되었을 때에도 자기 영광과 자기 실속 차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세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경북 도지사나 울산이나 대구 시장 정도는 공천을 받아서 당선이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베드로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지요.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던 야고보나 요한 형제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실 때에 그들을 예수님 좌우편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서로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이 크다면서 다툼과 갈등을 빚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다음의 말씀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버린 바 되어져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게 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항변을 하지요. 예수님을 붙들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붙잡고 늘어졌겠지요. “그래서는 아니 되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주님께서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말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못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다시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생각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위하는 좋은 말 같이 보이지만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은밀한 모습을 보게 되면 자기를 위한 말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것은 안 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요 발판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 수단과 발판이 되어져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셔야 한다니 이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아왔는데, 주님이 죽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가당치도 않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자기가 원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경제 부총리 자리를 맡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보인 것이지요.

 

  집사람이 삐지고 토라지면 제가 그 화를 풀어주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혹시나 집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서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밥을 다 지어서 아이들 깨워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요. 이렇게 아내를 위한 생각보다 내 생각이 앞서는 것이지요.

 

 어느 교회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목사님께서 참 잘 해 갑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저렇게 목회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그 목사님의 이미지가 좋아보였습니다. 말을 들어보면 어떻게 그렇게 맞는 말만 잘 하시는지 놀랐습니다.  ‘저 교회 성도들은 목사님 잘 만나서 너무 좋겠구나!’ ‘나는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그 교회를 사임을 합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자리가 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제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막 분노가 이는 것입니다. 저 잘 아시지요. 분노가 많은 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그래, 목사는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더 좋은 자리에 간다고 치자. 그러면 남아 있는 성도들은 어쩌란 말이냐.’ ‘자기를 믿고 따랐을 교인들을 나 몰라라 하고서는 어떻게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간에 성도들을 향해서 달콤한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었을 것인데, 그 남아 있는 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제 그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라고 하면 치를 떨 것인데,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인데.’ 자기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훌쩍 떠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미지를 좋게 포장하고 있으면서 더 좋은 곳이 있으면 얼씨구나!’ 하면서 그냥 옮겨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한 그 삶에는 주님의 십자가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러시지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몇 주 전에 한 통의 전화가 어느 장로님에게서 왔습니다. “목사님, 어느 교회에 자리가 났는데” “아니요, 장로님. 안 갑니다.” 그 장로님은 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러셨을 것인데, 제가 너무 그 마음도 몰라주고 성급하게 말을 끊은 것은 아닌가 싶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물론 저에게도 내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못된 심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비록 여기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은 해 보지도 않습니다만 여기 이 자리를 통해서 내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교회 빚을 청산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일꾼을 세울 수 있게 해 주시고.” 교회 성장을 이루고픈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기도의 소원이 저에게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일 년이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통해서 , 박목사는 확실히 다르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지요. 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날 비웃었을 사람들에게, 날 의심했을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픈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더 앞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는 여러분, 사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거의 구분이 되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한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한 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는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이 종이 한 장 차이를 다른 사람들은 알아낼 재간이 없지요. 어쩌면 자신도 모르고서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시지요. 그 생각과 말의 진위를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려내실 수 있으십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자기의 숨겨 놓은 속마음이 다 드러나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속살이 드러나고 민낯이 다 드러났지요.

  그러나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은 그를 살리고자 하시는 말씀이었지요. 은밀한 곳에 숨어서 베드로를 죽이고자 했을 악한 사탄의 생각을 끄집어내서는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때를 통해서 분명하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지금 교회당 정원에서는 잔디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보게 되는 잔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 멋진 잔디를 키워내기 위해서 제가 아침저녁으로 쪼그려 앉아서 풀을 뽑습니다. 그런데 잔디와 잔디 같이 닮은 것이 있어요. 어릴 때는 이 둘을 구분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집사람은 많이 자라도 잘 구분하지를 못합니다.

  감자 싹과 감자 싹과 닮은 풀이 있습니다. 이 둘을 분간하지를 못해서 물을 얼마나 집중적으로 주었는지 모릅니다. 싱싱하게 잘 자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감자 싹이 아니라 감자 싹과 너무나 흡사하고 빼닮은 다른 풀 종류입니다. 뽑아보니 감자는 하나도 달려있지 않습니다.

 

  이제 2018년도 한 해의 절반을 두고 또 살아가야 합니다. 남은 인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 영광, 자기 만족, 자기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지요. 그것이 잘 사는 삶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쥐고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들처럼 살 수 없지요. 믿는 자처럼 살든 믿는 척 하면서 살든 둘 중의 하나도 살아가겠지요. 이것을 구분해서 가려내기란 절대로 쉽지가 않습니다. 본인들은 전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뿌리까지 뽑아내는 때가 되면 아무 것도 달려있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사실이 두려운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로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두고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러분, 우리는 남은 인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요. 내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지요.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내가 죽은 그 자리에서 제대로 쓰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게 될 때에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입니다. 자기만이 넘쳐나는 마지막 고통의 세대이지요. 이러한 세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주님!! 새겨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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