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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번영의 길

2018.06.23 10:48

박정철 조회 수:6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6-24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평화와 번영의 길(2:11-18)

 

  살면서 잘 잊히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워서 잊히지 않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제가 그렇게 미운지 가끔씩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럴 때에 아예 저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참 못됐지요. 그런데요. 그 사람이 저를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 고마울 때도 있습니다. 저가 싫은 만큼 나도 싫으니 보지 않고 지나쳐 주는 것이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한 것입니다. 그 사람 못지않게 저도 참 못됐습니다.

  살면서 보니까 지독스럽게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저에게 해코지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 뇌리에 얼마나 깊숙이 박혔는지 떠나지를 않습니다. 꿈에서까지 쫓아와서는 저를 괴롭힙니다. 떨쳐지지가 않습니다. 지긋지긋하지요.

  그렇게 꿈에서까지 쫓아와서는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서 드는 감정이 있습니다. ‘두고 보자.’ ‘잘 되나 보자.’ 하나님을 믿는답시고 저는 한 술 더 뜨지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잘 안 되게 해 주십사하는 생각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귀한 말씀을 제 식으로 나쁘게 이용하려는 못된 심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사람이 저를 향해서 , 뒤끝 작렬이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 그래요. 다행인 것은 집사람이 저와는 좀 다릅니다. 뒤끝이 살아있지를 않습니다. 제가 미운 그 사람들로 힘들어하면 집사람이 그럽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나.”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당신은 그래도 목회자가 아니냐?” 그 말에 수그러지면서 치켜세웠던 눈초리와 분노의 칼날을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제 자신의 깊숙한 내면에는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와 뭉쳐진 응어리들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날에 받았던 그 상처와 응어리들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는 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연관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어느 집사님이 한 번은 그럽니다. “목사님, 나이가 들면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하는데, 그거 순 거짓말입니다.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부모 생각이 하나도 안 납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집사님이 지난 생애 가운데 맺힌 한들이 얼마나 서려 있을지 헤아려보게 됩니다. 그렇게 그리워했을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이 오히려 부모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이겠지요.

 

  이렇게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와 응어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심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상처가 크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지는 듯 하지 않았습니까. ‘엘리 엘리 라막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어떤 누가 여러분을 향해서 침을 뱉은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나를 향해서 채찍으로 내리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어떤 누가 나를 향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사람이 있습니까. 창으로 찌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받으신 주님이시지만 당신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용서를 구하시지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비웃고 조롱하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창으로 찌르면서 해하고자 하는 세력을 만나게 될 때에 두고 보자.’ ‘잘되나 보자.’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맺힌 서러운 한과 응어리들을 십자가에서 다 풀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풀어내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치유와 회복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온전히 죽음으로 암흑으로 뒤덮인 무덤을 열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 민족의 큰 아픔과 상처가 있는 625일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서 전쟁을 치른 날로서 올해로 68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6·25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는 잊힐 리 없지요. 끔직한 전쟁이 소용돌이 속에서 온 산하가 피로 물들여지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이 날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릴 때부터 너무나 많이 불러서 입에 붙어 있는 노래 가사가 흘러나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하루아침에 부모 형제를 잃어버리고 고향 산천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있어서 이 6·25는 잊힐 수가 없는 날입니다.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6·25로 인해 이 겨레에 남게 된 가장 큰 생채기는 누가 뭐래도 삼팔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사 분계선인 이 삼팔선을 기준으로 155마일에 이르는 철책선이 그어졌지요. 허리 잘린 반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는 아무도 오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에 있으면서 철책 근무를 섰습니다. 그때 북쪽 휴전선 넘어 북한강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가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까마귀를 비롯한 새들이 철책 선을 자유롭게 왕래합니다. 이렇게 물안개와 새들은 바람처럼 자유로이 남과 북을 오가는데 유독 사람들만이 오고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 물안개와 새들처럼 언제쯤이면 이 삼팔선을 넘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삼팔선이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우리 국민들이 살아가는 모든 자리 자리마다 다 삼팔선이 그어졌습니다. 그 자리들마다 분열과 갈등이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 삼팔선과 함께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여학생하고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서로 못 넘어오게 합니다. 손이 좀 넘어오면 때립니다. 책이나 연필이 좀 넘어오면 밀쳐 버립니다. 아니 좀 넘어오면 어떻습니까. 좀 넘어가면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그 금을 넘어오면 죽일 듯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에서 삼팔선 금을 그어놓고 사는 곳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곳에 무슨 사람 사는 훈기가 있겠습니까. 훈훈한 정이 아니라 흉흉한 감정만 쌓일 뿐이지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지요.

  역사 속에서 이 삼팔선으로 인해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오직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분단을 고착화시키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가고자 했던 세력들은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유해하다 싶으면 공산당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플레임을 걸어버렸습니다. 그 입과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서는 족쳤습니다.

  그로 인해서 억울한 희생과 죽음을 당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문과 공작으로 인해서 무고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어져서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 민족의 암울한 비극을 언제까지나 두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미워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이에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6·25를 맞게 되는 날을 기점으로 해서 오랜 전부터 해서 ‘6·25 민족 화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주일이지요. 그 날의 아픔과 슬픔을 이제 화해와 평화로 승화시켜가자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앞장을 서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터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여시고그랬습니다. 15절에서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된 것들로 하나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나뉘어진 것들로 합쳐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준비를 했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그야말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지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원수 된 장벽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서로 소통하면서 오고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여러분, 하나 되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6절 이하에서 너희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6-29) 했습니다.

 

  이번 427일에 남북 간에 판문점에서 정상들끼리의 회담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612일에는 싱가포르에서는 북미 간 정상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지형이 형성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남북도 그랬습니다만 북미 간에도 그간에 얼마나 적대적이었습니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릉거렸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정은을 두고 꼬마 로켓 맨이라고 비아냥거렸던 트럼프 대통령이었지요. 그 트럼프를 향해서 김정은은 전쟁 미치광이라고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내 책상 위에는 핵 단추가 있다.”면서 엄포를 놓았습니다. 위협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북한이 그 날 그 자리에서는 각국의 국기를 나란히 걸고서는 회담을 가진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에 상기된 얼굴을 하면서 발언을 할 때에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북미회담을 훌륭한 평화의 전주곡이라 표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평화의 전주곡이 온 세계적으로 평화의 합창으로 이어져가길 소망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어느 목사님 내외분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 사모님, 북한의 어디에 가보고 싶으세요?” 자기는 묘향산에 가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운 금강산에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집사람은 장인어른의 고향인 평양에 가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들 있으면서 서로가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북한과 평화적으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경의선, 경원선, 동해선을 복원해서는 그 철도를 타고서 가보고 싶은 폴란드도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베리아와 유라시아까지 연결된 철도를 통해서 얼마나 인적 물적 교류가 일어나겠습니까. 서로 화해하고 평화가 정착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화해와 평화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과 꿈이 더 커지고 원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만 평화가 곧 밥이요, 경제요, 미래다.’

 

  예전에 양남에서 환서 석읍을 지나 입실 쪽 방면으로 차를 타고 갈 때였습니다. 얼마를 간다 싶었는데, 산비탈 길에서 그만 차가 막혀서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쪽 차선에서도 오는 차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곳은 차가 막히는 곳이 아닙니다. 꽤 시간이 흘러서는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다 보니까 이쪽저쪽에서 수많은 차들이 즐비하게 서서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더 가서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서로 마주오던 차들이 부딪힌 것입니다. 그랬으니 그 뒤를 따르던 차들이 한 대도 지나가지 못하고서는 정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가졌던 생각이 있습니다. ‘서로 간에 미워하고 다투고 갈등하면서 분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막혀버릴 수밖에 없구나!’

  마귀를 가리켜서 디아볼로스라 칭합니다. ‘비방자’ ‘참소자라는 뜻이지요. 거짓의 아비인 이 악한 마귀는 중상모략을 하면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서로 미워함으로 치고 박게 하지요. 그래서는 관계란 관계는 다 끊어놓습니다. 도로를 끊어놓습니다. 철길을 끊어놓습니다. 뱃길을 끊고 항로를 끊어놓고서는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디아블로스 이 악한 사탄은 우리 인생들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까지 끊어버렸습니다. 멸망과 지옥으로 가는 길만 열어놓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화평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끊어진 하늘 길을 새롭게 복원해 주셨습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열리니 그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와 평안이 우리네 각 심령과 삶에 있어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해로 인한 평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남북 간에 긴장이 극대화되면서 대치 상황이었을 때에 우리 모두는 불안과 염려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의 위기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한때 북쪽에서 엄포를 놓았었던 서울 불바다발언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발언으로 인해서 온 시민들이 전쟁에 대한 공포로 사재기를 했습니다. 좀 있다 싶은 집에서는 외국으로 도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남북간의 긴장이 대두되고 대치상황이 계속되어지면 우리 국민 모두는 불안과 공포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 그 평화의 불씨를 계속해서 살려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전보다 너무나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북 간에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면서 금강산 묘향산에도 가보고 싶은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대동강 소주가 유명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평양에서는 물냉면 한 그릇을 먹고 함흥에서는 비빔냉면 한 그릇 먹고서 중국과 러시아를 넘어서 광활한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꿈과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화해와 일치, 평화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6·13 지방 선거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 국민들의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통한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보수는 현실에 딛고 서 있는 발이라 했고, 진보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보수나 진보나 둘 다 참 좋은 것입니다. 저도 보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보수가 보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수로 향할 표심이 많이 이탈되었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수구 세력들은 여전히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철 지난 지역주의에 편승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지요. 막말과 네거티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구세력들은 참담한 패배를 떠안아야만 했습니다.

  일간지 어느 신문 사설에서는 이런 논평을 내놓습니다. ‘낡고 닳은 과거의 구태스런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서, 반공 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의 낡은 담론으로는 21세기 다이내믹 코리아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담아낼 수 없는 일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진정한 보수가 일어나 여당을 잘 견제해가면서 국정을 운영해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그러면 내 자신에게 있어서도 청산되어야 할 낡은 잔재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데 있어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청산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미워했던 사람을 여전히 미워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날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지나쳐버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나 역시 고개를 돌려 피하는 것이 합당한가?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끝까지 뒤끝을 살려두어야만 하는 것이 합당한가? 날 해코지했던 사람을 두고서 안 되기를 바라면서 원수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 뭔가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 합당한가? 그러면서도 내 심령과 삶에 있어서 위로와 평안을 하늘로부터 임하기를 소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성 프랜시스가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하고 말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게 때문이니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에서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것처럼 나를 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셉처럼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한나를 향한 브닌나의 조롱이 극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해서 무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난하고 모함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에는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싫어할 때에는 싫어할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인정한다고 하면 우리들 주변에는 그 어떤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전부 미운 사람들일 것이고 죽일 사람들만 있게 될 것입니다. ‘두고 보자’ ‘그래, 잘 되나 보자고 눈을 흘기고 이를 갈고 있으면 그 삶에 무슨 선한 것이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전에 자기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들을 다 잡아가두고 당한 만큼 갚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요셉의 위대한 점이지요. 그게 요셉을 본받을 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당한만큼 갚아 주었더라면 그도 자기를 해하고자 했던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그를 누가 본받고자 하겠습니까. 그런 모습에서 어떤 선한 역사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진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남한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북한은 미워하고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에 있어서도 그 북한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와 분노의 적개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내일이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노래를 부르면서 인공기를 불태우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가지고서는 우리 민족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화해와 평화의 새 길을 열어주셨지요. 이제 이 땅에서도 화해의 분위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평화의 전주곡이 울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들에서 갈라져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감히 기도하고 소망해 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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