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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2018.04.29 19:51

박정철 조회 수:20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4-29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어떤 하루(살전 5:16-18)

 

  4월의 마지막 주간인 봄날에, 길을 가다 보면 철쭉이 아주 붉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붉은 철쭉으로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보라색 라일락 꽃 향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일락 꽃 향기로 흠뻑 젖어들게 하시나이까.’ 저녁에 들어보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밤에도 구슬픈 목소리로 울부짖는 새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랬지요. 자연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생기는 병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자연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생들이 자연에게서 멀어지면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메마를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지요. 어떻게든 우리는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빚어주신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 날 오셔서 교회당 정원과 텃밭을 한 번 쭉 돌아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암 수술을 하셨어요. 수술 후에 입원실에 있으면서 병원 밖으로 내다보이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수술 전에 보던 세상과 수술 후에 보게 되는 세상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나더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희한하게도 없어져 봐야 있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때가 많습니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어지면 그때서야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있을 때 잘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있을 때 더 잘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시력에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들을 수 있는 청력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잡을 수 있는 손에, 걸을 수 있는 다리에, 느낄 수 있는 감촉에, 생각할 수 있는 두뇌에, 오늘 이 시간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월포 바닷가 근처에 시무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이 와서는 해수욕도 하고 왁자지껄 조개도 구워먹었습니다. 그때 몇몇이 저를 부러워하면서 목사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좋은 바다를 눈만 뜨면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어느 연세가 지긋이 드신 분이 그 말을 받아서는 아이고, 처음에야 좋지. 좀 지나보이소. 맨날 보는 바다가 질리지요.” 사실 이 분의 말씀처럼 우리는 귀하고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식상해하고 따분해하고 물리고 질려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지요. 깟씨같이 희고, 진주 모양 같았으며,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던 만나를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처음에는 만푸’ ‘만푸’ ‘이게 뭐냐?’ ‘이게 뭐냐?’ 그러면서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서는 이렇게 말과 태도가 바뀝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11:6)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했습니다. ‘박하다는 것은 경멸할 만한’ ‘하찮은’ ‘가치 없는’ ‘무익한’ ‘시시한이런 뜻을 가진 말이지요.

  아무 것도 심을 수 없고 자랄 수 있는 것들이 없어서 먹을 만한 것들이 아무 것도 없었던 그 척박한 광야에서 내려지는 하늘의 만나를 하찮고 경멸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저들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애굽에서 건져내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이시고자 광야길을 걷게 하시면서 하늘 양식으로 내려주셨던 만나를 두고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또 이거야.” “맨날 이거야.” 그랬던 것이지요. 우리 아이들이 밥을 보고서 또 이거야.” 그러면 제가 그러지요. “, 먹지 마. 그럴 거면 먹지도 마.”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베풀어주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천성을 향해 가는 어귀 어귀마다 허락해 주신 은혜와 축복이 너무나 많지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에 있어서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아주 하찮고 별 볼일 없어서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있다는 잘못과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뭇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식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입니다. 따사로운 봄날을 따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들에 대해서 익숙해져서 식상함에 젖어들게 되면 그때로 기쁨과 감사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난주 토요일에 현모군과 민지양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참 행복해 보였지요. 둘이 서로 사랑함으로 결혼을 통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축도 전 기도를 통해서 들뜬 마음이 평생을 넘어 영생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만 우리가 살다보면 연애할 때와 신혼 때에 들뜬 마음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자칫 서로에 대해서 식상해지면 권태기에 접어듭니다.

  지금까지도 길을 걸으면서 손을 맞잡고서는 다정하게 걷는 전성갑 박명희 집사님 같은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못하여 권태기로 접어드는 부부도 있습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가슴 뛰었을 그 가슴이 더 이상 뛰지를 않습니다. 하늘의 별과 달도 따줄 것 같았고, 사랑하는 이 사람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 마음이 사그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런 가정이라면 의무와 책임은 있겠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에 그 설렘과 두근거림, 열정 같은 것들이 식은 지 벌써 오래 되어서, 그런 때가 자기에게도 있었느냐는 식으로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러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 가정이 귀찮아지고 지겨워지고 따분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해를 거듭하다 보면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행위만을 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행위가 신앙생활인 냥 착각을 합니다. 그러고도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런 행위가 자기위안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쁨이 되지 못하지요.

  지난주일에 본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보여주었던 종교적인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지요.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면서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자들과는 다르다고 자처했습니다. 윤리적으로 흠을 가지지 않았다고 자부했습니다. 죄인들이라 일컬어졌던 세리나 창녀 같은 자들과는 어울리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유혈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가다 벽에 부딪혀 피가 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의 표시로 붕대를 감고 다녔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저들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흠이 많고 허물이 커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서는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는 세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로 자기 위안과 자기 의를 삼았지요. 그렇지만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오는 어떤 설렘과 두근거림, 열정,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탄과 감격, 감사와 같은 것들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볼 때에 신앙생활을 잘하는 기준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하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경북노회에서 각 교회로 보내는 유인물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지교회에서 선출되어 피택된 장로님에 대한 담임목사의 평가 용지입니다. 그 중에서 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주일 성수는 잘 하는가?’ ①②③④⑤ 십일조와 감사 생활은 잘 하는가?’ ①②③④⑤ 새벽기도회는 참석하는가?’ ①②③④⑤ 어떻습니까. 이런 평가가 직분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최고점을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진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 분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35:9)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33:1-3)

  웨스트민스트 신앙요리 문답에서 이렇게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과 기도함으로 대화를 나누고, 범사에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님 청빙을 위한 공고에 써놓은 글이 생각이 납니다.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고 구원의 감격이 있는가?’ 딱 그 한 가지만 묻고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청빙의 자격 요건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를 보면 봉고를 운전할 수 있는가?’ ‘컴퓨터 자격증이 있는가?’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직분자로서 자격 요건이라는 것이 어떤 외적인 규범 준수에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가득 채워진 모습이어야지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가는 모습들이어야지요. 그렇게 기도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깊숙한 심령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합니다.”

 

  지난주부터 제가 일기장에 나름 적어가는 형식의 글이 있습니다. 바로 감기입니다. ‘은 감사의 제목이고, ‘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자를 적어놓고서는 짧게나마 감사의 제목을 적어갑니다. ‘자를 적어놓고서는 몇 몇 가지 정도 기도의 제목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각도 틔고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틀에서 매일 비슷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하루가 그냥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버린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는 입을 다뭅니다. 그럴 때가 많아요. 밖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집사람에게 묻습니다. “오늘 뭐했나?” “뭐하긴 뭘 해요. 그냥 있었지요.”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이 훌쩍, 한 달이 훌쩍, 몇 달이 그냥 훌쩍 건너 뛰어버린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귀한 하루하루의 생이 마치 밑 빠진 독에 부어진 물처럼 흘러버린 것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되도록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감사의 제목과 기도의 제목을 찾아서 적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그 삶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계시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익숙해진 또 하루를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서도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요. 어제와 오늘이 비슷해 보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자연에서 경이를 느끼게 되듯이 내 모습도 그렇게 닮아가야 되겠다고 다짐도 해 보게 됩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 비가 참 많이 왔습니다. 밴드에 올린 글처럼 비 오는 날에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간 모아두었던 씨앗들 코스모스, 양귀비, 도라지를 비롯해서 몇 몇 가지들을 뿌렸습니다. 성결이가 보고 한다는 말이 아빠, 우리 집 에덴동산 되겠어요.” 갑자기 돈가스가 먹고 싶습니다.

  사실 뿌려지는 씨앗은 너무 작아서 뿌리면서도 어디에다 얼마나 뿌려졌는지 가늠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것만이 아니지요. 뿌려진 씨앗들이 자라나는 것이 너무나 더딘 것을 보게 되지요. ‘나나 안 나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때가 되면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통해서 움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서는 꽃과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박선갑 집사님이 그러겠지요. “여기 도라지꽃이 올라오네요.” “목사님, 여기에다가 코스모스 뿌리셨네요.”

  씨앗이 움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가는데 있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지 모릅니다. 그 하루하루가 모아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루하루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요, 그 하루하루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루하루를 살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네 삶에 어떤 꽃이 피워나고 어떤 열매가 맺어가게 될는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11:5) 우리가 바람의 길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 아이들이 어미 태속에서 생성된 그 작은 수정체에서 어떻게 굵은 뼈들로 자랄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 신기할 때가 있어요.

  더하여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그 하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해 가실지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실 그 하루하루를 식상하게 여기거나 따분하게 여기거나 아무렇게나 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에게 어떻게 기도와 말씀이 역사할는지 알 수 없기에 준비에 있어서 소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일을 맞이하면서 가져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주일을 잘 채워가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때웠다’ ‘해치웠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주일을 보내고서는 들었던 생각도 가끔씩 그랬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어떻게든 주일이 지나갔다.’ ‘그나마 잘 때웠다.’ ‘아이고 마. 어떻든 지나갔으니 다행이다.’ 그런 생각에 위안을 삼고자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때우는 것과 채우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정성일 것입니다. 햄버거와 콜라 하나로 한 끼를 때울 수 있습니다. 대충 물에 밥을 말아서 한 끼를 때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성이 크게 담겨져 있지 않지요. 그렇지만 정성을 다해 차려진 식탁을 대하고 나면 배만 부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꽉 채워진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주일을 맞이하면서 잘 채워야 되겠다.’ 싶으면 준비하는 자세가 다르지요. 정성이 깃들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고 난 뒤에는 그 여운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몰라요. 금방 헤어졌는데도 벌써부터 보고 싶어집니다. 헤어져 있는 그 시간은 그리움으로 짙어지는 시간이지요.

  이해인 수녀가 쓴 사랑할 땐 별이 되고라는 수필집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의 삶이 노래가 된다는 것은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는데 있지 아니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정성껏 살아가는데 있다.’ 우리의 심령과 삶을 무엇으로 정성스럽게 채워갈 것인가? 오늘 성경은 우리로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채워가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이하거나 기이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평이한 내용입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한평생 시각장애자로 은혜로운 영혼의 찬송가 10,000여 편을 쓴 세계 최고의 찬양 전도자이자 찬송가 시인 패니 크로스비가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질병으로 인해 시각장애인이 됐지만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서 살았습니다. 특히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명랑한 성격을 기르느라 애써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변해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절대 괴팍한 늙은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어디를 가든 늘 명랑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성숙하고 풍요로우며 기쁨이 넘치는 노년기를 보내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딱 지금 여기 이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종착지로 앞으로 살아갈 삶의 출발지로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듯이 끓을 만큼 끓어가게 하시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선하신 섭리를 확실하게 인정하게 될 때에 우리는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기쁨의 자리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의 자리요, 범사에 감사함으로 받음으로 버릴 것이 없는 복된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살아가다 보면 오늘 이 하루, 이 처해진 자리가 힘에 겨울 수 있습니다. 내가 부딪쳐 가야 할 상황과 환경이 힘에 부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현실의 생활 속에서 부닥쳐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로 인한 감정의 흐름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존재이지요. 그만큼 인간이란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때에도 불평과 분노가 아니라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현실의 짐을 질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능히 받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버텨낼 수 있고, 견뎌낼 수 있음을 아시기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겨낼 수 있음을 아시기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어린 꼬마 아이가 아빠를 도와 장작더미를 나릅니다. 그것을 본 이웃집 사람이 아이에게 무겁지 않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는 우리 아빠는요. 제가 들 수 있을 만큼만 얹어주시니 제가 들 수 있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지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나도 나를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다리가 없는 어떤 사람이 너무나 해맑게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의아스러워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몸을 가지고서도 그렇게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저는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지고 펄쩍펄쩍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다보니 즐겁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건너뛰고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세상은 가난과 질병, 낡음과 늙음,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면서 슬퍼하게 하고 한숨짓게 하고 불만과 분노를 내뿜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이 세상을 이긴 주님과 함께 함으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한숨과 체념이 아니라 기도를, 불만과 분노가 아니라 감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그 소유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호흡마저도 주의 것이니그랬습니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의 것이지요. 우리의 몸도 생명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들을 가져다 쓰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주실 만 하셨기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다 가져갈 만 하셨기에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다 나를 사랑하사 위하는 마음에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네 삶에서 어떤 하루가 펼쳐진다 하더라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꾹꾹 눌려서 채워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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