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8-04-22 19: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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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4-22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고넬료 그 사람(10:1-8)

 

며칠 전에 거울을 보니까 코털이 삐져나와 있습니다. 보기가 그래서 손으로 집어서 뽑았습니다. 3개가 뽑혔습니다. 따끔하지요. 근데 놀랍게도 전부 흰털이 뽑힌 것입니다. ‘어라. 이게 뭐야.’ 싶어서는 또 한 번 더 뽑았더니 역시나 흰털이 두 개가 뽑힙니다. ‘, 이것 봐라.’ 싶어서 한 번 더 뽑아봤더니 그때서야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검은 털이 하나 뽑힙니다.

이연숙 집사님이 최현주 집사님에게 세월이 들어가는 자기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사정없이 내리친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냥 받아 들여라.”고 했던 것처럼 정말 세월이 묻어나는 그 흰 코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이던가.

신학교 동기회 모임에 갔을 때에 한 명이 그럽니다. 자기는 이전까지 TV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이지요. 구구절절 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대사가 어떻게 자기 마음을 후벼 파고 잘 대변해주고 있는지 그렇게 공감이 갈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속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지나가면서 tv를 보는데 어느 나이가 든 연예인이 언뜻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리포터가 묻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있어서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세월입니다.” 그래요. 그 말에 깊은 공감이 왔습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서 세월이라는 말이 그렇게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요새 제가 책을 읽을 때 보면, 그 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책장을 넘기는 것에 비중을 많이 두고서는 훑어 지나가는 모습이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꼼꼼히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이런 자세로 그전부터 공부를 했으면 정말 잘했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사뭇 달라진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일까? 왜 그전보다 더 진지해지고 진중해지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얼핏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이지요.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남겨진 시간이 언제까지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청년 때에는 시간이 가도 전혀 아까운 줄 몰랐는데, 이제는 제 나이 50줄에 들어서니 내게 남겨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의 무게 앞에서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새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이 새 봄을 언제까지나 맞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나물을 캐서 먹을 때에도 언제까지 이 나물을 먹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 봄을 맞이하는 자세도 달라지게 되지요. 봄나물을 먹으면서도 먹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어진 그 시간들을 이전처럼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여전히 그전처럼 살아가게 된다면 빈껍데기일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이 찾아듭니다. 여태껏 산다고 살아온 삶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전의 삶이 오늘의 나를 흔들어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잇몸만 흔들리고, 다리만 후들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흔들립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한다면 중년의 위기일 수 있겠습니다. 중년의 위기 속에서 우리 인생들은 지금까지 쌓아 온 생의 기반들이 뒤죽박죽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의미와 가치들을 새롭게 재배열하게 되는 것이지요. 위기가 기회가 되는 때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10여 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입니다. 제가 경북노회에서 아침 경건회 시간에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혈기 왕성한 목회 초년병으로 믿음에 따르는 교회 성장에 관한 내용의 설교를 제 나름대로는 아주 멋지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주 흡족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만나는 몇 몇 분들이 잘 하더라는 말씀을 해 줍니다.

그 칭찬을 또 다른 분에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 듣기 위해서 찾아갔더니 해 주시는 말씀이 박목사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 잘했어.”라는 칭찬을 듣고자 찾아갔습니다만 그 분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시는 말씀이 목회가 꼭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십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씀을 받고서는 서운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다시 그 말씀을 받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목회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은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것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요 최고여야 하는 것처럼 경쟁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을 시키는 것이지요. 큰 것이 큰 인생이요, 화려한 것이 화려한 인생이요, 웅장한 것이 웅장한 인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면서 그 세계에 들지 못하면 낙오병이라는 낙인을 찍지요. 실패자라는 딱지를 붙여 놓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세상과는 확연히 달라야 할 교회마저도 세속의 세파를 막아내지 못해서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이 교회마저도 낙오병과 실패자라는 원치 않는 오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나 신명나게 어울리셨던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은 만민이 나올 수 있어야 할 이 교회에서조차도 있을 곳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이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 우리 인생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소중한 것들을 찾아가야 하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없는 삶, 이웃을 잃어버리고 이웃이 없는 삶, 그러면서 내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호탕한 웃음과 넉넉한 여유와 배려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와 이웃과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된다면 그저 세월만 보내고 난 뒤에 가지게 되는 허무를 읊는 인생무상과 애 늙은이보다 무서운 늙은 애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를 사도행전 10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살아내고자 애쓰고 힘썼던 고넬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받고 싶고, 닮아가고 싶은 인물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닻을 내려서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모델을 찾고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삶의 의미와 깊이를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만나고서 험난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길을 찾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꼭 그런 사람을 찾아서 만나가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삶을 진지하고 진중하게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의 삶은 귀한 사표가 되고 진면교사가 됩니다. 1절에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는 로마의 군인으로서 오늘날로 치면 군대의 중대장급에 해당하는 장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가 식민지로 삼고 있는 유대 땅에 점령군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령군으로 온 그가 보여주고 있는 삶의 모습은 정말 놀랍지요.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랬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면서 백성들 위에 함부로 군림할 수 있었을 그가 어떻게 이런 경건한 모습을 지니면서 살아낼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군에 있으면서 다짐했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대하고 나면 군 장교 출신들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 제가 군대에서 만났던 장교들이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하나 같이 전혀 인간적이지 않았습니다. 출세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장교라는 타이틀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유로 병사들을 함부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몰랐지요. ROTC 출신, 우리 양승기 집사님이나 변창열 집사님과 같은 장교 분들도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고넬료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다른 누구들보다도 지위나 신분에 있어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힘을 가졌다 싶으면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갑질할 수 있지요.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의 입장에 있는 상대방에게 물 컵을 내던질 수 있습니다. 욕설과 함께 고성을 내지르면서 인격적인 모독을 가할 수 있습니다. 정강이를 걷어차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기분에 들지 않는다고 무릎을 꿇게 하고서는 빌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힘으로 무시하고 짓밟고 배제시키면서 내쳐버릴 수 있습니다. 사장시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없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면서 나쁜 짓을 일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인지를 인식하지 못해요. 자기는 충분히 자기에게 힘이 있으니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힘이 우위를 가진 자로서 찌찔하고 짜잘한 자기 희열을 맛보는 것이지요.

 

제가 강원도에서 신병교육대 교육을 받을 때였습니다. 내무반에 조교 중에 말년 병장이 제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장은 그 내무반에서만큼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자기가 라면을 먹고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끓여 먹을 수 있어요. 밤에도 출출하다 싶으면 라면을 끓여 먹어요. 그 라면냄새를 맡고 있으면 얼마나 먹고 싶은지 몰라요. 정말 꼴깍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그럴 때 이 병장이 라면을 먹고서는 한 마디를 던집니다. “국물 먹고 싶은 사람 기상!!” 여러분, 제가 일어났겠습니까? 억지로 참았습니다.

또 한 가지가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점오를 하고 취침을 하려고 할 때입니다. 그러면 이 병장이 교육생들에게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 뒤로 눕게 하고서는 그 등 위로 100m 달리기를 하듯이 뛰어다닙니다. 라면도 돼지처럼 먹던 뚱돼지 녀석이 위에서 뛰는데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 ‘소리가 저절로 납니다. 그러면 한다는 말이 누구 한 명이라도 소리를 내는 놈이 있으면 다시 한다.”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도 나쁜 짓인지도 알지 못하고 밤마다 그렇게 해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과 권력을 가진 내무반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몇 번씩이나 권면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6:9) 하나님이 인생들의 상전이요 상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 절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자기가 가진 힘을 함부로 남용하게 되지요. 그로 인해 결국은 그 남용한 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야 맙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힘을 가졌던 권력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우리가 오늘에 와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악한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자기의 이권과 쾌락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라도 그 힘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진짜 힘 있는 자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은, 저급하고 저열한 자들은 그 힘을 자기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함부로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넬료가 이런 귀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2절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한두 번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몸에 배이고 익혀진 것입니다.

우리 남자 분들이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하는 것을 보면 보통 솜씨들이 아닙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닙니다. 이러다가 밥까지 한다고 하면 어쩌나 싶습니다. 사택에서도 밥을 먹고 나서는 집사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거지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 집에서 누가 설거지 다 하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엄마가요..... 하는 것 못 봤어요.” “애들아, 아빠는 자 들어가는 것은 다 한다. ‘설교’ ‘설거지’” 그랬더니 성결이가 아빠, 우리 설빙 먹으러 가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적으로 몸에 익혀가야 할 것들이 있어요. 고넬료가 그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인들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들이 우리의 몸에 진득하게 배여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요.

3절에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진심어린 삶의 모습을 다 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사실 그 당시에 구제와 기도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보다 더 뻔질나게 구제하고 기도했던 자들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구제와 기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기억되신바 되어 상달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호된 책망을 받아야만 했지요. 그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오는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해서 가식과 외식으로 행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얼마나 많은 구제와 기도가 넘쳐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그것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몸에 익혀가야 할 경건의 모양들이 가식과 외식, 위선으로 흘러서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전혀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2)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5)

 

고넬료를 보십시오. 그가 몸에 익힌 신앙적인 모습들로 인해서 하나님께만 기억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인정하고 칭찬해주고 존경했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인정을 받았지요.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칭찬을 받았지요. 존경받고자 함이 아니었음에도 존경이 그 뒤를 따랐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심을 다 보고 계시면서 그를 찾아와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고넬료에게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지요. 5절에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그처럼 경건한 하인 둘과 부하 한 명을 보내서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그랬어요. 우리는 여기에서도 그의 성품과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앙하는 하나님을 강압적으로 믿게 하려고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강압적으로 자기 수하의 병사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친척과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간혹 보면 기사화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군대에서 종교가 다른 밑의 사람들에게 억지로 교회당으로 끌고 오게 해서는 물의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로 교회당에 오지 않으면 불이익을 줍니다. 그러니 억지 춘향식으로 끌려나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면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교회당에 오게 하고자 했다면 고넬료처럼 그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5절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했습니다. 어떻게 한 가지 한 가지의 행동들이 이렇게나 신실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제가 요새 만나면서 알게 되는 어느 목사님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점령군 장교로서 식민지 백성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이럴 수 있을까. 자기 발아래에 엎드리게 해야 될 것 같은데, 자기가 발아래에 엎드려서는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 사람들을 감화시켜 내는 삶은 바로 2절이겠지요.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범사에 유익한 것이 경건이라 했는데,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것이 경건이라고 했는데, 이 귀한 경건의 삶을 고넬료는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든 이렇게 살고 싶겠지요. 저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내 말에 거부감이 없이 누구에게나 잘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 표정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눈빛에 인자함이 더해질 수 있었으면 너무나 좋겠지요.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는 전화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만 내 전화번호가 찍힌 벨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이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입니다. 여전히 저에게는 싸움닭 기질이 남아 있습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을 그냥 잘 봐주지를 못합니다. 말 한 마디를 할 때에도 꼭 가시를 넣어둘 때도 있습니다. 잔소리도 여전하고요.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식이 아빠처럼은 안 살겠다.” “아빠처럼은 안 되겠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집사람이 당신 같은 사람 또 만날까봐 겁이 난다.” 그러면 지금껏 살아온 저의 삶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기억되지 못하는 저의 삶이라면 어릴 때부터 줄곧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온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코털에 검은 것보다 흰 것이 더 많아지고 있는 이 중년의 때를 보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조차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본받고 닮아가고 싶은 진면교사가 아니라 본받고 싶지 않은 반면교사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폴 투니어박사의 초청을 받아서는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그 분과 함께 몇 시간을 보내면서 그 모습에서 특별한 감회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때 그 박사의 나이가 85세의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는 신선함이 느껴지고, 부드러움과 인자함, 진지함과 열정 같은 것들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더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그러면 그 힘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은 그 폴 투니어박사는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그 날 분의 일용할 양식을 읽고 기도하면서 묵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색과 성찰을 하는 것이지요. 그 시간에 얻게 된 영감이 그 날의 중요한 실천 내용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얻게 되는 기쁨과 성취감은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의 집에 오면서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이방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구속사에 있어서 정말 획기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게 되는 은혜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회의를 거치게 되면서 이방인 선교 사역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냈던 경건한 삶을 통해서 복음의 구속사에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고넬료 그 사람으로 잡았습니다. 예전에 샀던 책 중에서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제목이 좋아서 그렇게 잡아 봤습니다. 그 당시 고넬료가 살아냈던 그 삶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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