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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4-01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24:13-35)한맘

 

  저희가 한맘에 온 지 9개월째가 되었습니다. 종종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 내가 이 한맘에 와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한맘에 와서는 내가 다시 사는 느낌이다.’ 텃밭을 일구느라 괭이질 호미질을 하면서도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심고 싶고 가꾸고 싶은 것들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지난주에 밭을 일구면서 나무뿌리를 하나 만났습니다. 얼마나 이 뿌리가 깊게 박혔는지 쉽사리 캐내지지가 않습니다. 그 뿌리를 잡고서 많이도 늘어졌습니다. 아마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늘어졌듯이 했다면 제가 환도뼈가 부러지지나 않았을까. 그 날 밤에 온 몸에 알이 배겨서 아주 혼이 났습니다. 그 다음 다음 날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이 한맘에서 이렇게 붙들고 늘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사실 설교도 붙잡고 늘어질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전에 있어서는 이렇게 늘어질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습니다. 일주일에 몇 편씩 설교를 준비해야 되니 사실 찍어내기도 바빴습니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과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엮어서 정리하기도 버거웠습니다.

  목회자로서 늘 설교 준비 중입니다만 그래도 이전에는 제품을 찍어내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나름 수공예 작품을 제작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남들이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그전에는 내 이야기가 되지 못하니까 제자리걸음 내지는 뒷걸음질 치는 모습 같을 때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 느낌이 듭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서툴고 어설플 수 있겠지만 한 발 한 발 더 잘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기도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제가 보는 여러분들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 여러분들도 이 한맘에 오면서 많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는 여러분들의 모습은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꾸밈없이 천진난만한 모습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 알쓸신잡 해박한 지식은 가지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시는 것, 갓난아기에게 깍꿍하면 그 한 마디에도 자지러지게 넘어가면서 웃는 것처럼 아무 말에도 그냥 웃어주시는 것, 어미의 품속에서 한없이 받아들여지는 아이처럼 이 한맘 공동체 속에서 우리들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공동체를 허락해 주시면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시니 큰 은혜요 감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게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사는 맛이 나야지요.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요. 사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들 웃으면서 잘 살아야지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 무엇보다 영원히 살아야지요. 오늘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영원한 하늘 소망 가운데 그 영원을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부터 살아들 내셨으면 합니다.

  얼마 전 겨울에는 본당에 올라와서 묵상을 하면서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던 창문 밖에는 낙엽들이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것을 봤습니다만 이제는 나비들이 훨훨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요새 보면 봄나물 천지입니다. 몸에 좋은 보약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 봄나물을 먹으면서 봄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봄이 오면서 땅 속에 흩뿌려졌던 씨앗들이 새 순으로 움터 오르듯이 이 부활의 봄 절기에 우리의 영혼과 삶에 있어서도 새 순처럼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소망이 움터 올라야 할 것이고, 점차 잎이 우거지면서 울창한 숲을 이뤄갈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이 부활신앙을 교리적으로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신앙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 참 부활신앙은 이미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여기 이 시점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나 시작되는 미래적 사건으로만 치부해 놓을 것이 아니라 부활 생명의 권능을 가지고 이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전에 밴드에 한 번 올린 글입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다음 종말의 날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한 생명으로서 죽음의 문턱까지도 가볍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죽음을 가리켜서 , 자매여!’라고 불렀습니다. 그 죽음을 두고서도 입을 맞출 수 있는 신앙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따라 그 죽음이 천국을 향한 문이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겨울이 봄으로 향하는 문이 됨을 알기에 겨울까지도 기꺼이 받아낼 수 있습니다. 어둠은 새벽을 향한 문으로 향하는 것이기에 어둠마저도 용납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지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우리로 이 부활 신앙을 가지게 하시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낼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스팔트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와서는 줄기를 뻗어가는 잡초의 근성을 가져가게 하시는 주님, 엄청난 바위까지도 헤집고 나와서는 자태를 뽐내고 있는 소나무를 통해서 소망을 가져가게 하시는 주님이 참으로 감사하지요.

  이 부활의 봄에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서 부활의 주님을 마음껏 영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오늘 설교의 제목을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으로 잡았습니다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지요.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 계속해서 우리들의 닫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라.”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두드리시느냐? 열 때까지입니다. 열 수밖에 없을 때까지입니다.

  사랑이지요. 이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되든’ ‘어떻게 살든내버려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밥을 먹든 말든, 잠을 자든 말든, 공부를 하든 말든, 네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일 수 없지요.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돌아올 때까지 소리치고, 믿을 때까지 깨우치게 하고. 이 사랑이 오늘 여러분과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인 줄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좇았던 글로바라고 하는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지금 믿음이 완전히 상실한 상태입니다. 지금 깊은 실의와 낙심,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좇았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는 돌아가시고 만 것입니다.

  오병니어 기적을 일으키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던 그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 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주시던 그 예수, 그래서 정든 고향과 생업까지도 과감하게 버려둔 채 따랐던 그 예수가 무참히 십자가에 달려서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는 모든 것이 다 끝이 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는 다시 예전의 그 자리들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그 예수가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시켜 줌으로 다윗의 때와 같게 해 주기를 소원했던 그 예수가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서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이제 자기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꺼져버린 거품처럼 믿음의 상실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의와 낙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솟아날 구멍마저도 막혀버린 것처럼 우울하고 슬프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처한 자리에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나마 가졌었던 믿음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먹고 살만 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 내 몸이 건강하지 못하여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불안과 염려로 잠들지 못하면서 눈앞이 캄캄하여 내일을 장담하지 못할 때, 이러한 것들이 합병증처럼 짝을 이뤄 찾아들 때에 우리들 역시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믿음이 해체되는 듯한 순간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다시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두 제자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동행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면서 그들의 주고받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시면서 접근을 해 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 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믿음 없이 깊은 실의와 낙심 가운데에 빠져서는 그 길을 홀로 외로이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로 슬픔과 고통에 잠겨서는 소망 없이 인생의 길을 터벅거리면서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흐르는 눈물을 그냥 못 본 체 하시지 않습니다. 땅이 꺼지라 내뱉는 한숨을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결론적으로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면서 새로운 믿음과 소망을 허락해 주시지요.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엠마오로 향했던 그 걸음을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두 제자가 당신의 모습을 십자가까지만 봤다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 무덤을 넘어 있는 영원한 하늘 세계를 그들로 하여금 보여주시면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자기들에게 찾아와 동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랬더니 글로바가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과 함께 그들이 그분께 가졌던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25,6절에서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과 더디 믿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까워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고 하시면서 우리들로 그 믿음까지 자라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신 당신에 관한 말씀들을 일러주십니다.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되지요.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한 것입니다. 32절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듣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들을 때에 지혜가 생겨나지요. 들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지혜가 생겨납니다. 들을 때에 영적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통찰력이 생겨납니다.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이점춘 집사님께서 울진으로 한 달 간 일을 가시면서 성경책을 가져가셨다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들었습니다만 우리는 늘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야 합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복 중에서도 큰 복은 바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들 제자들이 부활하신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만 전혀 알지 못했지요. 그런데 당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 말씀 속에서 저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며, 우리의 마음속을 뜨겁게 하시면서 믿음을 더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냥 어떻게 되든 내버려두시는 주님이 아니라 어떻게든 끝까지 챙기시는 사랑의 주님을 우리는 만나볼 수 있지요. 사랑이신 주님께서 저들을 사랑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면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30,31절에서 보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먹을 때에 눈이 떠졌습니다. 우리가 식사 자리에서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지요. “먹고 나니 이제야 누가 누군 줄 알겠네.” 그럽니다. “, 당신이었나.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도 몰랐네. 배가 고플 때는 안 보이더니 먹고 나니 이제서야 보이네.”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시는 자리에서 떡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주석을 찾아보니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떡을 떼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삶에서 보면 오병니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나 최후의 만찬에서도 보면 예수님은 내어주시지요. 나눠주십니다. 사랑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할 때에 어미와 자식이 밥을 먹습니다. 허기지기는 매 한가지입니다만 그런데 어미는 자식에게 당신이 먹을 밥까지 주고 또 줍니다. 사랑인 것이지요.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자식은 자기를 향한 어미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이 주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과 함께 밥상을 함께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삐딱하게 봤던 이들 중에서는 예수님이 아주 식탐이 많은 자로 보기도 했었지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죄인과 세리와 함께 하면서 말입니다.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지요. 밥 한 끼를 서로 간에 한다는 것은 그저 밥을 먹는 것으로 배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친교와 애정을 쌓는 것이지요. 오늘과 내일을 함께 해가는 것으로 꿈과 비전을 공유하면서 삶의 동반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로 심령과 삶이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보다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애정과 친교를 가졌다는 것이요 삶의 동반자로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집사람과 제가 초대가 되어서 한 분을 만나 점심을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한 마디를 합니다. 자기는 교무실을 정말로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저도 싫어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 마디를 합니다. “저는요, ‘자가 들어가는 선생님’ ‘목사님과 같은 분들과 같이 마주 앉아서는 밥을 잘 못 먹습니다.” 그때 제가 근데, 저는요. 그 누구라도 스스럼없이 저와 같이 밥을 먹어주는 사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사람과 사람에게 있어서 차별과 차등이 없어야 하겠지만 예전 세대에도 그랬었고, 지금에 있어서도 사람과 사람으로서 겸상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제가 군에서 사병으로서 장교 식탁에 항상 놓여 있었던 고추장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켜 차별하지 않으셨지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 후에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 한 주전자의 커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한솥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차등과 차별이 없는 한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커피를 많이 마십니다만 우리 한맘교회 성도들의 피는 커피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성찬식을 하게 되겠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주님과 한 몸임을 알게 되지요. 또한 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자매임을 세상 가운데 공표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가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하늘 식탁에 불러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지리도 못나고 못된 나를 내치지 아니하시고 믿음을 가져가게 하시면서 하늘 식탁의 자리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못난이들로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며 위로해주면서 한맘공동체를 이루면서 다시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로 믿음의 눈을 뜨게 된 두 제자가 어떻게 합니까. 엠마오로 향했던 그 발걸음을 곧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33,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아멘.

 

  이로 초대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저들이 모여 성령을 받게 되면서 초대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교회가 오늘 이 한맘교회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 한맘교회를 통해 마지막 종말의 때까지 이 복음은 전수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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