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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고난주일)

2018.03.30 16:11

박정철 조회 수:3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3-2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나 때문에(53:1-6)한맘

 

 

  지난 수요일에는 새벽까지 눈이 내렸습니다. 아침부터는 늦은 오후 시간이 지나서까지 눈비가 섞여서 내렸습니다. 한맘 밴드에 올라온 것처럼 대구에서의 흰 매화와 울산에서의 흰 목련화 위에 피었을 눈꽃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늦은 오후까지 추적거리면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예전 친구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중학교 때였습니다. 그 날도 늦은 오후까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하교를 하게 될 아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는 우산을 챙겨들고서는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에 언덕배기에 있는지라 그 버스에서 내려서는 오르막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는 아들이 있는 교실에까지 왔습니다. 참 대단하지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극진한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실에 찾아든 어머니를 보고서는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날렸습니다. “아이 참. 왜 왔어.” 그랬습니다. “왜 그런 꼴로 왔어.” 그런 것이지요. 자기가 보기에 자기 엄마가 고운 모양도 없었습니다. 풍채도 없었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영락없는 촌 아지매의 모습으로 우비를 쓰고 온 엄마가 친구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엄마는 아들을 끔찍이 여긴 반면에 아들은 엄마를 끔찍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에 엄마가 아들의 이 말을 듣고서는 집으로 곧장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가족들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아마 이 친구는 훨씬 자라서 철이 들었을 것이니 지난 수요일처럼 늦은 오후까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러고 있겠지요. ‘불효자는 웁니다.’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서 부인했던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통곡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결이가 이번에 무릎을 수술 하고서 병원에 있었을 때입니다. 많이 아팠지요. 밤마다 그 아픈 다리로 인해서 만져 달라면서 엄마를 찾았다고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사람이 며칠에 걸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엄마가 밤잠을 설쳐가며 병간호를 해 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지 엄마가 자기 때문에 힘든 것을 잘 생각지를 못합니다. 해 줄 만 하니 해 주는 것으로 여기지요. 오히려 더 잘 해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불평입니다. 해 주고 또 해 주어도 나중에 하는 말이 뭘 해 준 게 있다고?” 그래요.

 자식들은 잘 모르지요. 부모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아요. 잠을 못 자도 괜찮은 줄 알아요. 자기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작 당신들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잘 생각지를 못합니다. 배불러서 안 먹는 줄 알아요. 살 빼려고 안 먹는 줄 압니다. 패션 감각이 뒤떨어져서 옷을 안 사 입는 줄 압니다. 물론 알기는 알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얼마나 큰 사랑이요 은혜였는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 꼭 자기 같은 자식을 낳아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악령이 들어서는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에게 창을 던져서 두 번에 걸쳐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뒤로도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지요.

  그래서는 그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도 죽으라고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지켜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셀라하마느곳 같은 곳에서는 다윗이 곧 잡힐 상황에 처했습니다. 손만 내밀면 곧 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군대를 일으켜서 다윗이 그 곤경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본문을 접하면서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시면서 살려주신 것은 다윗만 살린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살리신 것이었음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계보를 이어 이 땅에 오셔야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내게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지켜주셨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 다윗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나까지 위한 것이었구나!!’

  그 깨달음으로 인해서 온 몸에 전율이 오는 것을 느껴볼 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쓰여진 옛 이야기가 내 이야기를 받아들여졌던 것이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몇 천 년 전의 그 사건이 곧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나를 위한 것이었음이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껴졌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지요. 특별히 우리는 이 주간에 십자가를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듣고 자랐는지 모릅니다. 신앙에 입문하면서도 이 말씀을 자주 듣게 되지요.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 때나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를 거치면서 늦은 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안 울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 오히려 더 크게 울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위기에 휩싸여서 울기는 했지만 이 십자가가 제 가슴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선생님들과 목사님들께서 “2000여 년 전에 있었던 그 십자가 사건이 오늘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실질적으로 마음 깊숙한 곳까지 박히지를 않습니다. 주문처럼 되뇌다 보니 그런 줄 알 뿐이지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잡히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는 이해가 되지요. 지식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이호랑이, 그림의 떡 신앙입니다.

  그런 경험들 때문인지 저는 개인적으로 세례를 강요하는 편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세례를 굳이 안 받겠다는 이들에게는 권면을 할지언정 억지로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강요하다 보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척 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는 척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믿는 척 하는 것이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믿으세요.’ ‘믿어야 합니다.’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으로 믿음을 강요한다고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깨달아지게 하면서 믿어지게 해야지요. 때문에 우리는 한 심령 심령을 대할 때마다 믿음을 가져가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한때 인간의 힘으로 노력하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선한 노력으로 세계를 무한한 발전시켜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그 톨스토이가 살아온 날들이 훨씬 지났지만 오늘날을 보십시오. 여전히 죄악이 창궐하지 않습니까. 그가 살았던 때보다 더하면 더해졌지 덜 해지지는 않습니다. 악한 본성과 죄성을 가진 인생들에게서 선한 것들이 나올 수가 없지요.

  톨스토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애를 쓰고 힘을 썼지만 도저히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봐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답답함을 이기고자 참회록에서 보면 그가 군대에 갔습니다. 전투에 참가해서는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자연스레 술과 도박과 간음과 도적질과 폭행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그런 자기를 보면서 괴롭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이미 러시아의 대문호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상속받은 유산이 많았습니다. 수없이 입금되는 인세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자신이 소유한 수 천 수 만 평의 땅과 300마리의 말이 도대체 자신의 인생에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고 그만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죽음의 문제를 세상의 인문학과 철학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사 고골, 푸시킨,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문호와 어깨를 겨루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예술도 가정도 일시적이라면 사람이란 과연 궁극적으로 무엇을 손에 쥐어야 하는가?

  그렇게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던 그때 그는 농민들의 삶에서 실증되어 나타나고 있는 신앙의 힘을 보면서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본 농민들의 삶에서 신앙이 실제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한 가지 더 알게 되는 것이 있지요. 내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내 살아내는 굵고 선명한 신앙적인 삶이 의심으로 가득 찬 회의론자들에게, 불신으로 가득 찬 무신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길을 열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톨스토이는 농민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달아질 때가 있지요. 깨우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가 있지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봄날에 꽃망울들이 터지듯이 심령에 있어서도 톡 하고 터질 때가 있습니다. 그 꽃망울이 터지는 봄날이 청소년기가 될 수도 있지요. 3,40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50대에 이르러서 터졌습니다. 하나 둘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봇물처럼 감당할 수 없지요.

  이전 정권에서 문화부장관을 엮임 했던 이어령 교수는 늘그막에 터져서 지금 복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 한 편의 강도는 죽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눈이 터지는 그 순간이 어느 때일는지는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롭고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처음에 저와 선을 봤습니다. 그 선 자리에서 저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넌 아니다.’ ‘키 작고 못 생긴 넌 내 타입이 아니다.’ 그러다가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 교제를 하는 중에 어느 순간에 작고 못 생긴 제게 쑥 끌리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난 당신의 기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전혀 아니라고 여겼던 자기가 어느 한 순간에 확하고 끌리는 것을 보니까 당신의 기도에는 효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인간의 만남에서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긴가 민가 합니다. 민숭맨숭 해요. 2,000여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으로만 여겨질 뿐 나와는 상관없는, 나와는 동떨어진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매 성령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면서 믿어지게 될 때에는 그 십자가가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구나!’ ‘웬 말이던가?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날 위한 것이었구나!!’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렀네 /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아멘.

  이렇게 내 눈이 밝아지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 교리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보혈의 사랑으로 다가올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성 프랜시스는 길을 가면서 자주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왜 우느냐?”고 물으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한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고 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부지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서는 효자로 살든 아니면 그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해서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면서 살든 그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분리되지 않고 변함없이 쏟아지고 있듯이 우리 성도들이 온전히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분리되지 않고 변함없이 뿜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했습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덧붙여서 이사야 53장은 바로 우리의 초상화다.’ ‘나의 초상화다

  요새 보면 연한 순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주님의 모습이 갓 나온 순처럼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를 한 번 보십시오. 볼품이 없지요. 이렇게 주님의 모습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습니다. 풍채도 없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신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하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네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일이지요. 다 나 때문에 그렇게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면 그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여러분, 그 자체로서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혼자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상호 의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내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의식주 모든 재화들은 다른 누군가의 눈물과 땀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후에 먹게 될 해초 비빔밥에 냉이 된장국을 보게 되면 내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그물을 던져서 거두어들인 것이 하나도 없지요. 모든 것이 다른 누군가의 노동의 대가로서 주어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 음식들이 우리 입에 들어와 우리 몸의 살과 피가 될 때까지는 숱한 과정을 거칩니다. 제가 쌀을 씻어서 밥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쌀을 푸면서 몇 개의 낟알들을 흘리게 되면 꼭 주워서 담습니다. 누구보다 제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농사꾼의 아들로서 사시사철 한 톨의 쌀이 있기까지 수고하시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낟알 한 알까지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영성 목회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의 책을 읽고 자료를 찾다보니 그 방대한 양 앞에서 세상에나 이런 것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은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술과 문학, 과학 기술 분야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예술가, 문학가, 과학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내놓은 작품과 기술들로 인해서 오늘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나마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그 민주주의를 위해 타는 목마름으로 투쟁을 해 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인권, 자유, 평등, 존엄과 같은 인류의 귀중한 가치들은 수많은 이들의 자기희생 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쟁취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혜택을 후대의 사람들은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분, 개인의 목숨을 부지하고 연명하는 것에서부터 정신적 문화 가치를 향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모든 것들은 보다 철저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보면 그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살아지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00여 년 전, 유일회적인 십자가 사건이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 사건은 단발적으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사에 걸쳐서 영속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내 허물과 죄악을 씻어주시기 위해, 나로 평화와 나음을 얻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찔리셨고 상하셨으며 징계와 채찍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구원의 한 사건이 구원의 강물을 이루면서 흐르고 또 흘러서 오늘 이 자리까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식후에 커피를 마십니다만 르완다 커피가 있습니다. 그 커피를 어머니의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내전으로 인하여 남편을 잃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그 커피를 마시면서 향긋한 풍미와 균형 잡힌 신맛을 맛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 맛과 향을 취하면서 동시에 남편을 잃고 자식을 위해 흘린 어머니의 눈물까지 보는 것이지요.

  십자가로 인해서 누리는 영광과 기쁨과 위안과 평화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지만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 해조차 힘을 잃고 온 누리 비치잖네 / 아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 아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흐르네.’ 아멘.

  그 구원의 강물에서 우리는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넓은 사랑은 우리의 좁은 가슴으로 도저히 담을 수가 없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아니요. 예수님은 내가 짊어질 수 없는 죄와 사망의 짐을 대신해서 짊어지셨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저주의 짐을 지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고통스러운 짐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16세의 아들이 농구를 하던 중에, 자신에게 패스된 공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 하다가 관중석까지 들어가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해서 경기를 뛰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심한 고통을 느껴 병원에 갔으나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의사들이 서둘러 수술에 들어갔지만 아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아들이 살아난다 해도 완전히 회복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수술이 끝났지만 아들의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혼자 아들의 병상을 지키고 있을 때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님을 보자 감정에 복받쳐 울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벌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죽이시는 걸까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말을 이어갑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는 그 아버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두려움과 죄책감과 절망을 몰아내고 믿음과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아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아멘. 여러분, 십자가에 모든 인생의 짐을 맡기시고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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