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6-17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6:9-13)한맘

 

  제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였습니다.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주보에 광고를 이렇게 내셨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이 몇 월 며칠에 신학교를 졸업합니다. 어쩌고저쩌고.’ ‘우리 전도사님이라고 쓰신 것입니다. 그 글귀가 들어간 주보를 어떤 분이 보고는 저에게 그럽니다. “, 목사님이 박 전도사님을 굉장히 아끼고 좋아하시는 가봐.”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하지요. ‘우리라는 말로서 친근감을 나타냅니다. 가끔 도가 지나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원래 울타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식 표현에 우리 남편’ ‘우리 아내과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공동의 소유를 말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남편과 아내라는 것이지요. ‘우리 목사님그러면 제가 여러분들과 울타리에 함께 있는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거지요.

  우리가 서로 서로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정적인지 모릅니다. 저는 종종 우리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깜짝 놀라서 깰 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저에 대한 파악을 다 하셨겠습니다만 제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부족합니다.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사람을 잘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가 편안하고 좋습니다. 제가 처음에 아무도 없는 이 한맘에 왔을 때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제가 혼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제가 여러 가지 기술과 재능 면에 있어서 떨어지는 것이 많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잘 만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엘리너 와일리내 인생과 화해하는 법이라는 책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인 부분을 응원하고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만약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그들은 나의 짐을 함께 져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 하고 말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지혜자가 그러지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9-12)

 

  오늘 설교의 본문을 주기도문으로 잡았습니다. 주기도문 전체 내용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문에 우리라고 하는 단어가 여섯 번에 걸쳐서 쓰여지고 있음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참 대단하지요.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 짧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우리라는 단어를 무려 여섯 번에 걸쳐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지요. 나에게만 한정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나의 것만이 아닌 것처럼 나를 넘어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를 넘어서 우리를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어떤 누구라도 소외시키거나 내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역이나 인종, 성별과 계급의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을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도 그냥 내버려두는 분이 아니시지요. 세리나 창녀나 어린아이 하나라도 그냥 지나쳐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친히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저들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부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 앞에 있었던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먹든 말든, 굶든 말든, 죽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잘 먹는 것, 자기 잘 입는 것, 자기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지요. 자기만 호위호식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그 해에 풍년이 들었을 때에 내뱉는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기에서 보면 주기도문과는 다르게 라는 단어가 여섯 번 쓰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에게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그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이웃은 없고 오직 자기만 있는 생의 결국은 어떠함을 일러주셨습니다.

 

  며칠 전 이른 아침에 텃밭을 돌보면서 풀을 뽑을 때였습니다. 그때 사택 옆 빌라 주인아저씨가 제초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아파트와 빌라 사이에 있는 언덕에서 풀을 베고 있습니다. 제가 인사를 하면서 아니, 왜 그 풀을 아파트 쪽에서 베지 않고 직접 사장님께서 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아파트에서는 안 한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일 년에 두 어 차례에 걸쳐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살도 뺄 겸 해서 서툴지만 저도 이빨이 많이 나간 낫을 들고서는 같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아저씨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매번 지나칠 때마다 하도 표정도 없이 무뚝뚝하게 지나는 통에 혼자서 지레 내가 자기들에게 뭐 잘못한 게 있나?’ 그랬었는데, 그때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제 마음에 , 이웃을 한 명 얻었구나!’ 싶었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서 여러분이 바라보이는 교회 강단 앞에도 싹 치웠습니다. 자리공은 제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보니까 옆집의 주인아저씨께서 베셨습니다. 제가 인사를 드리면서 이렇게 했다.”고 하면서 저기에 있는 대나무 좀 써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쓰고 싶은 것 다 쓰이소.” 그래요.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얻고 이웃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화요일 이른 아침에 빌라 집 주인 아저씨와 함께 제초작업을 하면서 보니까, 아파트 사람들이 내다버린 담배꽁초를 비롯해서 과자 봉지 같은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지저분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가져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 사람들이 우리라는 공간 개념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구나. 자기네의 사적인 공간은 귀하게 여기면서도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그 사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갈수록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여럿이’ ‘더불어’ ‘함께’ ‘같이’ ‘공동체’ ‘이웃과 같은 단어가 갈수록 멀게만 느껴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콩 한쪽도 나눠서 먹을 이웃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그런데 먹을 것은 넘쳐나지만 나눌 이웃이 없다면 그 삶은 어떠할까. 배는 부를 수 있지만 먹는 것으로 그 허전함이 채워질 수 있을까. 입맛은 있겠지만 살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저희 교회당 옆으로 10m도 안 되게 빌라가 있습니다. 사택 옆으로도 그렇지요. 거의 붙어 있습니다. 앞으로는 아파트가 즐비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를 도통 알지 못하겠습니다. 불과 몇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누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인사도 없이 무심히 지나쳐가는 그 순간이 얼마나 어색한지 모르겠습니다. 촌놈으로서 자란 제게 이렇게 살아도 되나싶은 것이 너무 죄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한두 번 그렇게 지나쳐버리게 되니까 그게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서로 간에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니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인사조차도 망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월포에서나 양남에서나 이사할 때에 주변 이웃들이 이런 저런 말들을 건네주었습니다. “서운하다.” “정들라고 하니까 떠나네.” “가서도 잘 살아라.”

그런데 작년에 저희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옆에 사는 목사님네 말고는 그 어떤 누구도 더운데 고생이 많다.”는 말조차도 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예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먹나 굶나, 있나 없나, 살았나 죽었나. 그 어떤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파트 문을 닫아버리면서 세상과 단절시켜버리듯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 문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그 닫힌 현대인들의 마음의 문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열어서 서로 같이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한맘교회가 저들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고서는 위 지방으로 가셔서는 아파트에 사시고 계십니다만 한 번은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는 아파트 섬 같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각자 각자로서 외딴 섬에서 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헤밍웨이가 그런 말을 했던 것처럼 인간은 결코 외로이 떨어진 섬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함께 해야 설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비록 현대인들이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받기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닫아 버린 그 문을 열고서는 찾아 와 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게 사람인 것입니다. 그 굳게 닫힌 문을 우리 교회가 삐거덕 열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네 교회에서 우리 관계는 어떠할까요? 서로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어져 있을까요? 그저께 교회는 관계다라는 책 표지를 봤습니다. 거기에 적힌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진실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에 갈 수는 있어도 진실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진실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 몸뚱이가 교회당에 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교회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좀 전에 말한 그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또 그런 말씀을 전해줍니다. “박 목사님, 내가 은퇴를 하고 나서 보니까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아껴주고 보듬어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없으니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를 위해서 내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내게 있어서 얼마나 큰 행복이요 축복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목회자들 세계에서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를 개에 빗대어 말할 때가 있습니다. ‘개는 멀리 두면 짖고, 가까이 두면 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는 가지도 않고 오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이 저하고는 너무 맞지가 않습니다. 설사 개에게 물려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목회를 해야지요. 그런 목회가 아니면 그것이 어떻게 목회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깊은 신뢰와 신의와 우정과 사랑이 생겨날 수가 있겠습니까. 보고 싶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무슨 기쁨과 보람과 의미가 충족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목회를 하면서 목회를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첫 단독 시무지에 갔을 때에 크지 않은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에서 보냈던 세월이 얼마나 기억에 남는지 모릅니다. 서로들 아끼는 게 없었고 아까운 게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물질과 시간과 몸과 마음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에 있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는 것입니다. 진성으로 음을 낸다고 하지요. 진성으로 만남을 가졌으니 지금도 그때 그 사람들이 잊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만나면 그때의 그 감정으로 만나지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이 교회의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만 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더 잘 세워나갈 수 있을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많이 부족한 것 아시지요. 제 힘으로는 되지 않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교회가 교회로서 세워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하루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생각이 났는지 모릅니다. 순진하고 순수하고 어쩌면 어리석은 바보 같고, 계산에 빠르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좋고 사람이 좋고, 뒷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웃고 떠들고 말할 수 있으며, 말없이 안아주고 울어주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는 함께 멀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내딛는 열 발자국보다 열 사람이 내딛는 한 발자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디 가도 언제까지나 하나님 먼저 사람 먼저 생각하는 우리 한맘 가족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스파르타에서 나온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파르타의 왕이 자기 나라를 방문한 이웃 나라 군주에게 스파르타의 성벽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군주가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성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가 그가 스파르타 왕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성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때 스파르타 왕은 자기의 훌륭한 군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이 국가의 성벽이며, 모든 사람들은 이 성벽을 이루는 벽돌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교회를 두고 친정집 같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친정집처럼 편하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저것 싸주시고 챙겨주시는 것이 친정집을 다녀온 것 같은 것이지요. 주일 오후에 여러분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 나가시면 제 기운이 쑥 빠져나간 것 같아서 허전함이 아주 크게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친정 부모님의 마음을 이 자리에서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을 저만 가지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하겠습니다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만나게 해 주신 우리가 서로 서로 더 아껴주고 배려해주면서 사는 맛을 알아가고 신앙생활을 멋을 누려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너희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 가운데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아 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한 번 우리 교회에 오신 설경구 김대환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집사님의 노모를 휠체어에 모시고 교회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엘리베이트를 탈 때 보면 정말 여기가 교회가 맞는가?’ 싶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예배 때에 강단에서 외쳐지는 사랑의 말씀에는 여기저기에서 아멘으로 응답했던 교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휠체어를 탄 늙은이에게는 전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자기들은 제일 뒤로 밀려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서는 주차 문제로 그렇게 시비가 많이 붙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는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찾아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혀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넘쳐나고 있지만 행함과 진실함이 곁들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몸뚱이는 교회당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진실한 교회에 속해있지는 못한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서로들 다 다릅니다. 서로가 똑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저는 너무나 다릅니다. 제가 집사람과 2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살면서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집사람과 제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살았으면 같아질 만도 한데 전혀 그러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쌍둥이도 다릅니다. 에서와 야곱처럼 다릅니다. 아버지 이삭이 좋아했던 에서와 어머니 리브가가 좋아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서로 너무나 달랐던 쌍둥이였지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 화해하게 되고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스러움에 대한 관점과 잣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구분되는 정치색도 다를 수 있어요. 이번에 선거를 할 때에 보니까 제 주위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대한애국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정의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정치색이 다를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용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받아들여졌듯이 나와 다른 어떤 이들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획일적인 전체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큰 틀에서 하나를 이뤄가야만 합니다. 모르는 것은 알아가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나눠주면서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여러분,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자리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흩어지는 교회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있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모이는 교회에서 좋은 것처럼 우리가 있는 모든 자리 역시 좋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자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삼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천호동에 천호동 교회가 있습니다. 홍등가에 위치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기장에 혼순원 목사님이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다 보면 옷을 다 벗고 있는 여자들을 볼 때가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기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이 홍목사님이 그 아침에 밤새 퍼질러 놓은 오물과 쓰레기를 다 치운다고 합니다. 토해 놓은 것까지도 말입니다. 교회가 그들의 이웃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 친구 목사님이 그 분을 가리켜서 참 성자다그럽니다.

  경주 충효동에는 한맘교회가 있습니다. 대구, 울산, 경주, 양남에는 한맘교회에 다니는 흩어지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모두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이웃을 만나가고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이웃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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