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5-06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누가 크냐?(9:33-37)

 

 

  제가 있었던 어느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두 분의 장로님이 중직자 선거에서 피택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젊으신 분의 표가 다수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주보에 섬기시는 분들란에 젊은 장로님의 이름이 담임목사 이름 밑에 써지고, 그 밑에 나이가 많으신 분의 이름이 써졌습니다.

  그러면 보통 ,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칠 수 있는데, 문제는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의 눈에는 아주 거슬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는 계속 이 부분에 대한 제기를 합니다. “그래도 내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 이름이 위에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젊으신 장로님은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엄연히 내가 표가 많이 나왔으니 내 이름이 우위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결국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내놓은 해결책이 1년씩 번갈아 가면서 그 순서를 바꾸어서 올렸다고 합니다.

  참 복잡하지요. 그게 뭐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이 복잡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은 것이지요.

  오늘날 예전 세대보다 더 많이 힘들어지고 불평과 불만이 많아지는 것은 이기적인 내 본위의 삶에 매여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내 자신에게 너무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내가 최고여야 하고, 내가 전부여야 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결국은 나를 병들게 하고 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은 복잡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집에 계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지요.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제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합니다. 왜요?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로들 자기가 크다고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그게 사실 부끄러웠던 것이지요.

  나서기를 좋아했던 베드로가 그랬겠지요. 콧노래를 부르면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마태...' “우리들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그 이름이 제일 먼저 불려지고 있는 이가 누구냐? 바로 나, 아니야?” 안드레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베드로, 당신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내가 예수님의 첫 제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거야.”

  열심 당원이었던 셀롯인 시몬이 있었지요. 그 열심 당원들은 자기 민족을 지배하고 있었던 점령군 로마 사람들을 만나면 죽이고자 가슴 속에 칼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그런 자였으니 자기 가슴 속에 숨겨두었을 번뜩이는 칼날을 쓱 꺼내들면서는 나한데 함부로 했다가는 그 누구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어.” 암시를 주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야고보 요한 형제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돈궤를 맡았던 가룟 유다는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재정은 아무나 맡는 게 아니야. 똑똑해야지 암.”

  이렇게들 서로가 자기가 크다면서 별의 별 말들을 뱉어냈을 것입니다. 우리들 같았으면요. 그럴 리 없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그래도 목사인데.’ ‘내가 그래도 개국 공신인데.’ ‘개척 공신인데.’ ‘내가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헌금을 제일 많이 내는데’ ‘내가 제일 많이 봉사하고 섬기고 있는데.’

 

  손가락 다섯이 누가 크냐?’면서 서로 다툽니다. 엄지가 엄지 척을 하면서 아무렴. 내가 최고지그럽니다. 그러자 검지가 좌우로 흔들면서 , 아니야.’ 그리고는 자기를 가리키면서 나야 나.’ 이에 가운데 손가락 중지가 아주 쌍욕을 하면서는 한 마디를 합니다. “다들 내 밑으로 줄 서 봐. 누가 제일 크냐?”

  넷째 손가락 약지가 반지를 낀 자기 손가락을 딱 내밀면서 현모씨에게 한 번 말해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민지씨,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하겠습니다.” 이 귀한 반지를 낄 수 있는 자기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소지 새끼손가락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합니다. “, 너네들. 그래도 나 없으면 너희들 다 병신이야. 새끼들.”

  서로가 힘을 합해서 선을 이루어가야 할 손가락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누가 크고 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유용하지요. 그런데도 서로가 자기만이 크고 첫째라고 우겨대고 싸움을 벌였다면 예수님 물음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처럼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결혼을 하고 나면 부부가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합니다. ‘초장부터 잡아야 된다.’면서 기 싸움을 벌입니다. ‘초장에 밀리면 평생 후회한다.’ 그러면 사사건건 시비가 붙을 수밖에 없지요. 둘 다 물러나지 않으니 아주 불꽃이 튀게 됩니다. 성별이 다른 이들로서 서로 살아온 모든 배경이 다를진대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한다면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내년이면 결혼 20주년이 됩니다만 지금도 이 주도권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 역시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아내가 토를 달고 반기를 들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티격태격 할 때 아이들이 엄마 편을 드는 때면 저는 아주 미쳐 버립니다. 밥도 안 먹고 그냥 바깥으로 나와서는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나는 이 집에서 도대체 뭔가?’

  예전에 최현주 집사님께서 해 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자기네는 이런 주도권 싸움을 하지 않기로 점춘씨와 분명히 했다.”는 것이지요. 괜한 주도권 싸움을 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방법이지요.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져주려는 것이지요. 이 전쟁만 안 벌여도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가정이 편하지요.

  이 주도권 전쟁이 오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잘 종결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앞당겨져야만 하듯이 우리 가정에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평화가 깃들 수 있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아멘. 이제 서로 사랑함으로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꾸린 현모, 민지씨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네 모든 가정이 봄날의 꽃밭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누가 크냐?’로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묻고 계시지요. “너희들 중에 누가 크냐?”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커야지요. 우리네 인격과 품격이 커져야지요. 나이가 들어서도 좁쌀영감 늙은 애처럼 되어서는 안 되지요. 벤뎅이 속알딱지처럼 꽁하고 있어서는 안 되지요. 다른 이들과 경쟁을 해서 뒤처지지 않고 앞서갈 수 있어야지요. 밑바닥이 아니라 우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크고 첫째냐?’라고 물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크고 첫째가 되는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처럼 해야지만 크고 첫째 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세상에서의 방법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끝이 되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이 되어야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끝에 있다고 끄트러미가 아니라 끝에 있을 때에 크고 첫째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을 적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그 분들을 보면서 가졌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담임목사인 내 이름을 제일 밑에다가 쓰면 되지.’ 그렇게 하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 이름이 제일 큰 글씨로 제일 우위에 써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밑에 쓰게 되니까 문제될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밑에 있음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네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처럼 되라고 했던 악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던 첫 사람 아담처럼 자꾸 높아지려고 합니다. 물질적 욕심은 그나마 덜 낼 수는 있어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높아지려고 하는 명예와 영예는 우리 속에서 끓어서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뽑고 또 뽑아도 계속해서 올라오는 잡초처럼 이런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역시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든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계속해서 쳐서 깨뜨려야 합니다. 이 죄악된 본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낮아지심에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높아지려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만 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오신 그곳이 왕궁이 아니라 더 낮아질 수도 없는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이었습니다. 그 말 마구간에 오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백마가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아담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그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높여주시는 것이지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서 높여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름이 뛰어난 이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이름 앞에도 무릎을 꿇는 자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로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낮아진 우리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귀한 생애가 있어지길 원합니다.

 

 

  제가 첫 단독 목회지로 어촌 마을에 갔을 때입니다. 가서 보니까, 교인 수도 별로 없었지만 거의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때 제 속에서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교만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내가 여기에서 최고구나.’ ‘제일로 젊지.’ ‘제일 많이 배웠지.’ ‘나 같은 사람이 여기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에게는 큰 복인 줄 알아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굳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다른 어떤 누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얼마나 괘씸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갈 때가 없어서 여기 있는 줄 아나.’

  그런데 여러분, 좀 지나서 보니까 저의 이런 못된 악하고 교만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허황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분들은 연세가 드셨지만 그 분들이 내뿜는 기도 소리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제가 도저히 따라 붙일 수가 없습니다. 조족지혈, 새 발의 피도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삼전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목소리도 크지 않고 조용조용합니다. 덩치도 크지 않습니다. 걸음도 빠르지 않습니다. 재산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뿜어내는 신앙의 아우라는 가히 놀랍습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이 권사님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서로들 찾아가서 너무 좋았다면서 인사를 합니다. 왁자지껄, 주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도 그 권사님에게 가면 해결이 됩니다. 서로 다투고 갈등하는 문제들도 그 권사님에게서 해결을 받습니다 .모두들 그 권사님 앞에 서면 다들 작아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될지를 알지 못하는 새신자들이 오면 그분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말도 많지가 않습니다. 말도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많은 이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믿음을 가집니다.

  제가 참 많은 것을 그 권사님에게 배웠습니다. 철부지 젊은 목회자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늘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저의 나중 모습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문제들도 제게 오면 아주 작아져버리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안 될 일처럼 보이는 일들도 아주 잘 되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준비해 간 설교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장례식을 치룬 저였지만 잊히지 않는 장례식입니다. 지금도 그 권사님의 가르침은 제가 남아 있습니다. ‘김삼전이라는 이름은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떤 삶이어야 남들이 기억하는 큰 사람인지를 그 분께서는 죽으셨지만 신앙의 본으로서 지금도 살아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2:16)고 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낮게가 아니라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될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큰 자가 되고 첫째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크고 첫째 되는 비결을 일러주십니다. 바로 섬김이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세상은 섬김을 받는 자가 크다고 일컫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를 첫째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래서 남들을 어떻게든 자기 밑에 두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크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밑과 끝에 서는 자가 첫째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 방법이 너무 달라요.

  제가 군대를 25살에 갔습니다. 신병교육대에 들어갔더니 제 주위로 형님으로 따르는 동생들이 몇 명 모여듭니다. 하루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구에 사는 한 동생이 오더니 제게 그럽니다. “행님, 제가 여기 한 번 잡아 볼까요.” 나이가 많은 저를 두고서는 자기가 힘을 한 번 과시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지 마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이 동생은 참 착해요. 점오준비를 할 때면 신교대 내무반이 참으로 큰데도 불구하고  그 긴 침상을 걸레로 얼마나 깨끗하게 닦는지 몰라요. ‘도남호이름까지 생각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묻겠지요. ‘누가 크냐?’ ‘행님, 행님하면서 한 번 잡아보려고 하는 녀석과 묵묵히 침상을 닦았던 그를 두고서 주님께서는 누가 크냐?’고 묻습니다. 손으로 주먹을 쓰려는 녀석이 큽니까. 손으로 걸레를 잡았던 녀석이 큽니까.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제일 크고 첫째가는 인물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뽑아준 국민들을 섬기지 못하는 대통령이라고 한다면 큰 인물이 되지를 못합니다. 잘못하면 큰 집에 가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한 때 우리 국민을 두고서 공무원들이 했던 말들로 인해서 물의가 일었었지요. ‘민중은 개 돼지다.’ 그랬습니다. 또 다른 공무원은 국민들을 두고서 들쥐처럼 하는 것이 마치 설치류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 같은 사람은 개나 돼지, 들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을 가지고 받아 일하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감히 이런 말들이 걸러지지 않고 나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자기들과는 상종할 수 없는 같잖은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기업의 총수라 하더라도 직원들과 고객들을 무시하고 갑질을 일삼는다면 크고 첫째 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큰 교회에서 시무한다고 해서 큰 목사입니까. 물질이 많아서 큽니까. 나이가 많다고 해서 큽니까. 어른이라고 큽니까. 키가 크다고 큽니까.

  비록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서 쫓기는 신세였지만 그러나 쫓는 사울보다 쫓기는 다윗이 더 큰 자였지 않습니까. 비록 종살이와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요셉이었지만 그는 그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다른 이들을 섬겼습니다. 그럴 때 그는 그가 있는 자리들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자리는 다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누가 크냐?’면서 쟁론했었던 제자들 가운데로 어린 아이를 하나를 데려다가는 세우시고는 안아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했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영적인 큰 소원이 있지요. 하나님을 영접하고픈 너무나 큰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방법이 바로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통의 많은 신앙인들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시도를 재차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일상적인 삶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방법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 아이는 너무나 작지요. 작아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작아서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 어린 아이는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밀치면 밀려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 크냐면서 쟁론을 일삼았던 제자들 가운데에 세워주시지요. 안아주시지요. 너무나 크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연약하고 작은 자를 세우시고는 안아주시면서 그들을 한 인격체로 인정해 주신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을 향해서 한 것이 바로 당신께 하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이 어린 아이처럼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객체가 되어서는 볼품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변인으로 밀려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께서는 온전히 세워주시지요. 안아주십니다. 당신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갈 것을 친히 본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들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누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격체가 됨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주시지요.

 

 

  ‘누가 크냐?’ ‘누가 큰 사람입니까?’ ‘태산은 한 줌의 흙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 높이를 이룰 수 있었고, 바다는 작은 실개천의 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 깊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새 남북정상회담이 주요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만 통일의 선구자라 불렸던 문익환 목사님이 계셨지요. 그 분은 반공이 국시였던 그 시대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민족과 겨레를 당신 품에 안고자 북한으로 가서는 김일성 주석을 두 팔을 벌려서 안았지요. 그래서는 갖은 옥고를 치루기도 하셨지요.

한 번은 문익환 목사님이 교회에서 강연을 하시고서는 나가실 때에 제 동기생 여자 누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감히 앞에 나서서 인사하지 못하고 사람들 틈에 끼여서는 뒤편에 있으면서 삭개오처럼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목사님이 사람들 틈에 있는 자기를 보더니 눈길을 맞추고 손을 내밀어서는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 역시 큰 목사님은 다르시구나!’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구나!’

  한 초신자가 한 번은 그럽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하실 일이 많으신데, 나 같은 초신자의 기도까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크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작은 기도까지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 전 찬양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누가 크냐?’ ‘누가 첫째냐?’ 작고 힘없는 어린 아이 하나까지 돌아보는 사람, 쫓겨나고 밀려난 사람들까지도 챙기면서 섬겨주는 사람. 여러분과 제가 큰 자가 되고,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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