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4-12 09: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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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4-14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다 이루신 예수님(15:33-41)한맘
 

  온 산하가 꽃 축제 중입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열광하면서 환호성을 터트리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들은 그 언제 적부터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말입니다.
  한 때 저는 사순절에 피어나는 꽃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순절에 꽃이라니.’랄까.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사순절에 꽃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피어나는 꽃들보다는 그 꽃들이 진 자리에 파릇하게 올라오는 새 순을 더 애타게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꽃이 지기를 바랐던 모습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숫자 ‘4’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자를 죽을 ()’자로 연관 짓다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자동차 번호를 받는데, 4자가 있으니 담당자가 묻습니다. “4자가 있어도 괜찮습니까.” “. 괜찮습니다.” 사순절의 자도 그렇게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사순절의 ()’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이 사순절이 짓누르는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절기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짓눌림이 있었습니다.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꽃을 봐도 크게 환호하지 못했습니다. 웃을 일이 있어도 마음껏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밥을 배부르게 먹어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고난주간 때에 봄 심방을 하면서 거나하게 생선회를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얼마나 죄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내가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렇게 이 절기를 보내는 동안 제 스스로는 유쾌할 수도 없었습니다. 속히 이 절기가 지나가길 바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올해도 사순절을 보내는 중에 이제 고난주일과 함께 고난주간을 맞습니다. 늘 그래 왔었기에 지금에 있어서도 그 짓눌림은 쉬이 덜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는 뭔가 하나라도 해야 그나마 편안해질 것 같습니다. 내 자신에게 무슨 육체적인 고통이라도 가해야만 그 짓눌림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이런 제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뭔가를 해야지만 이 절기를 보내는 의미가 찾아지고 부여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십자가 사역에 내가 뭘 보태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속에 나의 의를 보태려는 어리석음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완벽한 구원에 떡고물을 무치려는 속셈이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 완전한 은혜에 재를 뿌리려고 하고 초를 치고자 하는 못된 자아가 살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순절을 힘들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귀한 사순절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던 것이지요. 십자가에서 피어나는 은혜의 꽃이 너무나도 휘황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속살 없는 율법주의의 껍데기 속에 숨어들어서는 썩은 냄새를 풍겨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나 구석구석마다 피어나는 좋은 봄꽃이 굳이 마다하면서 말입니다.

  초대 기독교에서 보면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 행위로 얻은 구원을 전했습니다. 십자가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기게 했던 것이지요. 바울이 이에 대해서 얼마나 경계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의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할례를 비롯해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어떤 의로운 행위가 곁들여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십자가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차려놓으신 구원의 식탁에 숟가락이라도 얹으려고 합니다. 내가 숟가락이라도 얹었으니 밥 먹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함으로 내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많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율법주의가 이래서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 되지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썩는 곳에 가장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한 편의 강도를 마지막 순간에 구원해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강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멘.
  어머니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에 자식들이 숟가락이라도 올려놓는 것은 새벽부터 자기들을 위해서 애써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하는 것이지 숟가락이라도 얹었으니 밥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을 득했다는 것이 아니지요. 저녁 늦게까지 일하시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손에 들린 삽자루를 들어드리는 것은 자기들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시는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발로여만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지요. 그 뜻은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말소했다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로, 상인들이 대금을 지불할 때 청구서에 기록했던 단어입니다. 완불했다는 것이지요. 남은 잔금이 없습니다. 남은 게 일원이나 일전도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지불하셨다는 말입니다. 다 이루어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주님 앞에서 그 어떤 행위가 자랑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어떠한 공로나 업적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없습니다. 내 어떤 것이라도 기쁨과 만족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저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에 봄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하듯이 절망과 멸망의 십자가 형틀에서 희망과 생명의 꽃을 피어내신 주님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감격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진 죄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 값이 지불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못 삽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지요. 힘들어서 살 수가 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빚 독촉에 끝없이 시달리면서 피해 다닐 수밖에 없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제가 중학교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해가 져서는 저녁 어스름한 시간이 막 지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대문 바깥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저와 어머니가 방안에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그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좀 있다 문 열어라.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해라.” 하시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가 숨으십니다.
  그래서는 제가 뜸을 들이다가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그 사람이 아무도 안 계시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면 다음에 오겠다고 전해라.” 하고는 갔습니다. 알고 보니 저보다 여섯 살 많으신 형님이 친구들과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서는 그 음식값을 외상으로 달아놓은 것입니다. 그 외상값을 받으러 찾아온 모양인데, 어머니께서 당장 갚을 수가 없으셔서 피해 숨어버리신 것입니다.
  농촌 살림살이다 보니 돈이 궁했을 것입니다만 그래도 그것을 보면서 집안 꼴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비참하지요. 어머니께서 불쌍해 보였습니다.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제 성격상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람들 앞에 서게 해야지, 사람들을 피해 다니게 하지는 말아야겠다. 뒤에다 숨어 있게 하지는 않겠다.’
  얼마 되지도 않았을 외상값만 지고 있어도 사람이 사는 꼴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못 받은 돈, 받아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플래카드에 써놓고서는 영업을 하는 어깨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굴에 칼자국과 온 몸에 문신 자국이 그려져 있는 어깨들이 찾아와서는 빚 독촉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갚을 때까지 행패와 횡포를 부린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요.
  어릴 때 초등학교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 오빠가 사업 자금을 어디에서 끌어다가 쓴 모양입니다. 그 친구도 오빠 일이다 보니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어떻게 하다가 연루가 된 모양입니다. 나중에는 그 친구가 그 자금 압박을 받으면서 결국은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지요.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에게 죄값을 요구합니다. 빚 독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죄에 매여 종노릇할 수밖에 없지요.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공포와 같은 것들과 한 평생 같이 지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령과 삶이 쪼그려질대로 쪼그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영원한 형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찾아오셨지요. 그 빚을 지고 억울하고 원통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지요. 죄의 값을 지불하지 못해 죽게 된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친히 이 땅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그 빚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한때 제 친구도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먹었던 외상값을 갚지 못해 주인아저씨를 피해 뒷골목으로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께서 아시고 그 외상값을 갚아주셨어요. 이와 동시에 그 친구가 온 동네를 활보하면서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네 죄값을 갚아주심으로 이제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마귀의 종노릇에서 주님 안에서 왕노릇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초조로 벽과 담을 높이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불안과 초조와는 담을 쌓고 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죽음 앞에 멈춰선 자들이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선 자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인 것이지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죽음을 삼켜버리신 것입니다.

 
  어느 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중에 마귀가 많은 글자가 쓰여 있는 큰 종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가 물었습니다. “이게 뭐냐?” 그랬더니 네가 범한 죄의 기록이다.” 루터가 그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을 자세히 읽어 보니, 과연 그가 잊고 있었던 모든 죄들이 사실대로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이에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했습니다.
  루터가 마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이게 다냐?” “아니다. 또 있다.”라고 합니다. 마귀는 두루마리 몇 뭉치를 가져와서 루터가 범한 많은 죄들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죄악을 저지른 너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참소합니다. 대적합니다. 그를 약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자 함이었지요.
  루터가 그 두루마리를 다 본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또 있냐?” “또 한 뭉치 있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뭉치를 가져와서 읽어본 후에 루터는 수긍하며 말합니다. “맞다. 이것이 내가 범한 죄들이다. 또 없냐? 다 가져와라.” “이게 전부다.” 그때 루터는 서실로 들어가더니, 모든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붓에 붉은색 잉크를 찍어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를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12:11). 그러자 마귀는 즉시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지난 주간에 우리 아이들 생일이 있었습니다. 19년 전에 아내가 삐쩍 마른 뱃속에 두 놈을 넣고 있었는지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입덧이 심해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배가 불러오면서는 누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거의 비스듬히 기대어서 자야만 했습니다. 양수도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일찍 새벽에 터졌습니다. 9개월 만에 태어난 만삭되지 못한 아들들입니다.
  그 임신 기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해산의 고통도 말할 수 없었지요. 만약 아내가 제왕절개가 아니라 자연분만을 통해서 아이들을 낳을 때 제가 옆에 있었더라면 제 머리털은 다 뽑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명체는 탄생이 됩니다. 산모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피를 쏟아내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지만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해서 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고난의 산물입니다. 어머니의 피 흘림을 통해서 제가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들 나셨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어머니는 죽을 고통을 참아내신 것이지요. 그것을 안다면 그 누구라도 은혜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그렇습니다만 영적인 생명을 탄생시시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해산의 고통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오고 가는 이 땅의 뭇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찢으셔야만 했던 당신의 몸과 그 몸에서 흘러나온 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께 버려지는 듯했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고통과 고난의 산물이지요.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 속에 여러분과 제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그러니 당신의 피 흘림을 통해 태어난 생명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당신의 죽음과 맞바꾼 생명체들이니 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면서 해산한 우리들이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서재에 있다가 저녁밥을 먹기 위해 집에 갔더니 아내가 소고기로 양념을 무치고 있습니다. “, 나 먹으라고 하는 거야.” 그랬더니 뭔 소리. 꿈도 야무지다.” 그래요. 남편인 저는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소고기가 먹고 싶으면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께 가야겠지요.
  농사꾼들이 농작물을 가리켜서 내 자식들 같다.”고 합니다. 수고와 정성, 눈물과 땀이 거기에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텃밭이지만 제 나름대로 수고하면서 애써보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귀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힘껏 땀 흘리면서 거두어들인 것들이 다 귀해요. 시금치 한 잎, 상추 한 잎이 귀합니다. 작은 고추 하나 남겨두지 못하겠습니다. 거름이 되라고 묻어둔 음식물 찌꺼기도 귀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는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있어서는 너무나 귀합니다.
  그저께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중에 그러십니다. “한 번 안 오느냐. 돼지감자 많이 말려 놓았다.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요새 저의 어머니께서 저를 고향에 부르는 방법을 터득하신 모양입니다. ‘돼지감자, 말려 놓았다.’ 그러니 제가 멧돼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확 당깁니다.

  예전에는 돼지감자라고 하면서 주시면, 주시는 것이니 안 받을 수 없어서 받아놓기는 했습니다만 몇 번 먹고서는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돼지감자가 돼지고기 못지않게 좋습니다. 많이 말려놓으셨다니 가지고 오면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받아서는 안 드실 것 같으면 안 가져가셔도 됩니다. 다 드셔서 더 드시고 싶으면 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손때가 묻은 것들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어릴 때 부모님께서 벼농사를 지어서는 타작을 합니다. 그리고는 길거리 시멘트 바닥에 나락을 말려요. 며칠 말렸다가는 부대에 담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면 낟알 하나 안 놔두시고 다 쓸어 담으십니다. 해는 져서 벌써 어둡고, 늦가을 찬바람이 불어 춥고, 배는 고픈데도 그 시간까지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 낟알 몇 개 있고 없고가 무슨 큰 차이가 있냐.”, “내가 한 숟가락 안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고 보채도 부모님들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다 쓸어 담으세요.
  이게 농부의 마음이지요. 이른 봄부터 늦가을 추수 때까지 애쓰고 수고하면서 거두어들인 것들에 대해서 감히 소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남겨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버려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쏟은 수고와 정성이 그 낟알 하나하나에 다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으시지요. 당신에게 있어 우리가 어떤 존재인데,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떡이신 그 몸을 찢어 우리에게 먹이시고, 생명수이신 그 피를 우리로 마시게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지요.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줄이 얼마나 질긴지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잖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라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아멘.
 
  농부가 낟알 한 알까지 버려두지 않고 쓸어 담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거두어들이십니다. 길을 잃어 헤매는 한 마리 양을 그냥 두시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그 아흔 아홉 마리가 넉넉지 않은가 / 저 목자 힘써 하는 말 그 양도 사랑해 / 그 길이 멀고 험해도 / 그 양을 찾을 것이라 그 양을 찾을 것이라’ ‘산길에 흘린 피 흔적 그 누가 흘렸나 /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저 목자 흘렸네 / 손발은 어찌 상했나 / 가시에 찔리셨도다 가시에 찔리셨도다
  그 양을 찾아서는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시면서 그 벗과 이웃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주님께서는 그 양을 찾으시고는 기뻐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잔치를 열만큼 기뻐하십니다. 그 한 마리 양이 바로 저인 것이지요.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이 되시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아멘.
  죄인인 인간이 이제까지는 감히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씻겨짐으로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이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하 인간에 오직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아멘.

 
  서 너 번에 걸쳐서 지금 표고버섯 종균을 넣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베어놓았던 참나무에다가 드릴로 구멍을 내고서는 종균을 심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가 생각이 났습니다. 참나무에 구멍을 뚫어서는 종균을 넣으면 때가 되면 버섯이 자라나게 됩니다. 참나무의 영양을 받아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 버섯을 먹을 때마다 자기 몸에 구멍이 뚫리고 영양가를 다 내어준 참나무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인생을 이렇게까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내가 영원히 아버지 집에 살 수 있다는 것, 바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때문인 줄 알아, 주어진 모든 날들에서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나답게 2019-04-14 오후 18:56

아멘~ 목사님, 오랫만에 들어와 은혜받고 갑니다.~^^ 평안하시길~

박정철 2019-04-18 오전 11:35

최목사님.. 반갑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면 여간만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다 손에 잡히는 작은 문구에도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 마음입니다. 늘 최목사님답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보기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8 보여지는 부활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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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늘 문 자리
25 봄이 와 있습니다
24 가위손 하나님
23 2019년도 한맘녀
22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21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19 쉼이 있는 터
18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7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16 시가 흐르는 시월
15 이 사람도
14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13 잘 사는 삶
12 평화와 번영의 길
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0 먹든지 마시든지
9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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