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20-07-0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그저 감사한 것밖에 없습니다(16:9-12)한맘탁에 음식을 앞에 두고 눈을 감으면 절로 나오는 노래 기도가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예솔이는 ·그러는지 몰라요. ‘하나님 탱큐요새 제가 밥맛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나보다 잘 먹는 사람이 한맘 식구들 빼고 더 있을까.’ 싶습니다. 밥이 꿀떡 같습니다. 꿀떡 꿀떡 넘어갑니다. 밥 잘 먹는 것도 은혜입니다. 밥맛이 좋은 것도 은혜입니다. 같이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게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먹는 것에 한해서만큼은 여러분들도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지요. 아니 은혜가 넘치시지요.  
 요새 햇감자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흙 속에서 감자를 찾아 소쿠리에 담듯이 우리네 삶 속에 있는 감사를 잘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 십계명이 있습니다. 첫째, 생각이 곧 감사다.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바다도 작은 물방울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셋째, 자신에게 감사하라.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높은 산과 태양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넷째, 일상을 감사하라. 그렇습니다. 일상에 감사하게 되면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 문제를 감사하라.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도 있게 마련이다. 여섯째, 더불어 감사하라. 장작도 함께 쌓여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일곱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라. 문제 앞에서 드리는 감사가 아름답다. 여덟째, 잠들기 전 시간에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증과 걱정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아홉째,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에는 메아리 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이루어진다. 열 번째, 모든 것에 감사하라.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그저 감사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바람이 불어서는 그나마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 바람이 집안으로까지 불어 들어서는 아이들 방의 커튼이 펄럭거리면서 휘날립니다. 그 커튼을 보고서는 아내가 한결이에게 한 마디를 합니다. “너희들 어릴 때 기억 안 나니? 커튼이 날릴 때면 좋다고 뛰어다니면서 숨었다가 튀어나오고 그랬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입니다. “, 너 혼자 큰 줄 알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렸었던 그 날들에 있어서 보살피던 손길들이 없고서야 어떻게 네가 자라날 수 있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내가 던진 그 말을 같이 듣고 보니 제게도 은혜가 됩니다. 저 역시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손길 없이 제가 이렇게 커서 자라났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알뜰히 살피시고 살뜰히 챙겨주신 은혜가 아니고서야 제가 있어질 리 만무합니다. 태어남에서 자라서는 오늘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돕는 손길을 통해서 우리는 저마다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이 은혜를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을지언정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지요. 은혜가 모든 것을 있게 하는 힘입니다.

  이를 알아 시편 121편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내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가 밭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가 가족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가 교회를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가 이웃을 향해 눈을 들리라.’ 그러면 하늘과 밭과 가족과 교회와 이웃들 가운데에서 도우셨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한맘 텃밭에 많은 작물들이 앞을 다투어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씨를 주관해 주셨기에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텃밭에서 잘 자라주고 있는 옥수수를 쪄먹으면서 여름을 즐겨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들빼기로 김치를 담아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호박잎을 쪄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햇빛과 바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허락해 주셨기에 자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버섯 자라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버섯이 지금 하나도 자라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텃밭에 네 포기의 오이들도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 커가는 오이들을 보면서 예전에 교회학교에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나서 나지막하게 불러봅니다. ‘오이 밭에 오이가 길쭉길쭉 / 길쭉길쭉 컸구나 잘도 컸구나 / 저 혼자서 컸을까 아니 아니야 / 정말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야 / 위에 계신 하나님이 키워주셨지.’

  그랬더니 뒤편에 있는 수박도 한 번 불러달라는 것 같습니다. ‘수박 밭에 수박이 둥글둥글 / 둥글둥글 컸구나 잘도 컸구나그 부르는 소리에 까마귀도 웃긴지 깍깍거립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지요. 성경에 나오는 표현처럼 우는 까마귀 새끼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까마귀를 통해서도 우리를 먹여주시니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 여러분,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 원망과 불평으로 받으면 온통 버릴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버려지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버려지지 않는 소중한 인생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로 충만한 모습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고마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인생들이 온전한 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고귀한 가치들이 그 삶에 자리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감사와 찬양이 있을 리 없고, 존중과 겸손, 충성과 섬김이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삶에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신명나는 노래와 춤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적어 놓은 글이 눈에 띕니다. ‘남을 욕하는 손가락에 대하여라는 제목에 달린 내용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 않을 때는 보행자였으므로 자동차를 매도하고, 자동차를 몰고 다닐 때는 운전자였으므로 보행자를 매도하고, 자동차가 늘어나서 길이 막히는 홍수일 때는 길이 뚫리지 않으므로 신호등을 매도하고. 모든 날 모든 때 모든 것을 매도하면서 내게는 성한 곳이 없었다.’ 탓하기에 빠른 인생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생은 늘 짜증이요 신경질이요 불평입니다.

  제가 저를 보면서 드는 두 가지 나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내가 원하는 곳에 있지 아니하고, 왜 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에 대한 원망과 사람에 대한 실망이 그림자처럼 저를 뒤따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성한 곳이 없는 모습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불평하면서 내 자신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하면서 제 자신이 꺾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나쁜 생각들을 떨쳐 내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이런 생각들이 내게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미국 청교도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남들이 보는 동일한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랬습니다. 삶에 쓰인 지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지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좋은 해석을 내렸던 요셉의 모습일 수 있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지요. 환경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원망과 실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는 것이지요.

  자동차 사고를 겪으면서 온 몸에 3도 화상을 입은 이지선씨가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에서 그녀가 쏟아내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이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손톱 하나하나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게 되었다. 속눈썹이 없어지고 나니 이마에서 땀이 나면 그것이 그대로 눈에 들어갔다. 귓바퀴가 작아지니 머리 감을 때 귀에 물이 들어가고, 손마디에 주름이 없어지니 손가락을 구부리기조차 힘들었다. 눈꺼풀이 안 감기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짧아진 손가락이지만 내 힘으로 숟가락질을 하게 되어 감사하고, 엄지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추를 채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8개의 손가락을 잘랐지만 더 자르지 않아서 감사했다.’

  하바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다윗도 노래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오늘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보리를 추수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먹고 살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본문을 보면 그렇습니다. 9절에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그랬습니다. 첫 보리에 낫을 댄 첫 날로부터 시작해서 일곱 주, 49일을 센 다음에 50일째가 바로 칠칠절입니다. 이날 보리와 밀 수확이 끝나기 때문에 첫 수확이라는 의미에서 초실절이라고 하기도 하고 맥추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입국하거든 그 땅에서 나는 첫 열매를 가지고 맥추절을 지키라.’ 첫 열매를 드리면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첫 열매는 처음 익은 것으로, 반년동안 농사지은 것에 대한 가장 귀한 열매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것은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지요. 대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나머지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기를 지키게 하시면서 당신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하게 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받은 것입니다.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고 했습니다.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그랬습니다.

  내게 큰 복을 주신 하나님이니 내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갈 수 있어야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힘을 다해서 나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에든 억지로 하지 아니하고, 인색함이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헤아려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윤항기 씨가 예전에 불렀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몇 번이고 들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이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나름 해 봅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복도 지지리도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많은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풀들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나를 굶기신 적이 없으시다.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다.

  우리 한맘의 가족들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한껏 높이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자리를 지켜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반년을 살아오게 하셨고 반년을 살아가게 하실, 지금까지도 살아오게 하셨고 지금부터도 살아가게 하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지요. ‘세상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현재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했습니다.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언제 어디에서든 은혜를 빼고서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받으려고만 합니다. 어떻게든 받으려고 해요. 어렵다는 이유로 받으려고만 합니다. 반대로 또 어떤 이들은 도와주려고 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면서 보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을 더 크게 펼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어렵다고 해서 받으려고만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려울 때에 더 도우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펼쳐내는 삶이 다릅니다.

  가난의 영에서 사로 잡혀 벗어나지 못하면 늘 앓는 소리입니다. 말끝마다 없는 소리입니다. 죽는 소리입니다. 어떤 친구 아버지는 죽을 때에 가족들에게 그랬다지요. “그 땅을 우리가 샀었어야 했는데.” 정작 죽는 자리에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가난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부요하게 해 주셨지요. 우리를 가난의 영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b,11) 얼마나 귀한 말씀들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생을 책임져주신 아버지께서 인생도 넉넉한 가운데 능히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 한맘 가족들은 부요하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큰 손, 왕손, 큰 맘으로 살아가고들 계시지요. ‘계란말이, 작게 마는 것이 더 힘들었어요.’ ‘최선을 다해 작게 말았어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었어요.’ 지난주일에 시험을 치르느라 집에 있던 예솔이가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엄마, 집에 계란말이가 그대로 있는데 안 챙겨 갔나 봐.” “, 교회 것 준비하고 남은 거야.” 여러분들이 전해주는 말에나 글에나 얼굴에나 늘 넉넉하고 푸근한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그래요. “기도 순서가 너무 빨리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좀 더 많이 하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부담스럽겠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보, 주님께서 지나는 길에 베다니 집에서 쉼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던 최현주 집사님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냐.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짚어주면서 끄집어내주니 내 갈 길이 환하더라.”

 

 

 요새 이웃하고 있는 주위 분들과 잘 어울려서 지내고 있습니다. 스스럼없이 찾아가고 부담 없이 만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에도 그랬지만 지금에도 그렇습니다. 만나다 보니 안 맞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지만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서로들 잘 어울려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이웃들까지 뭐가 저리도 재미가 있나.’ ‘뭐 먹을 것이 더 없나.’ 해서 기웃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둘러 자리를 만들어서는 앉게 합니다. 같이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같이 살아가야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계속해서 넓혀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아내가 며칠 전에 그럽니다. “요새 당신을 보니 붕 떠있는 것 같더라. 좀 자중해라.” 그래서는 제가 그랬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정 같아서는 솥 하나 걸어서 동네잔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말을 옆집 목사님께 했더니 한 술 더 떠서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 멧돼지 한 마리 잡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베푸신 은혜에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게 하고서 이어서 11절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면서 지켜가는 것이지요. 은혜로 거저 받은 것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존경은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하나님을 향한 섬김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는 것입니다. 펴면서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 막 주는 것이지요. 퍼주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줄 게 뭐 있나 하겠지만 줄 수 있는 것이 밑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좋은 말도 해 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물 한 그릇도 줄 수 있고, 용기도 북돋아 주고, 힘도 주고, 격려도 해 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웃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알아주고. 여러분이나 저나 주다가 가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기도 중에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어야 하는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미의 품에서 편안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편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자유롭습니다. 하나님 품에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가난과 저주를 떨쳐낸 자들입니다. 죄책과 수치를 떨쳐낸 자들입니다. 부모 앞에서 자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크게 웃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8 나 때문에(고난주일)
47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46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45 고넬료 그 사람
44 어떤 하루
43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42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41 먹든지 마시든지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39 평화와 번영의 길
38 잘 사는 삶
37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36 이 사람도
35 시가 흐르는 시월
34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33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32 쉼이 있는 터
31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30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29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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