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5-10 12: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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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5-12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하나님의 모성애(46:3-7)한맘   

 

 시인이며 수필가인 피천득의 글입니다. ‘30대에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새 한 마리도 죽이지 아니하고 살아온 것은 내 어머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내 어머니한테서 배운 웃음입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아들로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어머니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연숙 집사님의 카톡 배경 사진이 바뀌어 있습니다. 들어가 봤더니 시우가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마음을 담아 쓴 두 개의 글이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줘서 항상 감사해요.’ ‘다음 생엔 당신의 엄마가 되어, 받은 사랑 넘치게 드릴게요.’ 그 글이 읽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낳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져 갑니다. 러시아 속담에 아버지 사랑은 무덤까지 이어지고, 어머니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비록 이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도 계실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도 세월이 흘러감에도 여전히 그 분들은 우리네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계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저희 어머니와 제가 어울려서 풀을 맨 적이 많았습니다. 작은 텃밭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가꾸다보니 어머니 생각이 자주 납니다. 밭을 일구어서 씨를 뿌리고, 풀을 매느라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는 움직이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셨을 그 일들과, 그 일을 하면서 가졌을 마음이 제게도 하나씩 하나씩 다가오는 것입니다. ‘, 어머니께서 이럴 때는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자식들 뒷바라지를 어지간히 하셔야 했지요. 밥을 안 굶기기 위해서, 공부시키느라 애쓰고 힘쓰시고 고생하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제게서 오버랩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달걀 프라이를 해서 먹을 때 바짝 구운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약간 반숙에서 조금 더 익은 것을 좋아합니다. 강릉에 박이추 커피숍에 갔더니 그렇게 해 줍디다. 너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너무 바짝 구운 것을 어머니께서 내어놓을 때 제가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몰라요. “엄마는 왜 맨날 이런 식이냐? 내가 달걀 이렇게 바짝 굽는 것을 싫어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참 죄송스러워요. 제가 가끔 집사람이 없을 때 밥상을 차리면서 프라이를 할 때면 그렇습니다. 달걀만 굽는 것이 아니지요. 밥도 퍼야 하고, 국도 데워야 하고, 반찬도 꺼내야 하고.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입니다. 그러다 보면 달걀 프라이를 반숙으로 먹기 좋게 구워지지가 않아요.

  그때 어머니께 투덜거렸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께서 그 바쁜 일손을 놀리면서 자식들 도시락을 몇 개씩이나 싸셔야 했을 것인데, 달걀 프라이를 제대로 구워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자식이 투덜투덜거렸던 것입니다. ‘엄마는 도대체 왜 달걀 프라이를 이렇게밖에 못하는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누나네와 갓 결혼한 조카네, 이렇게 넷이서 경주 투어를 하고 갔습니다. 연휴 기간 마지막 날이었던 월요일 아침에, 차가 막히기 전에 가야한다면서 서둘러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싸서 가는 짐에 보니 상추를 비롯해서 한맘마트에서 자라고 있는 채소들이 봉지 봉지에 가득씩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한 마디를 했습니다. “, 야무지게도 뜯었다. 싸기도 잘 쌌다. 언제 일어나서 이렇게 다 준비했느냐?” 그랬더니 누나가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 아들만 셋 키웠는데, 이렇게 안하고서야 어떻게 살았겠냐. 한 시간 전에 다 해놓았다.”는 것이지요. “누나도 보니까 엄마 딸 맞네. 엄마 딸 맞아.” 오늘 여러분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버지 아들이 맞고 어머니 딸이 맞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짓입니다.

 

 

 한 날은 제가 어머니가 하시는 일손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그러십니다. “네가 나중에 목사가 되면, 이때를 기억하고 설교할 날이 있을 것이다. 잘 기억해 두거라.” 그때는 그냥 웃었습니다. ‘어수룩한 아들, 일 시켜 먹으려고 그러나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일이 지금 떠오릅니다.

  며칠 전에는 뒤에 있는 터에 있는 풀을 진득하게 뽑고 있는데,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제게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라나고 있는 풀들을 보면서 잠시라도 그냥 있을 수 없어 손을 놀리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그러면서 거부할 수 없으리만큼 농부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더하여 감사한 것은 그 생각에 꼬리를 물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생각들이 또 있습니다. ‘, 내게는 농부의 피가 흐르듯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라는 것과 더하여 , 나는 농부가 피가 흐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까지 미치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어린 날에 풀을 매게 하시면서 그 속에 담아놓으셨던 선물의 포장지를 이제야 뜯어서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어느 기사에 댓글에 달린 글을 보면서 한참이나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한일전에서는 무조건 다 이겨야 된다고 하잖습니까. 방구소리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사가 일본을 상대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마땅히 그리해야 된다고 생각을 가지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십자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게 막연하게 들리는 말 같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뭔가?’ 그런데 그때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이런 뜻이고,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그리하며, 십자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 주고 있는 십자가의 피에 관한 이해가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커가는 자식들을 보면서 커왔을 저를 보게 됩니다.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었던 자식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셨을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저희 누나도 경주에 있는 그 짧은 동안에도 몇 번씩이나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과 통화를 주고받습니다. 장남인 첫째 아들을 결혼 시키고는 며느리를 보면서 부모님이 생각이 더 애절하게 났을 성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1863) 영국 웨일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눈보라치는 언덕을 넘다 얼어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한 농부가 이상한 모양의 눈 더미 속에서 여인의 겉옷에 싸여 살아 있는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 여인은 아기 체온이 떨어질세라 옷을 벗어 감쌌습니다. 결국 자기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살아난 아기는 62년 후 영국의 34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위대한 정치가로 손꼽히는 로이드 조지입니다. 이 총리는 학창 시절에 나태해질 때마다 추위에 떨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총리까지 올랐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옷을 입지 않았다.” 그의 말에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모성애로 잡았습니다. 내리 사랑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지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지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49:15,1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실 때에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음으로 표현하십니다. 그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 인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어머니의 모성애보다 더 깊은 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그 자식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지만, 혹 여인은 그 자식을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신학교 때에 조직신학 지도교수가 계셨던 김경재 교수님이 쓰신 글귀가 눈에 띕니다. ‘어버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효도를 장려하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 종교적 차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어버이의 부성과 모성은 그 존재론적 뿌리가 하나님의 마음이고, 창조적 신적 본성을 닮아서 드러낸다는 영성의 눈뜸이 중요하다. 어버이의 엄하신 가르침과 자기희생적 모성 사랑을 통해 우리는 신적 속성의 본질을 깨닫고 경험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모성애를 읽을 수 있습니다.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으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그랬습니다. ‘’ ‘태어남’ ‘안김’ ‘’ ‘업힌과 같은 단어들이 모성의 언어입니다.

  태에서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녀들과 처음부터 함께 함은 물론이요, 마지막까지 함께 하심을 또 말씀하십니다. 4절에,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했습니다.

 

 

 좀 전에 인용한 김경재 교수님이 이어서 쓴 글귀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기독교는 정의를 강조하며, ‘십계명과 같은 엄정한 율법의 준수를 요청하는 남성적 종교로 이해되어 왔다. 계곡의 비움과 고요를 중시하는 면보다는 산의 높음과 정상을 강조하는 쪽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주 대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에 순응하기보다는 역사의 전진과 발전을 추구하는 투쟁적 종교로 인식되어 왔다. 구약의 야훼 하나님은 죄를 태워버리는 불의 하나님으로 인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적이고 가부장적 신의 이미지는 일방적이거나 부분적인 겉모습이다. 성경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속성,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신비자의 속성은 도리어 모성적 속성을 그 가장 깊은 마음에 지닌 분이라고 증언한다.

  모성적 속성의 특징은 생명을 낳고, 기르고,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아서, 여리고 자식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도리어 안쓰러워하시고 스스로 고통 받으시는 마음이다. 죄인 자식을 둔 어머니는 자식의 죄 값을 대신 자기가 치르려고 자원한다.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죄인의 자식을 속량해내려는 마음이 모성의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엄마 이연숙 집사님을 향한 딸 시우의 마음을 보면서, 카톡 메시지를 이렇게 남겼습니다. ‘시우 때문에 울음보 터짐’ ‘.. 보셨어요. 저두... 목사님 사모님도 한결이 성결이에게 감동적인 선물 받으셨겠죠. 이럴 때 참 자식이 고맙고 힘이 되네요.’ ‘이 나쁜 새끼들은 지 아버지 닮아서 영~ 그래서 한 마디 했지요. “그래,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것만도 큰 선물이다.” 그랬더니 씩 웃더이다. 시우 같은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그런 나쁜 새끼 울 집에도 하나 있습니다.’

  옆에 사는 목사님 집에 기러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그래요. 암컷이 알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부화가 되면 한 마리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럽니다. “목사님, 수놈이 본능을 이기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알을 다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암컷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부드러운 속의 털을 뽑고,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않고 알을 품고 있는데 반해서 수컷은 그러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그래요. “다음에 부화할 때는 수컷을 잡아 먹어버려야겠습니다.”

 

 

 저희 형제가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유 없는 반항,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때는 자기 집안에 대한 불편함과 불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지금에 와서 저를 통해서 보면 아버지의 표현 방법이 걸러지지 못하고 중화되지 못한 체 서툴고 거칠게 나올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그런데 그때는 저희 형제들에게 있어서는 이해의 폭이 좁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께서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나 자식들을 대하는 방법이 못내 못마땅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딪히지요. “이런 집구석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아버지께서는 벌컥 화를 내시면서 말씀합니다. “집이 싫으면 집에서 나가. 밖에 나가서 고생을 해 봐야지. 정신을 차리지.”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저희를 붙드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꼭 있으셨습니다. “야들아, 어디 한 번 나가서 살아봐라. 너희 아버지 같으신 분이 있는 줄 아나.” “너희가 다른 집에 가서 삼일만 있어 봐라. 아무도 너희들 좋아할 사람 없다.”

  이번에 저희 누나네가 와서 삼일 있는 동안에 저희가 겉으로 표현은 못했습니다만 진짜 힘들었습니다. 집사람이 어지러워서 쓰러질 정도여서 응급실에 가야만 했고, 저는 겨울에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를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에 걸려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루만 더 있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는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나네 가족만 와도 이런데 말이지요.

  학창 시절 때에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고,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배회하다가도 다시 그 발걸음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은 어머니였습니다. 가정이 세워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큰 자식 같은 남편과 자식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안아주고 다독여주면서 어머니께서 그 역할을 감당해 주셨기에 가정이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에 와서야 지나온 모든 날들이 다 추억으로 간직되어져서는 웃을 수 있습니다만 그 당시 어머니께서 알뜰살뜰하게 구석구석 매만져주시고 쓰다듬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에 와서도 이렇게들 웃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 이렇게 가족들이 그나마 웃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못난 자식들처럼 집밖으로 뛰쳐나가지 아니하시고, 남편처럼 윽박지르지 아니하셨던 어머니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길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사실을 어머니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뇌리 속에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저에게 있어서도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아시고 능히 공감할 수 있는 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최복님 권사님입니다. 몇 년 전에 양남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만  양남에 계실 때 그 권사님을 보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저 분처럼 되고 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몇 년 간이나 김창석 집사님과 최복님 권사님 내외분께서는 교회당을 쓸고 닦으셨습니다. 다년간에 걸쳐서 수고하고 애쓰셨으면서도 늘 한결 같으셨지요. 다른 이들 같았으면, ‘누가 안 봐주나.’ ‘누가 안 알아주나.’ 그랬을 것인데, 이 분들은 전혀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정도 했으면 말 한 마디라도 낼 수도 있었을 것인데도 이 분들은 말없이 그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쓰레기봉투에 분리수거가 안 되어 있으면 이 분들은 다 쏟아서는 다시 꾹꾹 눌러서 담습니다. 그러면 몇 개의 봉투를 다시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귀찮아서 그냥 넣어서 내버립니다만 이 분들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꼼꼼하게 자기 일처럼 교회 일을 하는지 몰라요.

  더하여 여러분, 교회당 안팎만 쓸고 닦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그리해 주셨습니다. 교인들과 이웃들을 찾아가서는 같이 아파해주시고 같이 울어주셨습니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연세가 드셔서 거동이 불편하셨습니다만 명절 때는 물론이고 수시로 반찬도 가져다주시고 말동무도 되어 주셨습니다. 사위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어쩌면 딸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교회의 어머니 같으신 분이셨지요. 누구나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듣고 싶어 할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붙여질 수 있는 칭호가 아니지요. 한 가정은 어떻게 지켜지고 세워지는가. 한 교회는 어떻게 지켜지고 세워지는가. 다르지 않지요. 모성애로 넘쳐나는 어머니에 의해 지켜지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모성애의 마인드를 가지고 가꾸고 돌보는 이들에 의해 한 교회 역시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성애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어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아멘.

 그 크신 하나님의 모성애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모성애라는 말이 얼마나 듣기에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쓰이는 곳에는 참으로 많은 고통과 헌신, 자기희생이 뒤따르게 됩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고통을 힘입어 태어날 수 있었고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을 두고 살림한다고 합니다만 살린다는 것이지요. 살린다는 것은 자기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한 생명을 잉태했을 때 찾아드는 몸의 변화와 심경의 변화가 있잖습니까. 그것은 고통과 두려움이지요. 집사람이 잉태했을 때에 거의 먹지를 못하고 자지를 못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그럽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같습니다.” 어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미의 모든 영양분을 다 섭취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신여성이라 불렸던 나혜석이 산통을 겪으면서 쓴 글의 일부분입니다. ‘어머니 나 죽겠소 /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 나 심히 애걸하니 /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남편) / 참으시오 하는 말에 / 이 놈아 듣기 싫다 / 내 악쓰고 통곡하니 / 이 내 몸 어쩌다가 / 이렇게 되었던고

 

 

 우리가 커피를 즐겨 마십니다. 그 커피 향과 맛이 얼마나 향긋하고 감미로운지 몰라요. 어떤 분은 보약으로 생각하고 마신다고 하잖습니까. 제가 아침마나 커피콩을 그라인더에 넣고서는 잘게 분쇄합니다. 그리고는 팔팔 끓는 물을 붓습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입니다. ‘, 이 커피가 맛있는 향과 맛을 내기 위해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는구나!’ 은혜가 됩니다.

  안도현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썼습니다만 연탄재 한 장에도, 커피 한 잔에도 자기희생이 필수적으로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합니다.

  그 귀한 사랑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하나님 당신과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당신 같은 이가 없으니 당신을 온전히 믿고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4,5절에 나오듯이,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는 분이 오직 당신이요, 고난에서 구해주시는 분이 오직 당신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까지 여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모성애의 마음으로 우리들 자신을 끝까지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 때문입니다. 지지리도 못나고 지독히도 못된 우리들이지만 쏴붙이시고 몰아붙이시고 내치시고는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품으시고 안아주시면서 기다려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사는 것이요 영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두 살 때 뇌성마비 증상을 보인 이후 줄곧 25세 청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성장과 성숙이 중지되어진 장애인 자식을 둔 어머니의 삶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똥오줌을 받아내야만 했던 자식이었습니다. 그 자식을 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그럽니다. “남은 자식들을 잘 키우려면 그 희망 없는 장애인 자식을 이제라도 포기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어머니는 포기하기는커녕 도리어 해가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연민으로 그 자식을 위해 희생을 합니다. 오늘날 능률성’ ‘효율성’ ‘실용성을 삶의 중심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세대를 부끄럽게 하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을 살리는 것이요, 그 모성애가 세대를 살리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모성애가 온 인류를 살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버이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짙어집니다. 사랑 때문이겠지요. 자식을 향해 쏟으신 어버이의 사랑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빛이 더욱 더 발해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모성애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여운은 짙어져 갑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그제나 이제나 변함없이 흘러넘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신실하신 그 사랑이 오늘 이 자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48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대림절 셋째 주일)
47 봄이 와 있습니다
46 내 인생 광내기 +2
45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44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 하나님의 모성애
42 다 이루신 예수님 +2
41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40 보여지는 부활 생명
39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38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37 하늘 문 자리
36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35 그저 감사한 것밖에 없습니다.
34 베풂 속에 담겨 있는 즐거움
33 가위손 하나님
32 살다 사랑하다
31 먹든지 마시든지
30 2019년도 한맘녀
29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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