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9-04-19 15: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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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9-04-21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보여지는 부활 생명(24:13-35)한맘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제 또래들 중에서 저보다 믿음이 좋은 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을 저보다 크게 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기도도 저보다 크고 길게 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촌에서는 목소리 큰 놈이 장땡입니다. 제 목소리를 따라올 자들이 없었습니다. 예배 출석률은 단연 1위였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믿음이 좋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믿었으니 하나님께서 상 주시고 복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기도원에서 불 받아서 목사가 되겠다고 선포를 했을 정도이니, 연세가 드신 권사님들을 비롯해서 다른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저는 그때부터 목사님으로 불렸습니다. 다른 또래들과는 대접이 다릅니다. 그 당시는 부흥회를 해년마다 했는데, 부흥회가 끝나면 그 날 밤에 제가 인도를 하면서 또 집회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아주 남달랐지요. 그렇게 해서 신학생이 되고, 교육 전도사를 하다가 전임 전도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른 게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는 불순한 생각들이 똬리를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나.’ ‘죽었던 사람이 과연 살아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휘저으면서 더 크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이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의심하고 부정하는 이런 생각들이 밀고 쳐들어올 것 같으면 더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면서 그 생각들을 억눌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제일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제에게 있어서는 용납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당장 하나님께서 내려치실 것 같았고, 부산행이 아니라 지옥행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청소년 때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내리면서 점점 더 성숙해져갈 수 있는 것이지요. ‘믿음이 무엇인지’ ‘왜 믿는지에 대한 신앙의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다 보니 자라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것이면 제 존재가 허물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보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게서 믿음이 정말 있어서 나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믿음이 없어서 나오는 것이었는지 헷갈립니다.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 척 하려고 했을 것이니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믿는 것과 믿는 척이 혼용되어 있었겠지요. 어느 것이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능히 그럴 수 있지요. 믿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들인지 아니면 믿는 척 하다 보니 나오는 것들인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맘에 오면서 신앙의 사춘기를 제대로 겪어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시금 신앙을 재정립해가고 있습니다. 만약 이 한맘이 아니라 기존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면 저는 지금도 앵무새처럼 기존의 것들을 답습해 갔을 것입니다. 오늘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요. 목소리 큰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인 냥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갔을 것입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목회자라도 되는 양 찬송과 기도와 말씀들로 회중들을 사로잡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흐트러져버린 상실감으로 힘들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였습니다. 황량한 겨울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어느 날 밤에 확신 가운데 주어지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 말씀이 저에게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자신이 이전과는 달리 새로워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들 동안에 감히 부딪혀 볼 수 없어서 회피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해서 부딪혀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리로 굳어진 신학 체계와 사상이었을 수 있습니다. 전통의 이름으로 굳어진 교회의 생활방식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같았으면 부딪혀서는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들에 대해서 부딪혀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사실과 진리인 냥 굳어져버린 것들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과 부딪혀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을 이 한맘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한맘이 아니었으면 가질 수 없는 생각과 생활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혹 여러분들이 보고 들으시기에 좀 이상하다.’ ‘, 우리 목사님, 너무 나가신다.’라는 생각이 드실 때가 있으시다면 그래, 원래 사춘기 때에는 그렇잖아.’라고 생각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면서 기다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목소리가 큰 게 믿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믿습니다.”라고만 소리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반열에 오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많은 세월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나마 가져가는 것은 첫 단독 시무지에서의 소중한 경험들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경험이 오늘의 자리까지 있게 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많은 이적을 보이시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가 되심을 가르치셨지요. 얼마나 많은 말씀들로 가르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들 제자들보다 믿음이 좋은 이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들에게 줄기차게 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믿음이 차고 넘쳐야 될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이 들어야만 했던 소리는 믿음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의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가리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후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의심하는 그 적은 믿음이 3년이나 따랐던 스승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서는 배신하여 팔고, 부인하고서는 다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한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버렸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동행하시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으니, “그것도 모르느냐.”면서 슬픈 빛을 띠면서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이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여자들과 다른 제자들이 목격한 부활에 대해서 말합니다.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이들은 전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이들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이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경험으로 봐서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믿기지 않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들이 이상한 사람일 수 있어요.

  우리 인생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압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없는 줄 압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가 있는 그 우물 안이 세상에서 제일로 넓은 줄 알아요. 그 우물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바다의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새끼 개구리들이 소풍을 나와서는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황소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아빠 개구리에게 달려가지요. “아빠, 아빠, 우리가 엄청난 크기의 황소를 봤다.”고 하니까, 아빠 개구리가 배를 부풀리면서, “이만큼 되니.” “아니, 그것보다 더 커요.” “그러면 이만큼보다 더 크니.” “아니요. 어림도 없어요.” 그랬더니 숨을 들이키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배를 부풀리다가 결국 배가 터져서 죽었다는 것이지요. 정말 눈물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라는 말이 뭔지 몰라요. “, 너는 내일도 모르느냐?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이 가면서 해가 지고 다음 날 해가 뜨면 내일이라는 거다.” 그러면 하루살이가 세상에 미친 놈 다 보겠네. 뭔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하느냐.” “도대체 거짓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 그럴 것입니다. 내일을 모르니 내일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철 메뚜기에게는 다른 계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는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더하여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말씀에서 보면, 부자가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 중에 형제들이 생각이 나서는 그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그랬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여러분,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냥 믿으면 되지.’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럴 수만도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모든 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성인이라 불렸던 이어령 교수가 젊은 날에 그렇게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았다고 하잖습니까. 그러고 보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복인지 모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슬픈 빛을 띠고서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서는 성경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서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때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서는 그들에게 주십니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이들의 눈이 밝아집니다. ‘, 이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구나!’

  참 감사하지요. 주님께서는 당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그들로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십니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삶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에 그들의 가려져 있었던 눈이 열립니다. 그들이 서로들 말하지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는 미련하여 더디 믿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끊임없이 말씀해 주십니다. 그 주님은 복음의 말씀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말씀에서 만날 때에 단순히 성경 지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로 수용하는 것만이 안 됩니다. 본문의 두 제자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생명이 되어 자신들의 영혼과 삶에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뜨겁지 않은 심령과 어두침침한 슬픈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에 살아 있는 말씀 안에서 만나야 됩니다. 그래야 심령이 뜨겁게 달구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그 자체이신 생명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면서 음식을 나누듯 당신의 삶을 나누어주고 계심을 알아야 하지요. 그러면서 주님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지요. ‘, 그렇구나!’ ‘, 주님이 길이었구나, 진리였구나, 생명이었구나.’ ‘맞구나 맞아.’ ‘십자가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것이 부활이구나!’

 

 여러분, 우리가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기독교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실제적인 삶에서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솟아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외롭고,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침울하고,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는지.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요. 무늬는 다를 수 있어도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낙망과 절망으로 슬픈 빛을 띠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앓는 소리나 늘여놓고,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처럼 죽는 소리나 늘여놓고 사는 것이 아닌지. 푸념과 체념, 불평과 불만으로 주어진 삶을 녹슬어가게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여기에서 끝내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믿음을 가지지 못한 미련한 자들을 그냥 엠마오로 가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별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슬픈 인생을 살다갈 수밖에 없는 저들을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셔서 같이 동행하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음식과 삶을 나누시면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새싹과 새 순이 틔어 오르고 꽃들이 봉오리를 터트리다가 무성한 잎사귀와 함께 엄청나게 자라는 것처럼 심령과 삶에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져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의 발걸음을 돌이켜 주시듯이 삶의 목적과 방향을 돌이키게 해 주시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으로 그 걸음을 옮기게 해 주십니다. 슬픈 얼굴빛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지요.

 

 사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온 산하에 울긋불긋 꽃들이 계속해서 앞을 다투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라일락 꽃 향기가 진동을 하는 것이 아카시아 꽃을 부르는 듯합니다. 생명의 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그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올 봄에 텃밭을 만들어놓고서는 몇 가지 씨앗을 사다가 뿌려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뿌려놓고서도 뭘 뿌렸는지, 얼마나 뿌렸는지, 어디까지 뿌렸는지가 헷갈렸습니다. 그런데 좀 지나서 보니 헷갈렸던 것들이 한 점 숨김없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씨앗 속에 있는 생명이 뿌려진 만큼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무덤에 갇히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무덤이 가두어둘 수 없었고, 빛이신 주님을 어둠이 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온 세계 뭇 백성들에게 구원과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로서 오늘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내 속에서 어떻게 얼마나 역사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꽃으로 피어나고, 새 순으로 자라나고, 잎사귀를 내면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이 우리들 안에 있어 바위를 뚫고 올라오는 강인한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처럼 우리들 역시 부활 생명을 품은 자로서 열악하고 척박한 자리에서도 뚫고 올라오는 생명력이 보여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시은 시에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6:2)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티백(tea bags)과 같다고 합니다. 뜨거운 물에 그 사람을 담가보기 전까지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눈으로 봐서는 모르지요. 뜨거운 물에 푹 담가봐야 무엇이 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제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의 유무와 함께 크기가 얼마인지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아는 방법이 있다면 부활 생명을 믿고 가진 자로서 내게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지, 무슨 일에든 범사에 감사하고 있는지, 평안하고 행복한지를 보면 말입니다.

48 한울교회 여신도주일
47 기름 값 ― 2018.3.13 목사 은퇴/임직예식 설교
46 나 때문에(고난주일)
45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44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43 고넬료 그 사람
42 어떤 하루
41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40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39 먹든지 마시든지
3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37 평화와 번영의 길
36 잘 사는 삶
35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34 이 사람도
33 시가 흐르는 시월
32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31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30 쉼이 있는 터
29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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