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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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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2-16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왜 마리아여야 했을까?(1:26-38)한맘

 

 

  아무래도 말씀을 많이 전해야만 하는 목회자이니, 그로 설교자로서 3가지가 힘들다고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그리고 설교대로 사는 것입니다. 먹고 돌아서자마자 밥을 준비해야만 하는 주부처럼 돌아서면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 목회자로서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일 편할 때가 설교 준비가 끝났을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 번은 어느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목사님은요. 평소에는 거의 속을 끓이지 않는데, 유독 설교 준비할 때면 속이 타나 봐요.” 그러는 중에 강냉이 튀밥을 그렇게 많이 드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으니 육신의 배가 허기지는 것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내온 것을 보면 제 생활의 시간 설계가 설교 준비를 중심으로 짜져 있음을 압니다. 가족들에게 자주 듣게 되는 말이, “또 설교 준비하느냐?” “언제까지 설교 준비만 하고 있을 것이냐?” 그래요. 어떤 때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할 줄도 쓰이지 않아 속을 끓일 때가 있습니다.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합니다. 기도하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다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나절이 가고 하루가 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초조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의 성과를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것으로만 평가한다면 저 같은 목회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 것도 손에 잡은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누군가 손님이라도 방문하게 되는 때면, 그때는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망정이지 반미치광이가 됩니다.

 

 

  예전에 첫 시무지에서 설교 준비로 한창 힘들어하고 있을 때 대구 집사님 내외분이 어린 찬혁이와 함께 옵니다. 바다와 그 바다에 사는 고동과 보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의 여름이면 토요일에 맞춰서 옵니다. “목사님, 토요일이어서 바쁠 텐데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저희들 또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전집사님 잘 아시지요. 얼마나 부드럽게 말씀하시는지 몰라요. 그러면 겉으로는 제가 웃지만 속에서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됩니다. 만약 최현주 집사님이 저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눈치 없고 염치없는 게 인간이야.’

  그렇게 사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어느 밴드를 통해서 한 목사님이 올린 방문객이라는 시를 보면서 내 모습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 시는 정현종 시인이 지었습니다. 앞부분만 보면 그렇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누구라도 올라치면, 힘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 힘든 기색을 뿌리치고서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가지게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가 무엇을 가지고 오게 될까.’ ‘오늘 그 사람은 내게로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지고 올 것인데, 얼마나 그 만남이 풍성해질까.’ 이 시를 진작에 만났더라면 전집사님 내외분이 오시는 그때에 훨씬 더 반갑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람을 늘 중심에 두고 우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지요.

  그것보다 더하여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요. 이것은 오고 가는 시간과 그 시간조차도 뛰어넘어버리는 전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셨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 중심이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역시 사람이셨지요. 하나님의 방법 역시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써나가시고자 하셨을 때 먼저 사람을 찾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26,27,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로 하여금 그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갈릴리 나사렛이었을까요. 다른 곳도 많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 갈릴리 지역은 이방의 땅입니다. 변두리 지역입니다. 전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어 보이는 그런 누추한 곳입니다. 아니 다른 곳도 많았지 않았겠습니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나 헤롯 궁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곳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내 분규가 있어서 한 번은 평창동에 위치한 학장 집을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집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랐습니다. 얼마나 집들이 멋있는지 몰라요. 진짜 촌 놈 눈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리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런 곳에 천사를 보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거기에다가 비천해 보이는 마리아를 찾아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실수하지 아니하신다는 하나님께서 이번만큼은 실수하신 것인가? 갈릴리 나사렛 마을이 아니라 서울 강남구 서초동 같은 곳에 갔더라면 그곳에는 공주도 있었을 것이고, 귀공녀도 있었겠지요.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많은 스펙을 쌓아서는 외모와 식견을 잘 갖춘 국회의원이나 재벌의 딸들이 즐비했을 텐데 말입니다. 변호사, 검사, 의사의 딸들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많은 곳들을 지나쳐버리시고는 갈릴리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실수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천사로 하여금 찾아가게 하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화려하고 삐가번쩍한 곳을 향해 눈길을 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운 빛을 내는 곳을 향해 눈길을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였을까? 한 번 생각을 해 봅니다. 그 마리아는 세속에 때 묻지 물들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나름 가져봅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헤아려볼 줄 아는, 새털구름에 그 마음을 실을 줄 아는, 수줍은 미소를 담아 해맑게 웃을 줄 아는, 새들을 따라 함께 노래하며, 동네 아이들과 노닐고,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를 돌아볼 줄 아는 순수하고 순박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작은 것을 볼 줄 알고, 작은 것도 사랑할 줄 아는 소담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과 자연을 보듬어낼 줄 아는 정말 예쁜 여인이 아니었을까. 우리 한맘교회 여성들처럼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꼭 드는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들과 함께 당신의 역사를 써가고 싶으시겠지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실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요. 세상에서 원하는 스펙을 쌓아가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스펙을 쌓아갈 수 있어야겠지요. 외모를 치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단장해야지요.

 

   하나님께서 이새의 집을 찾았던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랬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을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높아지려고 하기보다 점차 낮아져야지요. 내 아래에 사람을 두어 군림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내 위로 사람을 두어 섬기는 모습이어야지요.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려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몸집을 가볍게 하기 위해 자꾸만 비워내는 모습이어야지요. 그런 모습을 갖추기 위해 기도하고 소원해야겠습니다.

  정선희 집사님이 좋아하는 복음성가 중에 소원이라는 곡 가사입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 살 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왜 굳이 마리아여야 했을까?’로 잡았습니다만 어떤 면으로 보면 마리아를 택하신 것이 인간적으로 합당치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왜 많은 여인들 중에서 꽃다운 나이의 마리아였을까? 청춘이 구만리 같았던 마리아여만 했을까?

  다음 달이면 누나 아들인 조카가 결혼을 합니다. 제가 주례를 맡았습니다만 지금도 보면 서로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손을 꼭 잡고 다닙니다. 눈을 서로 못 뗍니다. 죽고 못 사는 것이지요. 이제 곧 있을 결혼식을 앞두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신혼 여행지로 벌써 스페인 바르셀로나 축구 팀 경기를 예약해 놓고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행복한 단꿈에 젖어있겠습니까. 이들만 그렇겠습니까. 정철이와 철미도 그랬었고, 점춘이와 현주도 그랬을 것입니다. 용우와 연숙이도 그랬겠지요.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약혼을 했으니 이제 결혼식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 기다림의 연속이었을까요.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꾸려서 정말 예쁘고 행복하게 살고픈 단꿈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손꼽아가며 그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부 수업을 했겠지요. 백종원의 요리책을 사서 열심히 보고 요리 연습을 했을 것이지요.

  그런 행복한 꿈을 그리고 있었을 마리아에게 느닷없이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하시는 말씀이,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지만 이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는 그녀의 꿈을 산산조각 깨트려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성령을 통해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낳으라고 하니 어디 될 법한 말이냐는 것입니다. 요셉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기가 수월치 않았을 것인데, 성령을 통해 처녀의 몸을 통해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니 도저히 받아내기가 어렵습니다.

  28,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아니, 도대체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고, 평안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말씀을 처녀에게 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로 하여금 위험한 사지로 내모는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그 사회 내에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천사가 약혼자였던 요셉의 꿈에도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요셉이 가만히 끊어버렸다면 마리아는 결코 산 목숨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그 상황에서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들 누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겠느냐는 것이지요.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 것이라 한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오히려 신성모독죄까지 추가되어질 것이 뻔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을 것인데, 그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또한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사랑하는 남자와 한 가정을 꾸려 살고자 했던 자신의 소박한 꿈이 깨뜨려진다고 여겨졌을 때에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합리적 의문을 품고 하나님을 향하는 제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마리아가 잘못되었느냐?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이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리아의 삶이 잘못 쓰여졌느냐?” “그녀의 삶이 산산조각 깨져서 엉망이라도 되었단 말이냐?”

 

 

  때때로 제가 소리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떼를 쓰듯 소리를 지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꼭 저여야 했습니까?” “많은 이들 중에서 하필이면 제가 그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것입니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나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즐기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던질 때가 우리에게는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힘이 들 때면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누군가의 위로나 설득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지요. 그곳이 어디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제가 첫 단독 목회지로 가기 전 무렵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목회를 그만 두고 싶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 그리 클 줄 몰랐습니다. 친구가 있는 장애인 시설의 총무 자리를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거기로 갈려고 했습니다. 그때 만약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면 산으로 들어갔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300회 특집으로 제가 머리를 산발을 하고서는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며칠 동안 기도원에 가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모진 시련을 주시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만 그때가 지나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다시 제게 물으십니다. “그래서 네가 잘못되었느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네 인생이 마이너스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저로 하여금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셨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비록 힘든 가운데 있었지만 그 힘든 과정을 통해서 제가 힘을 길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오늘 이 자리를 있게 한 힘으로 작용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제 손을 놓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 손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경험하게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로 하여금 세속의 안락한 삶이 진정한 인생이 될 수 없고, 부와 명성과 안락이 정복할 수 없는 믿음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몰라요.

  며칠 전에 가족들과 아침밥을 먹으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빠가 생각해보니 우리가 물질적 가난에 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가난함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가난에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장차 질병과 늙음과 죽음 가운데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이 자리에서 거뜬히 살아내야 내일 그 자리에서도 거뜬히 살아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기사로 실렸습니다. 창현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는 4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두 가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어째서 침몰한 배와 함께 수장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질문만 산더미처럼 쌓인 지난 46개월이었다는 것이지요.

  두 가지 질문 중 하나는 국가를 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참사 진상 규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디지만 하나씩 하나씩 얻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지요. ‘, 우리 창현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왜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대신에 자식을 잃은 어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제껏 살면서 교회에서만 갇혀 살던 자신이 교회를 떠나 교회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이 완전히 깨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세월호 사건을 거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과연 우리 삶에 실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있었다. 이 사회가 어떤 힘으로 돌아가는지도 알게 되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돈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더라. 종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 거리를 두고서 교회를 바라보니, 많은 교회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교리를 내세우면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자행하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다고 하지만 거꾸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는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그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창현 엄마는 참사 이후에 교회가 보여주었던 민낯을 목격하면서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에 빠져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는 자기를 향해서 그런 차가운 시선과 모진 소리를 쏟아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교회 밖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절망이라는 꽉 찬 어둠 속에 오랜 시간 머물다 보니 오히려 보이는 게 있고 선명해지는 게 있었다. 하나님이 오래 전 각 피조물에 심어놓은 고유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곳곳에 제 역할을 감당하며 빛을 내는 이들을 보면서 아들을 잃은 어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창현이 엄마로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다운, 바울이 바울다운 삶을 살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남이 아닌 내 삶을 사는 게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시는 그 수많은 일들을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일들로 인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짊어져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고뇌와 번뇌가 내게 찾아듭니다.

  내 삶에 행하시는 그 일들로 인해서 내가 예전부터 꾸었던 그 꿈들이 다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살아가고 있던 일상들이 유리조각처럼 깨져버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리하셨던 것처럼 침묵하십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혹독한 겨울나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미루셨던 대답을 해 주시지요. “그래, 그래서 네 삶이 이제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지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고,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삶의 근원적인 것들에 대해서 깨닫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그것들이 이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데 일조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요셉과 약혼을 해서는 곧 결혼하게 될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처녀의 몸으로 성령을 통해서 아기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소박하고 소담한 꿈으로 아기자기하게 목수 요셉의 아내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낳게 한 여인으로서의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누구도 감히 살 수 없을 그 놀라운 삶을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좁았던 그녀의 세계를 찢어주시면서 그녀의 삶을 무궁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를 써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마리아를 찾아와 그 역사를 쓰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와도 함께 써나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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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주님께 꾸어 드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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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34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33 고넬료 그 사람
32 어떤 하루
31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30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29 먹든지 마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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