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2-09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42:1-9)한맘

 

  현대인들은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매우 지쳐 있으면서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경쟁 세계 속에서 살다 보니 긴장의 끈이 끊어질 듯 팽팽합니다. 하루하루의 그 귀중한 날들을 총소리나지 않는 전투장처럼 살아들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 자신에 대한 여유라든지 남을 향한 배려를 가지지 못합니다. 원망과 불평과 비난과 비판이 늘어나지요. 어떤 때 보면 사람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래요. 자기의 의견하고 조금만 다르면 바르르 떨어요. 그것을 못 참고 화를 냅니다. 사자성어 중에 견문발검(見蚊拔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모기를 보고도 검을 빼어든다.’라는 말인데, 조그만 일에도 발끈 성을 내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버럭 화를 잘 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쉽게 흥분합니다. 쉽게 열 받습니다. 쉽게 자극을 받아 쉽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견문발검과 같은 말이 그 누구를 지칭한다기보다 사실 저에게 그대로 해당되고 있음을 제가 잘 압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호흡이 얕고, 호흡이 딸리다 보니 길게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제가 알게 모르게 숨이 가빠질 때가 있습니다. 겨울이라 코가 막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답답한 것이 있는지, 해결 받지 못한 영혼의 숙제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낍니다. 아마도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했다는 말처럼, 50세가 되면 무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그때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직 살아갈 날들에 있어서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실존의 자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숨을 고르게 쉬기가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살아질 것인가. 사라질까 아니면 살아질까. 나락일까 복락일까.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제 존재의 몸부림이 가쁜 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나타나는 이런 모습을 직시하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각인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단편적이고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전 존재로 깨닫고 깨우쳐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혼의 호흡이 속 시원하게 터지도록 묵상과 기도,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가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들의 기도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가끔씩 아내가 한숨을 내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옆에서 한 마디 거듭니다. “여보, 한숨을 쉬지 말고 심호흡을 해라.” 인간사 세상사 염려와 걱정이 없을 수 없기에 저 역시 은연중에 한숨을 내쉴 때가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한숨 대신에 심호흡을 하게 되면 사물과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생각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을 그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운동하는 아이들이 있는지라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호흡이 터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뛰다 보면 호흡이 터질 때가 있는데, 그 호흡이 터져야 힘이 덜 든 채 잘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호흡이 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호흡이 딸려서 제대로 뛸 수가 없지요. 그러니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호흡이 터지기 위해서는 더 뛰어야만 한다는 것이 됩니다. 사는 것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뛰어야 잘 뛸 수 있는 것처럼 더 살아봐야 잘 살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수가 열심히 뛰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지요. 생은 명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씨앗이 바람이 부는 대로 가다가 앉게 되면, 그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면서 줄기를 내고 꽃과 열매를 내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자리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살아갈 힘과 살아낼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합당하심을 알아 기꺼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일은 우리가 대림절 둘째 주일로 보내게 됩니다만 이 역사에 어둠이 짙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흑암과 절망만이 있었던 그때에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의 현장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살 길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고 가는 인류와 온 우주적 구속의 정점을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찍어주셨습니다.

  지난주일에도 살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1절에서 4절까지 보면 정의라는 말이 세 번에 걸쳐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보면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97:2)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89:14) 그랬습니다. 4절에서만 보면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했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그랬어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죽어 천당 간다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소리를 높이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것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은 암송하면서도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적인 삶이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 기독교인이 사는 것이 크게 차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해가 가면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이념과 가치가 걸러지지 않고 교회에서조차도 별 무리 없이 무난하게 받아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익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간에 주일 점심 메뉴를 준비하러 포항 죽도 시장에 갔었습니다. 시장을 보고 주차 된 곳을 향해 가는데 승려와 여신도 몇 명이 길에 있습니다. 승려가 한 여성을 보고 , 어디 있습니까?” 그래요. “저기 있다.”고 했더니, 차를 보자마자 대뜸 던진 승려의 말 한 마디입니다. “, 차 좋은 차 타시네요.”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먹사이듯이 너도 땡중이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위함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이 세상에 오늘날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세우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가 행할 방법이 어떠냐는 것이지요. 23절에 보면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그랬습니다.

  그 정의를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이 참으로 나약해보이지 않습니까. 뭐가 이러나 싶습니다. 고작 이거냐 싶습니다. 큰 소리를 외치면서 갈대가 아니라 아름드리나무를 꺾어버리시거나 용암을 분출시키듯 다 살라버리면서 당신의 정의를 세워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셔서 그 정의를 세우시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때 가졌던 생각이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거짓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확 쓸어버리면 좋지 않겠나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니 아예 다 쓸어버리시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던 저는 아주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유용하고 유익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정의의 칼날이 비켜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대로 했더라면 그때 저도 쓸려 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은 다소 저희 집에서 힘이 빠졌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으로서의 제 말발은 대단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입니다. “이거 해라.” 그러면 해야 되고, “저것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라고 했던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하는 때면 그때는 아주 난리가 납니다.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닙니다.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고 분에 못 이겨서 큰 소리로 화를 냅니다. 견문발검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누구라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거나 대드는 듯한 말대꾸를 할라치면 용납이 안 됩니다. 아주 혼쭐을 냅니다. “어디 감히, 누구에게 말이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겁을 주고 화를 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방법을 빠르게 터득합니다. 말발이 먹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으면 다 좋아야 하고, 내가 싫으면 다 싫어야 됩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맞으면 다 맞아야 합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옳다는 의로 여기면 그 누구라도 그 의를 따라야 합니다. 힘을 가진 내가 절대적인 의가 되기 때문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구라도 예외는 없지요.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는 처벌이 뒤따르게 됩니다. 맞거나 굶거나 밖으로 내쫓김을 당해야 합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내 입맛에 따라 가정에 권위와 질서, 법과 원칙, 의와 공평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와 질서라고 할 수 없지요. 내 생각과 내 기분과 내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의와 질서는 온전하게 세워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한 공의와 공평은 강요와 협박과 처벌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팍스 로마나라는 말처럼, 힘에 의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 없습니다. 꼼짝 못하게 힘으로 찍어 눌러놓으므로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도 그 내면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나는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독재라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질서를 잡는 것이라 여기는데, 남들은 강압적인 군림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교회라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도 어느 정도의 독재는 필요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누가 이런 말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누가 만들어냈겠습니까. 그 말이 꼭 필요한 자들이 만들어내지 않았겠습니까. 일인체제를 구축해서 그 누구라도 넘보지 못할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를 원하는 자들이 만드는 말입니다.

  10여 년 정도가 넘은 이야기입니다만 다른 교단 목사님들과 모임을 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단 목회자들끼리 모였을 때에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자기네들이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밤늦게까지 모임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서울에 꽤 유명한 대형 교회 목회자가 그러더라는 것이지요. “자기가 보여줄 게 있다.” “한 번 볼래요.” 그러더니 서울에 있는 자기 교회 장로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늦은 밤 시간에 그 자리에 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늦은 밤 시간이 지났는데, 정말이지 그 장로님이 그 목회자가 말한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온 장로님만이 아니라 자기 교회의 그 어떤 교인이라도 똑같을 것이라면서 자랑스러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다른 목회자들의 반응이 부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 우리는 왜 저렇게 안 되나.” “우리에게는 왜 저런 카리스마가 없나.” “저래서 대형교회 목사가 다른 모양이다.”

  축구부 감독 중에는 이런 자가 있습니다. 밤에 실컷 술집에서 마셔놓고는 학부모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러면 그 전화를 받은 학부모는 자다 말고서 그 술집에 와서 감독이 먹은 술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볼모로 잡은 감독이 그 따위 짓을 일삼는 것입니다. 교회 목회자가 이런 식이면 그것은 용납될 수가 없지요.

 

  교회 직분이 여러분, 계급이 아니지요. 상하 개념이 아닙니다. 직분은 섬김에 따른 차이인 것이지 계급이 아닙니다.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그 교회가 누구 교회냐?”라고 묻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높냐?”고 다투고 갈등하는 것이 우스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크냐?’면서 따지고 있을 때에 어린 아이를 두고서는 말씀하셨지요. “이 어린 아이 하나를 받들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아무래도 이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이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누구라도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 누구나 동등되다는 인식을 놓치지 말아야 하지요.

  저는 여러분들과는 다른 어떤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선희 집사님께 한 번 그랬습니다만 생일 파티를 목회자인 나만 할 것 같으면 하지 않겠다. 다할 거면 나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지난주 공동체 나눔의 시간에 대표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변창열 집사님이 대표기도책에 보니까 기도 순서에 목회자와 그 가정에 대한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목회자와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만 거기에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를 위해 같이 간구하는 것이지요.

  우리 개신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발점으로 해서 세워졌습니다. 그 루터가 만인사제설을 설파했지요. 그러니까 목회자만 사제가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사제인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든 이들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오늘날 교회들이 종교개혁 이전으로 자꾸 되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중세 시대에 사제 그룹이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깜깜이로 만들어놓고서는 자기들 입맛에 따라 전횡을 저질러댔던 그 암흑의 시대로 돌이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깨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배우고 익힌 건전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조차도 꺾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런 갈대조차도 꺾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물가물 거려서 그을림만 내뿜을 것 같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성경에서 보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무례함이 없습니다. 한 심령 한 심령을 만나심에 있어서 성심을 다해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한 인격체를 두고 온 천하를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생명가치임을 확인시키시고자 그 생명을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가벼움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사랑인지 모릅니다.

  오직 남자에게만 빠져 살던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대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던 삭개오를 만나주실 때에도 그를 함부로 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누구를 대함에 있어서도 늘 그 모습이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당신을 부인하고 다 도망을 친 제자들을 다시 만나주실 때에도 그들을 성심을 다해 만나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누구를 만나더라도 왜 인생을 그 따위로밖에는 못사느냐고 빈정거리지 않았습니다.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없는 것들이라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창녀라고 세리라고 아래위로 훑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린 것들이요 늙은 것들이요 여자들이라고 차별하여 배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에 비해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를 구현하고자 함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쓸모없이 여겨지는 것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리지 않습니까. 자기 입맛에 맞지 않고 해가 된다 싶으면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유치장으로 보내버리고 숙청시켜 버립니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우열을 앞세워서 열등한 민족이나 인간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여겼지요. 그의 학살의 대상은 유태인뿐만 집시, 동성애자, 공산주의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못된 행태들을 우리가 보지요. 인종 차별 행태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울분을 머금습니다만 실은 그런 모습들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에도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면서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우리들도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군 복무 대신에 가는 방위산업체에 갔다가 못 견디고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에 있으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워 가시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다르지요.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그 어떤 누구라도 차별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이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잘게 부서지고 깨어진 유리조각을 가지고 모자이크가 아름답게 빚어지듯이 주님의 나라에서는 그 어떤 누구라도 버려지지 않고 아름답고 귀하게 쓰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정의와 공의, 법과 원칙, 권위와 질서는 사랑에 의해서 온전히 세워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를 이 세상에 이루셨던 주님은 쇠하지 아니하시지요. 낙담하지 아니하십니다. ‘,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 방법이 더디고 느린 것 같아도 꼭 그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4절 하반절에 나오듯이 섬들이’ ‘모든 나라가그 교훈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 방법이어야 하는구나!’

 

  어느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서초동 법원 청사 소년 법정이 감동의 눈물에 젖었다고 합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16)양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내린 특별한 처분 때문이었습니다.

 김 판사는 법적으로는 아무 처분을 하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리는 한편 피고로 하여금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라는 특별한 처분을 내렸다고 합니다. A양은 벌써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라면 소년보호시설 감호 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만 김 판사가 과감히 불처분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A양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겉돌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 부장판사가 법정에서 말합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그러면서 A양에게 말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그리고 판사를 따라 점점 더 크게 외쳤습니다.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도, 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젖었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쉽니다. 이렇게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호흡을 할 때마다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밥을 먹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살아있음을 느끼며 팔을 가슴 위로 흔들면서 호흡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숨을 못 쉬면 죽잖아요.”하면서 말입니다.

  5절 말씀에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소산과 호흡과 영을 주심으로 우리로 살아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해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의 빛이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아멘.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아멘. 우리를 위해 큰 일과 새 일을 행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을 본받고 닮아갈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 대림절 둘째 주일에 높여 드립니다. 아멘.

 

 

48 기름 값 ― 2018.3.13 목사 은퇴/임직예식 설교
47 나 때문에(고난주일)
46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45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44 고넬료 그 사람
43 어떤 하루
42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41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40 먹든지 마시든지
3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38 평화와 번영의 길
37 잘 사는 삶
36 가시나무에 깃든 은혜
35 이 사람도
34 시가 흐르는 시월
33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합니다(종교개혁주일)
32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31 쉼이 있는 터
30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
» 사랑으로 세워지는 정의(대림절 둘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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