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박정철 2018-11-30 13: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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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12-02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32:1-8)한맘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입니다. 따뜻한 차와 국물, 그리고 사람과 교회가 더 절실하게 생각나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추운 날씨이기에 자칫 어깨가 움츠려들면서 마음의 왜소증 증상이 다분히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한맘 가족들은 이런 계절에도 어깨를 걸고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 어깨를 활짝 펴고서 더 힘차게 살아들 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지용 시인이 기독교인입니다만 그 분이 지은 향수마지막 문장에 보면,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 했습니다. ‘홍이 랑이 양길이 노닐고 통나무 교회당 둥그런 불빛 아래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최현주 집사님이 밴드에 성탄 트리를 해놓은 것을 보고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싶다는 글을 남겼습니다만 우리가 속한 이 공동체가 끄는 힘이겠지요. 도란도란 둘러앉아 다양한 생각과 삶이 어우러져서 커피향과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이 자리가 잊힐 리가 없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함께 하지만 종교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모인 공동체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경동시찰위원회 임원 네 분이서 다녀갔습니다만 교육관 그림들을 보고 누구 작품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만 그 교육관 이름을 바꿔서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명희 화백 갤러리 화랑관으로 말이지요. 우리가 모두들 함께 모여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 거기에서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확인하고, 내 살아내는 삶을 검증까지 받아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 주일이 대림절 첫째주일입니다. 강단이 예쁜 트리로 장식이 되었습니다만 어릴 적 추워지는 겨울이 너무나 기다려졌던 것은 단연 성탄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극과 꽁트를 준비하면서 요셉과 마리아, 동방박사와 양치는 목자들이 되어보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보내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때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들은 1년 뒤에 다시 오게 되는 성탄절을 기다리게 하는 큰 힘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25일 성탄절에 예배와 함께 행사를 곁들여서 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추운 세상살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거뜬히 이 세상을 이겨내고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 날에 하늘을 열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하늘이 떠나가도록 노래했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의 말씀을 이렇게 받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니까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같으리니그랬습니다. 이 말씀으로 얼마나 가슴 벅찬 감동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먼저 1절입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그랬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공의가 강같이 흐르고,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곳은 맑은 곳이요 밝은 곳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억울한 자가 없습니다. 원한이 맺힌 자가 있을 수 없겠지요. 주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세상 나라는 어떻습니까. 공의와 정의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가 만연한 나라입니다. 신군부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이전 정권이 내세운 것이 참으로 어이없게도 정의사회구현이었지 않습니까. 정의를 짓밟은 사람들이 그 입으로 외친 말이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힘을 가진 자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여전히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과 이세벨에게 빼앗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게 된 것처럼 이 세상의 나라는 지금까지도 한숨소리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억울한 피해자와 희생자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곧은 것은 굽었다고 합니다. 굽은 것을 곧았다고 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합니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법까지도 엿가락처럼 휘게 만듭니다. 자기 입맛에 법을 농락합니다. 지록위마라고 사슴을 가리켜서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스스로의 권위를 그들 스스로가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가진 자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그 기울어진 것들을 바르게 세우십니다. 그렇게 통치하겠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그 거짓되고 잘못된 것들을 심판하시면서 궁극적인 승리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의 보장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가끔은 이 현실 세계를 살면서 어떻게 그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바로 부활 사건으로 증명이 됩니다. 당신께서도 잘못된 재판의 희생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생명이 죽음 안에 갇힐 수 없으셨지요. 공의와 정의가 거짓과 불의에 패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요. 별 희한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상이 도대체 뭐 이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놓지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나쁜 놈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했던 말도 안했다고 하고 안 한 말도 했다고 우깁니다. 수고하고 충성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함과 비난으로 얼룩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참으로 억울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래도 오늘 말씀처럼 주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시는 것을 믿게 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까지도 극복해낼 수 있고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헤아려주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 판결을 내리시고 결판을 내리실 것을 믿기에 그 순간을 버텨내고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의로운 자의 오른손을 높이 들어주실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네 마음에 억울함이나 한, 분노, 증오를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공의와 정의에 대한 판결에 대한 믿음을 채워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 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살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같으리니그랬어요. 이 말씀에서도 1절의 말씀에서처럼 가슴이 벅차오르지요.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날과 그때가 장차 있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설 바다에 나오는 밤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같이 고통과 흑암이 넘실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날이 있을 것이니 그 날을 기다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이지요. 지쳐서 절망하지 말고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희망 고문이 아닙니다. 그저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당선만 되면 될 것 같은 헛되고 빈 공약을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자식을 고아원에 두고서는 엄마가 몇 밤만 지나면 데리러 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해 놓고서는 그 자식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게 해 버리는 그런 지키지 못할 약속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를 통해 주신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미쁘신 분이십니다.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림절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우리 신앙인들이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세월만 가면 다가오는 그런 달력상의 날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기다림이요 심령의 기다림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씨앗을 심령에 심어놓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 밤에 교회당에 왔더니 바깥에서 보름달이 환하게 비췹니다. 그래서 강대상으로 다가가서 바깥 풍경을 봤더니 푸르스름한 양파와 마늘이 보여요. 그때 드는 생각이 , 이 밤에도 이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구나!’ 싶은 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 저 양파와 마늘로 우리 성도들과 정말 잘 먹을 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세월만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어놓고 열매가 맺힐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말씀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씨앗을 심어놓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 기다림의 시간에 비록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해도, 광풍이 휘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해도, 메마른 땅이 갈라져 곤비할지라도 그때를 보내는 것이지요. 그러다 때가 차면 그 날은 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을 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어둠이 짙게 깔린 그 한밤중에 베들레헴 말 마구간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밤에 양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이야기하지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렇게 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 일성이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그 나라는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으로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한민국에 속해 있는 것처럼 주님의 나라에 속해 있어야지요. 주님의 첫 일성처럼 지난날의 삶에서 돌이켜 회개함으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소속을 달리하는 것이지요. 내 소속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어떻습니까. 2절 말씀에 빗대어보면 인정사정도 없이 광풍이 휘몰아치는 곳입니다.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폭우를 쏟아 붓는 곳입니다. 종일 걸어가도 메마른 땅이요, 피곤이 더해지는 곤비한 땅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 나라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라입니다. 지옥으로 이어지게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그 주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된 인생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세상의 것들이 왕노릇하면서 인생들로 멸망과 지옥으로 치닫게 했지만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면서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은 이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이 살아났지요.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이 살아났습니다. 삭개오가 살아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혈우병을 앓는 여인이 살아나고, 38년 된 병자가 살아났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로 다시 살았습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던 자가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사울이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찬양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에서 보듯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실망하여 절망 가운데 죽음 직전까지 갔던 자들이 자연을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되면서 육신의 삶을 이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하물며 이 자연을 지으신, 천지 만물과 우주 만물을 지으신 주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히 다시 살게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통치 안에 있는 백성들일 때, 우리의 눈과 귀와 입, 생각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3,4절에 보면, ‘보는 자는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며, 듣는 자는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말하는 혀와 생각하는 머리가 달라집니다. 제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부추고 뭐고 다 풀인 줄 알고 베고 뽑아버렸습니다. 그러는 중에 몇 몇 분들이 오셔서는 그래요. “이거 방풍 나물인데, 먹으면 사람에게 그렇게 좋다더라.” “, 목사님. 여기에 있던 도라지를 벴네요.” 그러는 중에 박선갑 집사님이 산딸기나무가 있네요. 매화나무가 있네요. 저기 죽순이 올라오네요.”

여기 오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 ‘, 머위 잎사귀는 저렇게 해서도 먹을 수도 있구나.’ ‘산수유 열매는 이렇게 먹는 것이구나.’ ‘감식초는 이렇게 담는 것이구나.’ 지금 제 머리 속에는 내년에 심고 가꿀 것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올해와는 또 다른 내년의 밥상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교회 출석을 잘하고,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교인이 일등 교인인 줄 알았습니다. 주일에 안 나오는 교인들, 나와도 헌금을 하지 않는 교인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달리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시큰둥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교회당에 발을 딛고, 한 푼이라도 더 내는 교인이 신앙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교회를 정말 위하는 이들인 줄 알았습니다. 이웃과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것보다는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갑질 횡포 논란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국민적 공분을 샀던 한국 미래 기술의 양진호 사장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아시지요.

그렇게 여기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목회자가 자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인 수와 재정 수에 비례해서 목회자가 세워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예외로 있는 이들이 가까이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별 도움이 되지 않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나 두 렙돈을 넣는 여인 같은 자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도 새벽 기도회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심방 잘하고, 설교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 목회자 대열에 서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싶었습니다. ‘나 정도니 하는 것이지.’ 뭐 이런 생각들입니다. 진리를 좇아서 도를 닦는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말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얼마나 더.’

그런데 여기 한맘에 와서 배추를 심고 무를 심으면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무를 가지치고, 풀을 매면서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채로 교만과 오만에 휩싸여 살아왔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 한맘에서 지금, 저는 여태까지 저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던 가심덤불과 넝쿨들을 걷어내느라 힘에 부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교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얼마나 빨리 새벽에 나오는지 몰라요. 참 열심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교인이 그렇게 빨리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이 몇 시에 나오는지 체크를 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만약 그 교회에 있었다면 그 교인보다 5분 먼저 나가서 그 교인을 잘 맞이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인이 가고 난 5분 뒤에 나갔겠지요. 그러면 제가 얼마나 그 교인에게 귀여움을 받고 칭찬을 받겠어요. 눈이 뻘겋게 해서 말이지요. 몸이 완전히 축나고 망가지면서 말입니다. 좋다고 하니 죽는 줄도 모르고 아닌 줄도 모르고 달려갔을 것입니다.

제가 여전히 기존 교회에서 목회를 했더라면 교리로 굳어진 교리주의와 전통으로 굳어진 전통주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성장주의의 우상 숭배자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때에 금덩이를 가져다가 불에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아론처럼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을 존귀한 것인 알아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이 말끝마다 너무 좋다고 하는 것처럼 저도 이곳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그 깊은 산골짜기에 아무 것도 없이 사는 것이 뭐가 좋을 것이냐 싶겠지만 그것은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새롭게 목회와 신학의 판을 짜서 틀을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주님을 만나가며 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여기 이 자리에서 신앙의 사춘기를 넘어서 갈 수 있게 하시는 것,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서 삶을 노래하고 인생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리를 좇아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 진리를 좇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지요.

 

우리는 본문 6, 7절에서 주님이 오시기 전,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들이 어떠한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그랬어요.

주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세상 나라들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실 것을 아예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밥을 주지는 못할망정 쪽박까지 깨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개무시되고 있습니다. 고위 공무원이 내뱉었듯이 개와 돼지, 말하는 짐승일 뿐입니다. 설치류일 뿐입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패역함으로 거스르는 세상은 인격을 갖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전혀 갖추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돈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을 볼 수 있잖습니까. 거기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돈이 서열을 매깁니다. 아파트 입주민이 경비원을 향해서 머슴이 주인에게 대드느냐?”고 하는 세상입니다. 조선시대가 아님에도 그 말투에서는 여태껏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인격체가 겪게 되는 수모와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TV조선 전무의 10살짜리 초등학생 딸이 57세 운전기사에게 갑질한 사건이 있었지요. 때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10살짜리가 60이 다 된 사람을 때린 것입니다. 고함을 지르고, 핸들을 꺾고, 가방을 던져놓고서는 주워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돈 앞에서 삼강오륜이 물구나무를 서버린 것입니다.

아저씨, 돈 벌거면 똑바로 벌어.” “아저씨,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널 교육을 잘못시키고 이상했던 거야.” “돈도 없어서 병원도 치과도 못 가지.” “아저씨, 진짜 해고될래요.” 그랬는데 진짜 며칠 뒤에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이 해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이 왕노릇하면서 지배하는 세상의 한 단면입니다.

 

더 서글픈 것은 세속의 가치가 교회로 물밀 듯 들어왔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터지는 교회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돈의 문제로 인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대형교회들이 보여주는 사태의 종착역이 거의 돈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당 안에서조차 주님께서 다스리는 곳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면서 통탄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말 발통에 태어나시고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서는 당신의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강도의 소굴과 다를 바가 없지요. 그래놓고도 때마다 주님을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찾고 있으니 주님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사야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1)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베풀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5-17)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네 심령과 삶이 정말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가난해져야 합니다. 빈약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집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몸집을 줄여가야 하지요. 우리네 심령과 삶을 비워내야 합니다. 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서 부어주는 부요와 풍요를 무려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섬길 때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그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둔 역사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 분의 아들로 믿고, 우리네 인생과 영혼의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에게 있어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는 다른 게 아니지요.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살 것인가?’의 문제이지요. 거기에 대해 본문 8절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주님께서는 당신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를 세워 가는데 있어서 우리 신앙인들을 당신의 방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역사가 어둡고 암담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팍팍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존귀한 자리에 마땅히 서야 될 존귀한 자들로서 존귀한 삶을 살아가는 주님 나라의 방백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48 청년은 비전을, 노인은 꿈을!
47 지상천국, 가능한 일일까?
46 그 가운데서 으뜸은 생각입니다!
45 폭풍전야, 그리고 평화의 아침
44 낭중지추(囊中之錐)
43 구글 신, 야훼 신
42 진화하시겠습니까, 도태되시겠습니까?
41 천국의 스마트키
40 천사가 되어가는 과정
39 내 인생 광내기 +2
38 한울교회 여신도주일
37 주님께 꾸어 드리기
36 나 때문에(고난주일)
35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34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33 고넬료 그 사람
32 어떤 하루
31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30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어버이주일)
29 먹든지 마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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