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 평화 · 선교 공동체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경북노회 방문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PRESBYTERY IN THE REPUBLIC OF KOREA!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5-13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고전 4:14-21)

 

  제가 요새 아침저녁으로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텃밭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마음이 쓰이고 발길이 저절로 갑니다. 밤새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합니다. ‘쑥갓이 얼마나 자랐나?’ ‘감자 꽃이 피면 사진을 찍어서 밴드에 올려야지.’ ‘잘 자란 열무로 김치를 담아서 같이 먹어야지.’ 잡초가 있으면 뽑아주고, 벌레가 있으면 잡기도 합니다. 물을 주는 일도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농사꾼 박씨 아저씨로 텃밭을 돌아보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그 밭을 일구어서는 제가 작물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텃밭을 돌보면서 참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 터전에 심어놓으시고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돌보고 계심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관심이 많으시겠어요. 텃밭에 심어놓은 고추나 방울토마토, 피망, 상추 같은 것에 있어서도 제가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관심이 가는데 하물며 이것들과는 비교할 수조차도 없는 당신의 형상을 가진 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도 없겠지요.

  때 이른 봄에 장터에 가서는 호박 모종을 6개를 사서 심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시들시들하다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서리를 맞은 것입니다. 그 죽어가는 호박 모종이 그렇게 애처롭고 안쓰러울 수가 없습니다. 또 뜨거운 햇볕을 받아서는 축 늘어져 있는 작물들을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재들이 튼실할까?’ ‘물을 더 줘야 하나, 거름을 더 줘야 하나?’ 농사꾼 박씨의 마음도 이럴진대 하늘 농부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애지중지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선희 집사님의 카톡 배경 문구에도 보면 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써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만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121:5,6) 아멘.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우리를 택하셔서 이 터전에 심어놓으시고는 가꾸어 가시고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지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김천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이것 저것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으셔요. “그래, 야들아. 교회에 요새도 대구 집사님 오시나? 양 집사님 오시나? 양남에서 울산 집사님들도 잘 오시나?” “.” “아이구, 참 감사하다. 감사해.” 아버지로서 자식이 걱정 없이 사는지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이게 부모님의 마음이지요. 나실 제 괴로움과 기르실 제 애쓰셨던 부모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80대 부모가 50대 자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 차 조심하고 잘 보고 건너라.” 그러시는 것이지요. 이 부모님의 마음이 우리네 삶에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자라나는 세대가 있습니다만 혹 부모님의 표현이 좀 어설프고 어색하고 억새다 하더라도 그 마음만은 한결 같은 사랑이 있음을 잘 알아서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갖가지 것들을 싸 주십니다. 가죽 나물, 가죽 장아찌. 정말 기가 막힙니다. 포도즙, 거기에다가 교회당 연못을 만든답시고 기왓장하고 맷돌까지 다 실었습니다. 자식 놈들은 도둑놈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태어나서는 엄마 젖을 훔치고, 부모가 죽어서는 재산까지 다 훔쳐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거저 다 내주지요. 왜요?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아이하고 장을 보러 나왔습니다. 그날따라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았습니다. 양손 가득 물건을 잔뜩 들었습니다.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다 보니 시간이 좀 흘렀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정신이 아찔해지지요. 실성한 사람처럼 시장 구석구석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물론 두 손에 들었던 물건들은 땅 바닥에 놓고 말입니다. 온통 아이 생각에 물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닙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물어봅니다. 한참 뒤에서야 어렵게 아이를 찾았습니다. 정신이 돌아와 물건을 찾아보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습니다. 몇 개는 사람들이 집어갔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아이를 찾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에게 아이가 귀합니다. 엄마에게 아이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집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물건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지요. 그 동안 한 푼이라도 깎고 흥정하던 그 생각은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 무한 가치 앞에서 유한 가치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산 따위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가족 용어가 많습니다. 14,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했습니다. 15절에도 아버지’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했습니다. 17절에서도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그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 같은 교회였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떠난 뒤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은 교회였지만 그래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으로써 낳은 자식 같은 교회였기에 그 사랑의 끈을 한 시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어떻게든 온전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잡초를 뽑아주고자 하는 것이었고 벌레를 잡아주고 물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맘교회를 향한 여러분과 저의 마음 역시 참으로 각별합니다. 이 교회를 향한 우리네 마음은 참으로 애틋하고 애잔할 것입니다. 처음에 씨를 뿌려놓고서는 나나 안 나나?’ 몹시 궁금해요. 500원을 내고서라도 궁금하니 보고 또 봅니다. ‘다 죽어버리지나 않았을까?’ 애지중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그 마음이지요.

  다른 집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면서 그러고들 있을 수 있습니다. ‘되나 안 되나?’ ‘얼마나 가겠나?’ ‘너희들이라고 별 수 있겠나?’ ‘다음에는 누가 가겠나?’ 하고 말이지요. 우리네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여러분과 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에 심으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살려내라!!’고 하십니다.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살판나게 한 번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막중하고도 중차대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역사가 쓰여지게 될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큰 역사를 이 계획해 놓고 계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교회의 역사가 되고 기독교의 위대한 전승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슴으로 낳은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포항에서 종종 오는 최집사님네가 우리 교회 분위기를 보고 너무 좋다고 합니다. 마치 친정 같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웃어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너무 미안할 정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기들도 이 교회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뿜어내는 사랑의 열기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느껴보지 못하겠지요.

  우리네 삶, 우리네 가정, 우리네 교회가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웃어라는 말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힘내라는 말과 함께 힘을 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믿어라는 말과 함께 믿을 수밖에 없는 여건과 상황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웃을 수 있도록, 힘낼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도록 상을 차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잔이 넘칠 수 있도록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지 않습니까. 바로 거기에는 사랑과 헌신과 희생, 수고와 배려와 섬김이 잇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으로 잡았습니다만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다 내어주시지 않습니까. 다 내어주시고도 더 내어주시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여러분, 교회는 남자를 넘어서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여자가 넘어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팔뚝 같아야지요. 교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한 심령 한 심령을 안아주고 보듬어갈 때에 이 교회에서 자라가게 될 다음 세대와 장차 함께 할 모든 세대들이 쉼과 힘을 가져가면서 위대한 역사를 창출해가는 주역으로 우뚝 서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귀한이라는 말을 자주 쓰니까 성결이가 하는 말이 아빠는 맨날 그 말을 쓰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몇 마디를 곁들었습니다. “봐라. 원래 사람이 귀하잖아.” “그 귀한 사람이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선수가 되어야지만 되는 것이 아니야.” “며느리가 한 명 잘 들어오면 집안이 완전히 좋아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며느리는 그 집안에서 아주 귀한 사람인 것이야.”

  아들 셋 중에서 막내아들이 그 집안에서 가장 귀할 수 있습니다. 둘째 딸이 온 집안을 아우를 수 있을 때 참으로 귀하지요. 직장 동료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너에게 만큼은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랬을 때에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당사자는 아주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집 사람들끼리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사이가 될 때에 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모든 이들은 아주 귀한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 귀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귀하고 놀라운 역사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말만 가지고서는 안 되지요. 말만 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받을 만한 삶을 보여주는 이들을 통해서 역사는 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말하는 이들을 통해서 역사는 써지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그랬어요. 여기서 말하는 일만 스승은 쉽게 말해서 가정교사로 보면 됩니다. 이 가정교사는 아이에게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이 가정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일만 스승으로서의 가정교사와 아버지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같은 아이를 두고 상대하는 것이지만 지식만을 전해주는 가정교사와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내어줄 수 있는 아버지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고린도서신을 쓸 때에 그 교회에는 참 많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들이 있었지만 그저 그들은 얄팍한 지식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말과 삶은 괴리를 드러냈습니다. 삶으로서 그 말들을 증명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말만 넘치는 홍수 속에 고린도교회가 힘들어졌던 것입니다.

  또한 그 지식을 전하면서도 자신들을 얼마나 교만하게 높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그랬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말은 참 잘하지요. 어떻게 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몰라요.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말 좀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지만 개인의 삶과 공동체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변혁시켜내지는 못하지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일만 스승이 많았던 그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고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집사람과 제가 신나게 다투고 나서는 토라져 있는 아내를 풀어준다면서 사랑해.” 그러면 집사람이 맨날 말만 하지. 이젠 그 말도 지겹다.” 그래요. 말로써만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요. 사도 요한이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고 했습니다. 손과 발이 없는 입만 가지고서는 그 어떤 사람이나 자리도 온전히 세워 내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으로써 낳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자기를 본받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라.’ 우리는 여기에서 그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향해 진심과 정성을 쏟았을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좋은 가르침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지요. 지식이나 논리가 부족해서 힘들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앞에서 저 역시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본받을 만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바울처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누군가에게 저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오늘 주일이 어버이주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만 온전하게 자라나 장성해진 자식에게는 꼭 그 자식을 위해 뒷바라지를 하느라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부모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유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제자들에게 이 중에서 어미의 뼈를 찾아낼 수 있겠느냐?” “아니 스승님, 뼈를 보고 어떻게 어미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 “아니다. 어미의 뼈는 다른 뼈와 달리 뼈가 으깨어지고 텅 비어 있단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지.”

  제가 아이들 축구를 시키면서 많은 감독들을 봐 왔습니다. 비록 그 감독들이 축구를 가르치는 기술에 있어서는 부모들보다 나을지 몰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처세술을 보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곁에다 두고 써먹을 뿐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으면 여지없이 내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봐 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봐왔던 그 많은 감독들이 우리 아이들로 인해서 애를 태우거나 속을 끓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들로 인해서 밥을 못 먹거나 잠을 못 자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달린 장래에 있어서 골머리를 앓으면서 고민해주고 같이 기도해주는 이를 여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중학교 때에 같이 축구부에 있었던 후배 선수의 부모님들께서 우리 아이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뼈에 좋다는 가시오가피 4박스를 들고서는 부산에서 직접 이 경주에까지 와서는 전해줍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3부류의 사람들하고는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 부동산 중개업자, 중고차 판매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구부 감독.”이라는 것입니다. 심하게 표현을 쓰면서 자기는 인간 같지 않은 놈들하고는 밥을 절대로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감독들이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은 감독과는 다르지요. 아이가 아프면 같이 아픕니다. 아이가 울면 같이 웁니다. 아이가 속상하면 같이 속상합니다. 단물만 빨아먹고서는 뱉어버리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부모는 당신의 시간과 당신의 몸, 당신의 기도와 당신의 꿈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어줍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한 어머니가 한 번은 어린이집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아드님은 산만해서 단 3분도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칭찬하셨어. 의자에 앉아 있기를 1분도 못 견디던 네가 이제는 3분이나 앉아 있다고 칭찬하시던 걸. 다른 엄마들이 모두 엄마를 부러워하더구나!” 그날 아들은 평소와 달리 밥투정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밥을 두 공기나 뚝딱 비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어머니가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드님 성적이 몹시 안 좋아요. 검사를 받아보세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너를 믿고 계시더구나. 넌 결코 머리 나쁜 학생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번에 성적이 많이 오르겠다고 하시더구나.” 어머니 말씀이 끝나자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훨씬 착하고 의젓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중학교를 다닐 때에 담임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드님 성적으로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건 좀 어렵겠습니다.” 어머니는 교문 앞에 기다리던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라.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 아들은 더 노력해서 좀 나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명문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대학 입학 허가 도장이 찍힌 우편물을 어머니의 손에 쥐여 드리고는 엉엉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란 것을 저도 잘 알아요. 어머니의 격려와 사랑이 오늘의 저를 만드셨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들이 있지요. 그것은 사람을 돕고 키우는 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어야지 지식과 논리로 키우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지식과 이론으로 키운다면 교육학 박사 자녀들이 가장 훌륭하게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온전한 인격과 원만한 성품을 갖춘 인물로 자녀를 양육해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바르게 세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절감하곤 합니다. 모두들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다 가지고 계시겠습니다만 그게 생각만으로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있어서도 똑같겠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두고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말 뿐이야.’ ‘저 사람은 말 밖에 없어.’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럽니다. 말만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그러면서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희생만이 희생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여러분,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로 세워내는 것, 우리의 가정과 가문을 신앙의 명문가로 세워내는 것, 우리가 속한 이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내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만으로 세워낼 수 있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그 능력에는 사랑과 용서, 치유와 회복, 섬김과 희생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는 십자가의 능력이어야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과 교회를 온전하고도 힘 있게 세워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안팎을 돌아보면서 또 치울 게 없나? 뽑을 게 없나? 손은 긁히고 입술이 부르크고 허리는 좀 아파도 또 치울 게 없는지 뽑을 게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힘은 들어도 재미가 있고,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양육하면서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겠지요. 내어주는 귀한 사랑으로 귀하고 복된 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8 주님께 꾸어 드리기
47 청년은 비전을, 노인은 꿈을!
46 지상천국, 가능한 일일까?
45 그 가운데서 으뜸은 생각입니다!
44 폭풍전야, 그리고 평화의 아침
43 낭중지추(囊中之錐)
42 구글 신, 야훼 신
41 진화하시겠습니까, 도태되시겠습니까?
40 천국의 스마트키
39 천사가 되어가는 과정
38 내 인생 광내기 +2
37 한울교회 여신도주일
36 기름 값 ― 2018.3.13 목사 은퇴/임직예식 설교
35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34 나 때문에(고난주일)
33 믿음과 소망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부활주일)
32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31 고넬료 그 사람
30 어떤 하루
29 누가 크냐?(어린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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