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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2018.04.16 10:41

박정철 조회 수:16

설교자 박정철 
설교일 2018-04-15 
설교장소 한맘교회당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6:1-11)

 

 

 이전부터 제가 좋아했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신앙고백은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하게 저의 삶 가운데에서 확인됩니다. 내 걸음을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나는 과정에서 보면 이 고백이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처한 자리보다 더 나은 자리로 옮겨질 때에는 이 고백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더 못한 자리로 보이는 자리로 옮겨지게 될 때에는 이 고백을 선뜻 내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을 때에 담임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몇 번에 걸쳐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는 다음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연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곳이면 그곳에 다섯 명의 교인만 있어도 자기는 갈 것이다.” 그 이야기를 자기는 자식들에게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 저 분은 굉장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어떻게 다섯 명 밖에 없는 교회로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저럴 수 있을까? 나는 못한다.’ 그랬어요. 그런데 몇 년의 세월이 흘러서 보니까 그 분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가셨고, 저는 정말 다섯 명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와 있게 되었습니다. 시원찮은 믿음인지라 어떤 보장도 되어 있지 못한 자리에는 결코 갈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저를 하나님께서는 이 곳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겠지요. 믿음의 훈련 장소로 이 곳을 택하신 모양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오직 잡초와 빚더미로 무성하게 덮여 있던, 무더위와 무기력으로 넘쳐나던 이곳을 믿음을 훈련시키기에 최적의 장소로 보신 모양입니다. 늘 고백했던 그 신앙고백,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라는 그 고백을 여기에서도 토해낼 수 있기를 바라셨나 봅니다. 믿기 어려운,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이 상황에서도 믿음을 온전히 가져가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저희가 작년 711일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 날은 너무 더웠습니다. 40도를 육박하는 날씨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개 팔자가 상팔자로 보이는 그런 때에 이삿짐을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요. 와서 보니까 집안은 기울어져서 영 비뚤어져서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때는 장판 색깔이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릅니다. 집밖은 잡풀과 잡목으로 얼마나 우거져 있었는지,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한 산길을 걸을 때처럼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몇 날을 보내는 동안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졌습니다. 고문으로 다가왔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보다 기도를 하는 것이 더 힘들 때였습니다. 기도한다고 과연 뭐가 달라질 것인가? ‘빚과 잡풀과 씨름하다가 시름시름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정 떠나고 싶었으면 좀 더 참다가 좋은 자리가 생기면 그때나 옮길 것이지. 왜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는 이 고생을 해야 되는 것인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신학교 동기회에 가서 약간 뻥을 곁들여서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분위기가 사뭇 엄숙해지고, ‘눈물 없이는 못 듣겠구나!’하는 표정들입니다. 그때 제가 두 손을 벌리고서는 동냥을 하듯이 하면서 나지막하게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오늘 본문에 여리고성이 나옵니다. 이 성은 너무나 견고한 성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감히 함락시킬 수 없는 성입니다. 아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일진대, 왜 굳이 이 성 앞에 있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실진대, 하필 이 여리고성을 마주하게 하시느냐. 이왕 주시고자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면 그냥 쉽게 쉽게 들이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그들 백성들로 어렵고 힘들게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실진대, 쉽게 가는 길을 걷게 하실 것이지 왜 이토록 힘든 길로 내모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녀들인 우리를 저 가나안 복지 귀한 성인 천성에 들이실 것이면 편안하게 꽃길만 가게 하실 것이지 엉겅퀴 도깨비 풀이 우거진 가시밭길로 내몰 듯이 가게 하시는 이유는 그 무엇이란 말이더냐.

 성결이가 무릎 수술을 하고 재활 중에 있습니다만 고통스러워하면서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그 노래를 부르는데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짠한지 모릅니다. 왜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쓰리고 아린 고통의 때를 거쳐 가야만 하는 것일까. 저도 학창시절에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를 못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습니다만 꼭 이런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것인가.

 오늘 여러분, 우리네 인생들이 살아냈던 삶들을 보면, 앞으로 살아내야 할 세월들 속에서 우리는 정말이지 피했으면 하고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이런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그 여리고성을 피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마주하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리고 아린 그 고통의 자리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을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쉽게 가면 믿음이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쉽게 쉽게 가면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를 못합니다. 쉽게 쉽게 지어진 집들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심령과 삶의 반석을 당신으로 든든하게 받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거나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가 가는 길에 여리고성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여리고성을 만났을 때에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게 어떤 잘못된 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이렇게나마 믿음을 지키면서 버티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고난의 때를 보내게 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와 우리들에게 있어 이 한맘교회는 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자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헛웃음을 칠 때가 많았는데 좀 지난 이제는 너무 신나게 웃어서 입이 다 아플 정도입니다. 이번에 동기들이 모여서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참으로 많이 웃었습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음에도 마치 엊그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명이 그럽니다. “,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때 속으로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주 웃는데.”

 

 

 오늘 이 본문과 함께 전개되는 여리고성 함락 사건은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힘들지요. 여리고성은 견고한 요새요 그 성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입니다. 거인족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딱 봐도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승산이 없어 보입니다. 전투를 벌이는 것이 무모한 객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작전을 내려주실 때입니다. 그 작전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무너뜨릴 여리고성을 육일 동안에는 한 바퀴를 돌고 칠일 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서 마지막에 큰 소리를 치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이라는 작전입니다. 요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말씀을 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유혹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과연 그러한 방법으로 그 성이 무너질 수 있을까?’라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성을 돌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어쩌면 참 한심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우리가 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다고 되겠는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을 앞에 두고서 먼저 또 하나의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 내면에 있는 의심과 불신의 여리고성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지요. 우리도 믿지 못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습니까. 더 이상 믿지 못하면 불신하게 됩니다. 이들 백성에게 있어서의 전쟁은 바로 믿음과 의심의 싸움입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과 불신과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을 뛰어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어떤 사건이나 삶의 정황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나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짓누르게 됩니다. 불안과 염려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 있게 시작은 했지만 그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새해맞이 큰 포부를 밝혔지만 현실에 직면해서는 그 포부가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연초에 우리 교회가 자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만 지내다보니 그런 생각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전혀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치부하고서는 괜히 툭 던져놓은 듯한 말로 인해서 곤혹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안 되면 마는 것이지정도의 생각으로 후퇴해버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제 삶 가운데 하나님을 포함시키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너무나 자주 그렇습니다. 여건과 처지는 살피면서도 여건과 처지를 넘어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보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계산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산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는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제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다보니 줄어드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가 줄어들다보니 당연히 생각과 삶도 역시 줄어들고 좁혀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해가 떠서 아침이 열릴 때처럼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없는 곳에서 만물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주어진 상황 가운데에서 그 분의 절대적인 도움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목동 다윗으로 적장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해 주신 하나님, 100세의 아브라함으로 아들을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이실진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주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소중을 기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방법으로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에서 떠나보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 할 수 있는 여리고성 앞에 있다 할지라도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홍해에서 건너게 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반드시 가져야만 합니다. 애굽에서 홍해에서 역사해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대할 수 있어야 하지요.

 처음에 제가 단독 목회지로 갔던 교회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보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는 남은 분들이 교회당을 처분하고서는 수련관으로 개조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이 다 끝이 난 것처럼 여겨졌던 그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부족한 저를 보내시고는 돕는 이들과 함께 그 교회를 세워내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가 어떤 보조도 받지 않고서 영혼을 구원하고 지역 사회를 섬겨 가고 있습니다이전 교회에도 처음 갔을 때,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에 한 분님이 그러십니다. “목사님, 목사님 오시기 전에 저는 이 교회가 완전히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 교회가 일어났네요.”

 오늘 이 교회에 있으면서 이전 교회를 도우셨던 하나님에 대한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려봅니다. 이 자리에서 이전에 도우셨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 도우실지는 다 알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당신께서 도우실 것을 믿고 순종하며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싶어도 믿음이 없으면 역사하시지 않으시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 때에 보면 당신을 따르는 이들로 그들의 재능이나 학벌, 신분 같은 것들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믿음만을 보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크고 기이한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던 그 믿음을 우리도 가짐으로 우리도 똑같이 칭찬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점이 눈에 띕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그 입에서 어떤 말들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려야만 했을까요. 어떤 말도 내지 말라고 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 어떤 말에는 엉뚱한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투덜거리고 부정적인 말투가 섞여 나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 백성들은 이미 견고한 성을 앞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판이었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싸움처럼 보였기에,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기선이 제압당해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희한하게도 작전이라는 것이 칼과 창으로 하는 작전이 아니라 하루에 한 바퀴씩 그냥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 백성들이 그 성을 돌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돌겠네.’ ‘정말 돌아버리겠네.’ 그럴 수 있었겠지요. 말 같지도 않는 짓을 한다고 투덜거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만나거나, 위기에 빠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되면 너무나 쉽게 체념을 합니다. 짜증을 부리고 신경질을 냅니다. 분노를 터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그 파괴력은 가히 놀랍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한 두 명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말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저들 역시 예전의 조상들처럼 밤을 새워가며 울며 곡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이전의 상황을 똑같이 답습하게 될 것이지요. 결국 그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들 때문에 광야 1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뱉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영향이 크게 드러나는지 모릅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을 보십시오. ‘아이고 죽어도 공부는 못하겠다.’고 하지요.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먼저 입술로 사표를 냅니다. ‘못해 먹겠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 한마디가 침울하게 만듭니다. 어둡게 만듭니다. 그 말 한 마디가 모두의 마음에 의심과 낙심을 가져다줍니다.

 성경 잠언에서는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18:21) 했습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13:3) 우리의 입술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일수록 입술을 재갈을 물리고 입술에 파수꾼을 든든히 세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실 때에 우리 인간들이 입을 열어 떠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실 때에 이렇다 저렇다,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우리의 입술을 닫아놓고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바라야 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62:1) 아멘.

 

 제가 한맘교회에 오면서부터 지금까지를 쭉 보면 이런 저런 말들을 참으로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곳임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한숨과 체념이 짙게 깔릴 때도 많았습니다. 실망과 절망을 심하게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그간에 뿌린 생각과 말의 씨앗을 거두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 오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역사를 잠잠히 묵묵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여리고성을 13바퀴를 돌았지요. 육일 동안은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칠일 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서, 13바퀴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만 돌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서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3바퀴 중에서 12바퀴만 돌고 포기했더라면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500원까지 동전이 채워져야 자판기 커피가 나오는 것인데, 490원만 넣고 나머지 10원을 넣지 않았다면 자기가 마시고자 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병이 들었던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여섯 번만 씻고 나왔다면 그 병은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섯 번 씻어도 전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나와 버렸다면 그는 그 병을 평생 죽을 때까지 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여섯 번까지만 기도하고 마지막 한 번 더 기도하지 않았다면 36개월 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는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포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크고 놀라운 축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있습니다.  어떤 고비가 찾아옵니다. 그럴 때에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126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씨를 심어놓고 나지 아니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염려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려지는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봤을 때에 불안과 염려는 병이라기보다는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혹시 여러분, 어떤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회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잘못이 불안과 염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지요. 묵묵히 주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할 뿐입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글귀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제일 그레이라는 사람이 믿음의 위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실감을 담대히 극복하고, 실패와 비탄으로 인해 약해지는 마음과 싸우며, 눈물이 앞을 가릴 때에도 밝게 웃을 줄 알고, 질병과 악인에 대해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될 상황에 처하더라도 꿋꿋하게 삶의 행진을 계속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기대하고 말하는 것이 위대함이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며, 그럴 수 있을 때 사람은 위대한 존재가 된다.”

 

 설교의 제목을 까짓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로 잡았습니다. 어떤 세상적인 것들이 많아서 잘 사는 것만도 아니고 없어서 못 사는 것만도 아니지요. 성도로서 믿음으로 살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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