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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Worship in Spirit and Truth: Be a Community of Life, Peace and Wi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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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 총신대 교수 

오늘날 조국교회 안에서 실천되고 있는 관상기도(觀相祈禱) 운동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고조되고 있다. 향심(向心)기도 혹은 센터링기도(centering prayer)로도 불리고 있는 이 기도운동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와 복음주의교회를 막론하여 활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다. 이미 국내의 여러 신학대학교에서도 이 운동을 지지하는 교수들의 주도 아래서 정기적으로 기도모임들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들과 영향력 있는 지역교회들이 주관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위한 관상기도 세미나가 자주 개최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관상기도를 실천하고 그 방법을 교육하는 개신교 수도원들도 생겨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미국에서 퇴조하기 시작한 마케팅교회 시대 이후의 새로운 목회(牧會)의 방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머징교회(emerging churches)의 등장과 레노바레운동의 확산과 함께 관상기도의 실천이 개신교 안에서 새로운 영성계발 방안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러한 동방교회(東方敎會)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향수는 현대인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갈에서 비롯된 종교적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관상기도의 실천에 대하여 우리가 우려하는 바는 그것이 종교적 신비주의나 인본주의적 심리학, 나아가서 종교다원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관상기도운동에 대해서는 복음주의(福音主義) 안에서도 학자들마다 혹은 목회자들마다 각각 서로 다른 판단들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건전한 신학적 판단을 따를 때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목회자들 개인이 관상기도에 대하여 내리는 판단이 어떠하든지 간에,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관상기도의 뿌리는 가깝게는 기독교 신비주의이며, 멀게는 종교일반의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심화된 기독교 신비주의일수록 이교적 신비주의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종교다원주의에 쉽게 노출된다. 

관상기도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이미 많은 논문과 저술들이 나와 있다. 또한 최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열띤 논쟁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의 내용들을 여기서 모두 제시할 필요는 없고, 또 이러한 포괄적인 정리 작업은 본 논문의 의도 밖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관상기도운동의 사상적·문화적 배경과 함께 특별히 신학적 문제점들을 성경과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목회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상(觀想)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관상이란 라틴어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의 번역이며, 이에 대한 희랍어 동치어는 테오리아이다. 이 단어는 동사 테오레오에서 왔는데, 이 동사의 의미는 “지속되는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다” 혹은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다”라는 뜻이다. 1) 이것은 일찍이 그리스철학에서 플라톤(Platon)이 인간이 초월적인 세계와 사실들을 인식하는 직관(intuition), 혹은 체관(諦觀)과 같은 것인데, 이는 한편으로는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에 속하는 것으로써 경험에 기초하여 어떤 사물에 대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즉각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2) 

관상기도란 신비주의 철학과 종교에서 행하는 직관, 혹은 체관 행위를 기독교적 기도 행위와 접목한 것이다. 기독교의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지성을 사용하여 인간의 언어로써 마음 안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간구의 행위라면, 관상기도는 지성이 아닌 가슴으로써 하나님을 침묵 속에서 체관함으로써 친교의 상태에 이르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관상기도는 교회와 단체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태를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상을 중심에 둔 명상 형태의 기도이다. 

2. 관상기도운동의 사상적 배경 

첫째로, 신비주의를 지지하는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다. 물병자리 시대라고도 불리는 이 시대는 인간이 신화(神化)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시기이다.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도를 황도(黃道)라고 하는데, 십이궁도(十二宮圖)는 이 황도를 원주로 하는 천구(天球)에 투영하여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 등이 어떤 특정한 시각에 나타내는 상대적 위치의 배열들을 가리킨다.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성, 전갈, 공수, 염소, 물병, 물고기자리가 그것인데, 뉴에이지를 신봉하는 자들은 물병자리 시대가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병자리 시대(Aquarius age)는 1960년대에 시작되어 약 2천 년 간 계속될 것인데 이 시대의 주제는 인간세계에 대한 신의 내재이다. 이 시대에는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신(神)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뉴에이지라고 부른다. 3) 고유한 의미의 관상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기도의 형태를 띤 일종의 명상인데, 이러한 실천의 궁극적 목표는 자아의 고양(高揚)이다. 관상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를 우주의 신적 본질과 일체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4) 관상기도는 성경의 진리와 교리의 체계들을 아는 지식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지성적인 교통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적 관조(觀照)에 의하여 신적 본질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접 상태에 들어간 자아를 관상기도운동가들은‘고양된 자아’(higher self)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과의 일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관상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도달하는 자아에 대한 의식을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자아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그리스도론적 범신론의 사고방식이다. 

둘째로, 중세의 신비주의(神秘主義)이다. 많은 학자들은, 관상기도의 뿌리가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막 교부들에게서 기원한다는 판단에 일치를 보고 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수도사들의 명상법과 생활의 규칙은 고대 힌두교와 불교의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5)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중심으로 한 4세기의 은둔 수도사들이었던 이들은, 세속을 떠나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며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근심과 걱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포기하고 세속과의 접촉을 최대한 단절한 채로 억제된 수면과 고행, 그리고 노동을 통하여 수덕(修德)에 힘썼다. 6) 

이러한 중세 신비주의는 이미 초대교회 교부인 오리겐(Origen)의 사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로서 플라톤의 신비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관념론자였던 그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라서 최고 이성을 아는 영들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들은 죽음 이후에 불로써 정화됨으로써 신에게 합치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리겐은 필로(Philo of Alexandria)를 플라톤주의로 재해석했던 선배들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7) 그는 모든 만물은 신적 이성을 통하여 원 존재(original being)로 회귀하는데, 이것이 바로 만물의 우주적 순환 과정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았다. 8) 따라서 그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범신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오리겐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성은 대(大) 마카리오스(Makarios, 330~390) 그리고 그의 제자 유아그리우스 폰티 코스(345~399) 등에 의해 신비주의로 발전한다. 

중세후기에 와서 이러한 신비사상들은 빙엔의 힐데가드(Hildegard of Bingen, 1098~1179), 시에나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Siena, 1327~1380), 마에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Johannes Eckhart, 1260~132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 <무지의 구름>의 저자,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1416) 등의 신비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셋째로, 유대주의 안에 있던 까발리즘(Kabbalism)의 영향이다. 까발리즘은 스페인과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한다. 유대교는 원래 신비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지만 계속되는 민족적인 박해와 고통 속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리를 통해 신정론(神正걩)의 답을 얻지 못한 소수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현재적으로 겪는 고난은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신적 징벌로써 이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영혼 윤회설을 지지하고 있는 세페르 하 바히르(Sefer ha Bahir)라는 유대 신비주의의 문헌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문헌은 악 자체를 신적 구조 자체의 일부분으로 보아 마치 마니교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선악에 관한 교리를 지지하고 있다. 10) 이 까발리즘은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형태와 개념 너머에 있는 하나의 지혜로부터 계층화된 일련의 신적인 속성들을 통해 신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성취해 간다는 교리를 지지한다. 11) 르네상스 이후에 유대교의 까발리즘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서 기독교의 신비를 설명하는 기독교 까발리즘(Christian Kabbalism)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관상기도는 이러한 신비주의 사상 속에서 실천의 근거를 확고히 해왔다. 

넷째로, 종교개혁(宗敎改革) 시대와 근대 이전의 신비주의이다.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비주의운동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13세기에 가톨릭 안에서 일어났던 개혁 운동에서 추구되었던 바들이다. 번쇄한 신학의 이론들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본받으며 청빈과 복종, 고행, 헌신을 맹세하며 수덕의 삶을 살았던 새로운 수도자들의 운동이 신비주의와 함께 하였다. 이러한 신비주의운동들은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활발해져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von Loyola, 1491~1556),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3),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or Nicholas Herman, 1614~1691),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0), 잔느~마리 귀용(Jeanne~Marie Bouvier de la Mothe Guyon, 1648~1717)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다섯째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범신론(pantheism)과 내재신론(panentheism)의 확산이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자가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범신론적이고 내재신론적인 주장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관상기도운동은 이러한 신관들의 지지를 받는 신비사상(神秘思想)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철학과 역사 해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르네상스 이후 낭만주의 시대까지 널리 유행하였다. 조르나도 부르노(Giordano Bruno, 1548~1600),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그리고 헨리모어(Henry More, 1614~1687)를 비롯한 17세기의 신플라톤주의자들(The Cambridge Platonists), 고트홀트 레싱(Gotthold Lessing, 1729~1781),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등의 인물이 이러한 운동에 기여하였다. 12) 

더욱이 19세기 이후 확산된 내재신론의 부흥의 물결을 타고 이러한 관상기도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안에서 상당한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19세기에 와서 고전적 유신론은 훨씬 더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만드셨으나 본질적으로 창조세계와는 다른 분이시며 전적인 타자로서 영원하고 불변하며 초월적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유신론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집요한 이론적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고전적 유신론이 가진 한계 곧, 악의 원인에 대한 미흡한 설명,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대한 극도의 제약, 그리고 영원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성 같은 논제들 때문이었다. 13) 

고전적 유신론(有神論)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내재신론(panentheism)을 따랐다. 이들의 내재신론은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보는 대신 존재론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동시에 모든 세계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사상이다. 그들은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의 견해를 따라 신-정신-세계-영혼-세상-영혼-세계-정신-신의 순환적인 교통으로써 신적 본질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신(神)으로서의 일자(一者)와 세계의 정신, 인간 영혼 사이의 역동적인 순환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공식으로써 세계(世界)와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의 본질도 세계와 함께 형성(形成)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그 신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신은 같은 운명으로서 세계 안에 함께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인간을 신격화함으로써 인간의 자율이 신의 통치의 일부분이라는 신(神)-세계, 신(神)-인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재신론 사상들은 신학 안에서 테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의 그리스도 중심적 내재신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신학, 신학적 우주론 안에서의 내재신론을 주장한 이언 바버(Ian Barbour, 1923~), 폴 데이비스(Paul Davies, 1946~), 아서 피코크(Arthur Peacocke, 1924~2006),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1955~),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14) 

여섯째로, 레노바레(renovare) 영성운동의 영향이다. 레노바레 영성운동은 원래 퀘이커 교도인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에 의해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운동으로서 영성 훈련을 위한 운동이다. 퀘이커 교도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따라, 리처드 포스터는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내적 광명’(Inner Light)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자아 체험을 통하여 진리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기도>라는 책이 출판될 때만 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서의 기도에 대한 강조가 신비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러한 기도의 실천이 관상기도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가 퀘이커교도임을 안 사람들 만큼이나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리처드 포스터 사상의 실체는 레노바레 운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레노바레 운동에서 가르치고 있는, 신앙에 있어서의 관상적 차원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강조와 단순한 정적으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관조적 신비 상태로서의 침묵을 통한 기독교적 만트라(mantra)의 실천과 호흡기도, 무념(無念)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체험 추구는 관상기도운동의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관상기도운동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리처드 포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레노바레 운동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15) 

3. 관상기도운동의 사회문화적 배경 

오늘날 신비주의 운동의 일부인 관상기도(觀相祈禱) 운동이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며 전파되고 있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유물론과 통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학주의(科學主義)의 합리적 사고 속에서 현대인들은 신비한 것들을 더욱 동경하게 된다. 판타지 문학이나 영화, 그리고 동양의 신비종교에 대해 급증하는 서구의 관심과 같은 것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사회·문화 심리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1) 현대사회와 자아 상실감 
첫째로, 현대사회와 자아 상실감(喪失感)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재화의 대량생산,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발달과 치열한 경쟁사회, 과도한 물질주의 속에서의 현대인의 자아의 상실감은 과학과 이성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종교적인 욕구들을 자극하였다. 현대인들은 과도한 소비사회 속에서 그것을 누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며 이 속에서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발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즈(David F. Well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이 점점 더 풍족해지기는 했지만 훨씬 더 얄팍해지고 삶의 목적도 더 모호해졌다. 사람들은 삶이 그 실재를 잃어버린다는 자기 느낌을 점점 더 뚜렷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16) 

현대인들은 원인 모를 두통과 불면증, 신경성 위장장애와 각종 공해로 말미암는 질병들과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들로 말미암아 시시각각으로 죽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현대인들은 자아에 대한 심각한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관상기도는 자아(自我)를 찾는 수단으로서 명상이나 참선의 체험처럼 일반적인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관상기도운동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은 종교적 현상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은 지적될 가치가 있다. 마치 탬플스테이(temple stay)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모두 불교(佛敎)에 귀의하고자 하는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이러한 관상기도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제를 나누기 위한 욕망을 가지기 위한 사람들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와 대면하기 위하여 침잠하며, 욕망과 표상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작업은 번민을 제거하고 심적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강한 매력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문화심리적인 측면들이 관상기도운동의 확산에 이바지하고 있다. 

2)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 
둘째로,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현대인의 염증은 원시에 대한 동경(憧憬)과 자연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편리하고 기계적이며 감각적인 것들에서 만족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영적인 것을 찾는 것은 불안으로 인하여 관계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17) 발달될 통신수단은 격자(隔者)들 간의 거리감을 사라지게 하였고 정보들의 교환을 촉진하였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더욱 다른 사람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현대인의 정신적인 특징이 고립감(孤立感)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러한 내적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뿐 아니라 또한 신비한 것을 동경한다. 한편으로는 비과학적인 것을 배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새로운 정신적·영적 체험들을 갈망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을 위한 두 출처는 학문(學問)과 종교(宗敎)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이성과 신앙이기도 하다. 다만 신에 의하여 어떤 규범적인 생활을 강요받는 종교 안에서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신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여 분출시킴으로써 스스로 종교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이다. 이러한 욕구의 만족을 위해서는 자기 밖에 있는 영적인 세계이든지, 혹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요소이던지 간에 어쨌든 영적인 세계와의 접촉이 필요한데, 관상기도를 비롯한 신비주의운동들은 현대인의 이러한 종교·심리적 욕구에 호응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이런 내적인 모순이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에서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영성(괈性)에 대한 새로운 추구에서 뚜렷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영성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증거를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일부 영화가 천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자본화하는 현실에서도 이런 증거는 분명 하다. …내면에서 신의 음성 듣기로부터 시작하여 심령술에 대한 몰두, 수정 구슬과 여러 가지 뉴 에이지의 물품 사용 등 급격히 확산된 뉴 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경험에 여전히 남겨진 공허함을 말해주기도 한다.” 18)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가톨릭 어느 종교이든지 간에 오늘날 그 종교 안에 있는 확산되고 있는 신비주의적 운동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현대인들의 욕구가 그것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상기도운동은 특별히 도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신수행과 신비체험의 추구를 합치시킨 새로운 형태의 영성운동이기 때문이다. 

3)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 
셋째로, 현대인의 자아(自我) 중심의 실용적 사고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 자신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H. Maslow)가 인간 욕구의 단계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 최종적인 단계를 자아실현으로 규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 전통적으로 인간은 사회의 제도와 관습, 윤리의 틀 속에서 타인들과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실현하는 것을 적절히 억제함으로써 행복에 이르고 덕(德)을 쌓을 수 있다고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규율할 절대 가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선악(善惡)에 대한 판단 자체가 인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선악의 기준을 배격하면서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복해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범신론적인 사유가 오늘날 다시 각광을 받으며 새로운 형태의 내재신론과 과정신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바로 현대인의 이러한 문화적 코드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신화(神化) 이론은 현대인들의 이러한 욕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학적인 접촉점들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을 신적 존재로 보기 위해서는 개체적인 인간 안에 보편이 있다고 보고 이 신적 보편을 토대로 우주적인 연결을 강조하여 인간 존재의 신격화, 인간 안에서의 신의 내재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20) 이런 사고의 구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죄악 된 존재로 보는 대신 스스로 신을 관조(觀照)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신과 합일을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문화적,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는 논리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기독교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탈신학적인 입장에서 관상기도를 자아실현(自我實現)에 활용할 수 있다. 관상기도의 실천이 종교다원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4. 관상기도운동의 신학적 문제점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관상기도운동은 단순한 기도 실천에 있어서의 문제점보다도 그러한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기초들이 심각한 오류(誤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되고 경건한 실천은 올바른 신학에서 나오며, 건전한 영적 생활은 이 둘을 연결하는 원천이 된다. 이 문제를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관상기도운동의 뿌리가 되는 사상들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어서 관상기도운동에서 주장하는 기도에 대한 견해가 성경과 개혁신학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이고자 한다. 

1) 인간론 
관상기도가 지지하는 인간관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믿어온 인간론(人間걩)과는 많이 다르다. 더욱이 개혁신학에서 가르치는 인간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고유한 의미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다고 본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한 불명확한 견해이다. 관상기도에서는 원죄(原罪)와 부패성(腐敗性)의 개념도 희미해지거나 실종된다. 인간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정화되면 하나님과 일체가 될 존재이다. 관상기도가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을 버린 것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 존재에 대한 비성경적 개념 
첫째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비성경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이미 연합된 존재이며, 관상기도는 이미 있는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다음 언급에서도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된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22) 이처럼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神秘主義)에 기초하고 있다. 

가톨릭의 사제인 윌리엄 쉐논(William H. Shannon)은 <평화의 씨앗>(Seeds of Peace: Contemplation and Nonviolence)에서 인간이 처한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신과 하나임을 잊어버린 이 망각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집단 경험이다. 사실 여기서 원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신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낙원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다.” 23)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비록 영혼을 가진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교통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상의 모든 사물들 중 인간의 영혼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모든 사물들과 구별된다. 첫째로는,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모든 물질적 사물들과 구별되는 실재이다. 둘째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의 탁월성이다. 인간의 영혼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피조물들의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뚜렷한 구분점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본질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인간의 영혼 속에 침투하여 합일을 이루거나 혹은 반대의 방식으로 일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과 피조물이 인간의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성령 안에서의 관계적인 교통을 본질적인 침투와 빈번하게 혼동한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범신론적 사고를 가진 신비주의자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는데, 이러한 예를 우리는 16세기 신비주의자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에게서 발견한다. 관상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하여 진술한 그의 다양한 비유들 속에서 신(神)과 인간 영혼의 존재론적 합일을 추구하는 범신론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여기에서는 마치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가 강이나 샘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단지 물만이 있을 뿐이며 하늘로부터 떨어진 물과 강에 속한 물을 나누거나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연합은 마치 두 양초의 끝이 결합된 것과 같아서 거기에서 나오는 빛은 하나가 되며, 심지와 초와 빛은 모두 하나가 된다.” 24) 

② 죄와 타락에 대한 불분명한 개념 
둘째로, 죄(罪)와 타락(墮갳)에 대한 개념이 불명확하다.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 즉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이 철저하게 타락하여,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철저하게 절망적이고 부패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다. 관상주의를 주창한 토마스 머튼은 참 자아와 거짓 자아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거짓 자아를 벗어 버리고 참 자아를 발견해야 하며 이것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옛 사람과 새 사람과는 다른 개념이며 중생,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이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상을 통해서 본래 자기 모습을 찾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25) 

이에 대하여 윌리엄 쉐논은 타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인간론으로부터의 신학적 이탈을 분명히한다. “타락이란 우리가 우주의 품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고, 관 상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체험한다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명사이다.” 26)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역시 원죄는 인간인 우리가 행한 개인적 잘못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의 참된 자아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의 참된 자아가 지닌 선이 우리의 존재의 기본적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27) 이것은 범신론 내지는 내재신론자들의 인간론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lard de Chardin)의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주의 진화와 발전을 주도하는 초월적 하나님의 현실적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세계와 우주를 신적정신으로 하나로 만드시는 존재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오메가 포인트와 동일한 특성을 가진 존재이며, 우주의 궁극적 통일을 위해 초자연적 역할을 하는 주인공임을 의미한다. 즉 오메가 포인트는 단순히 미래의 수렴점이 아니라 초월하며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계시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샤르댕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초월적 하나님의 계시의 실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진화의 수렴점인 오메가 포인트에 우주진화의 완성자로서 합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진화의 완성자로서의 오메가 포인트인 그리스도가 진화과정의 성숙을 통하여 우주의 물리적 골수(骨髓)에까지 침투하며 그의 초인간적 본질의 영향을 각인 시켰기 때문이다. 28) 

인간의 영혼(괈魂)을 신적 본질의 일부분으로 보는 사상에서는 죄와 타락의 개념은 실종되고 만다. 관상기도의 사상적 배경이 이러한 인간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토마스 머튼의 주장과 같이 인간은 이미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며, 관상기도의 실천은 참된 인간의 자아가 아닌 것들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29)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아니면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고전적인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탁월하게 강조되었던 중생(重生)과 회심(回心) 같은 신학적 주제들이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인합일적 성격을 가진 존재인데, 인간의 사악한 욕망과 헛된 생각, 그리고 세속으로부터 들어온 각양 표상들로 인하여 그 상태가 흐려지거나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걷어내기만 하면 참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합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0) 이러한 인간관은 마치 우리로 하여금 불교나 마니교의 인간관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지를 가지고 생각과 죄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헛되고 일시적인 것들로 변함이 없고 순수한 인간 위에 덧붙여져 있어서 이것들을 제거하면 참된 인간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이다. 31) 

③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왜곡된 해석 
셋째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形狀)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따른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를 주창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라는 해석보다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라고 해석을 따른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다.” 32) 키팅의 이러한 주장은 토마스 머튼의 주장과 일치를 이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내면의 ‘나’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므로 그 ‘나’가 깨어나면 자기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하는 역설로, 하나님과 영혼은 단일한‘나’처럼 보입니다.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일한 인격체처럼 됩니다. 둘은 하나처럼 호흡하고, 살고, 행동합니다. ‘둘’ 가운데 ‘어느’ 쪽도 객체가 아닙니다.” 33)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그들 중에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로 나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곧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본질(本質)이라고 보기도 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본질이 참된 인간의 본질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직관이 바로 자아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성경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리는 성자(聖子)와 관련된 형상(골 1:15)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Adam)과 관련된 형상(창 1:26) △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중생자(重生者)와 관련된 형상(골 3:10) △ 여자에 대해 남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그것이다(고전 11:7). 

튜레틴에 따르면, 성자께서 소유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성부와 본질적으로 동등한 형상이며, 아담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됨의 자질이나 본성, 상태로서의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유사함을 가진 우연적이고 유비적인 하나님의 형상이고, 중생한 신자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초자연적인 선물인 영적인 형상이며, 여자와 비교한 남자의 형상은 아내보다 우위에 있는 능력인 권위로서의 형상이다. 34) 그렇다면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특별히 교통하게 하시고, 당신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을 알고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적합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과 닮은 영적 자질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35) 

따라서 저들의 인간관은 결코 성경이나 개혁신학에서 바라보는 인간관과 합치될 수 없다. 신비주의와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신학적 인간관을 폐기하거나 변용하여 마치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적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인간을 모든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세속주의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세속주의(世俗主義)는 가치의 기준과 판단의 중심점(中心點)을 인간에게 두는 것을 말하는데, 근대주의가 신을 배제하는 인간 중심이었다면 오늘날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신비주의는 인간-하나님이라는 합일(合一)의 관계가 그 중심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참된 인간 중심주의가 곧 하나님 중심주의가 된다. 

2) 구원론 
관상기도의 신학적 문제점은 구원론(救援걩)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개혁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한 존재로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恩惠)가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신비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개념 자체가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의 여과 과정을 거쳤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의 전체인 신에게로 합일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 개념은 영지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36) 더욱 심각한 것은 성화관의 철저한 왜곡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의 성품이 죽음으로써 새사람의 성품은 살아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의 단회적 죽음의 효과에 성화론적으로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개혁신학의 성화관은 신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거룩해짐으로써 신과의 합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관상기도주의자들의 개념은 내재신론적 요소를 가진 존재론적 연합의 개념으로서 개혁신학의 유니오 쿰 크리스토(unio cum Christo) 개념과는 도저히 합의를 이룰 수 없다. 

① 종교다원주의적 구원 개념 
첫째로, 구원 개념 자체가 종교다원주의적인 해석의 여과를 거쳤다. 그들이 말하는 인간 존재는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하여 중생과 회심, 그리고 성화와 영화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순수하고 신적이며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존재이다. 따라서 관상기도운동에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비참한 상태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한 구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철저한 회개(悔改)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온전한 믿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본성의 변화와 새로운 삶과 같은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 구원론(救援걩)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종교다원주의에 의하여 탈색된 구원의 개념을 지지한다. 존 칼빈(John Calvin) 뿐만 아니라 초기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전통을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은 타락한 인간을 창조 시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고 상실하였는데 이것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의 목적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손상되고 사라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38) 

신자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된 성화(聖化) 안에서 중간상태에 있을 때조차도 그의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완전한 구원은 영혼과 육체 모두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 받은 인간도 완전히 거룩함을 회복한 존재가 아니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부활로 영화시키신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회복하고 영원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영화(glorification)를 통해 완전한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과 합일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특별하고 완전한 교통의 방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② 영지주의적 구원관 
둘째로, 구원의 개념에 관해 영지주의적 사고와 상통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초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이단들 중 하나였던 영지주의가 다시 각광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영지주의의 신학적인 코드가 오늘날의 뉴에이지(New Age)의 신학적 설명과 놀라운 일치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신비하고 비밀한 지식인 영지(괈智)를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종교적·철학적·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혼합종교적 성격을 가진 사상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자아, 세계, 자연, 우주, 그리고 신의 존재와의 일치를 그노시스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인간 존재는 신의 일부이며, 영혼이 바로 그러한 신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데 육체의 껍질에 싸여 그 고유한 작용이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완전한 영혼의 존재와 작용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신의 일부라고 보았다. 이러한 고양은 영지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는 인간의 영혼이 신을 응시하고 교통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인 지식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희랍어 중에서 ‘그노시스’는 문헌에서 종종 번역되지 않은 채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의 ‘신비들’에 대한 중요한 지식의 한 형태를 가리킨다. 이단 사상에서 이것은 밀교, 혹은 비전(秘傳)이었다. 즉, 영지주의의 구원의 지식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에 대한 대응으로써 혹은 그와는 별개로, 신약 학자들과 다른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그노시스 교리를 발전시켜왔다. 39) 영지란 단순히 철학적 인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지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인식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와 일체(一體)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다. 따라서 영지는 신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고 지복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신화적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다. 40)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또 다른 기독교적 해탈(解脫)을 의미하는 해석이며, 자아와 우주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모든 우주(宇宙)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 보고, 이로써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온전히 발현하는 것을 인간존재의 가장 고상한 이상으로 생각하며, 이것을 곧 구원의 개념이라고 여긴다. 41) 이러한 왜곡된 구원에 대한 개념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회개가 필요한 구원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모든 사유의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기도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는 여러 면에서 고대의 영지주의뿐만 아니라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관과 상당한 일치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적인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고는 양립할 수 없는 이단적 사상이다.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오늘날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머징교회 운동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비사상을 지적하면서 그 신학적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힌두교 스승인) 브라마카리는 머튼에게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을 통해서도 똑같은 신비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 후 머튼은 ‘불교, 힌두교 그리고 여러 위대한 아시아의 신비주의적 전통들’에 마음을 활짝 열게 되었고 이런 동양 신비주의적 전통들을 자신의 기독교적 전통에 도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비주의를 통해 도달하는 상태가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이다. 만일 서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관상을 통해 하나님께 닿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관상기도의 저변에 깔린 전제는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실제로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 42)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사막 교부들, 수도승,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고대~미래 운동은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모든 영적인 지체들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먼저 신비주의가 들어와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비체험의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과 궁극적인 연합을 느끼게 되며 또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의 연합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상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메시지(즉,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를 희석시킬 수밖에 없으며 타협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관상 영성(즉, 고대 미래 믿음)은 성경적인 기독교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43) 

물론 관상기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의 배경을 충분히 숙지하고 동의하는 가운데 이런 운동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상기도의 실천들이 가져다주는 단기적인 목회의 유익들을 생각하면서 이뤄지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많은 영혼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교회의 목자들이다. 그들이 올바르게 분별하여 교회를 이끌어야 할 사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목회적인 실천을 도입할 때에 특히 그 실천들이 타종교나 혹은 전통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사상을 따르지 않는 교파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적 실천일 경우에는 그것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학사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어떤 목회적인 실천이 목회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도입하게 될 그릇된 신학 사상들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외식에 빠졌던 베드로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44) 목회자가 전통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이러한 그릇된 목회적 실천들의 현실적인 유익에 현혹되지 않는 판단력을 지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③ 성경적 성화관의 왜곡 
셋째로, 성화론의 심각한 왜곡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성화(sanctification)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개혁신학에서 성화관은 구원받은 인간 존재는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닌”(already but not yet)의 공식으로 설명된다. 즉 신자가 죄에 대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또 죄를 짓기 원하지 않는 성향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는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구원이지만, 아직까지 잔존하는 죄가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45) 

신자는 중생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性向)으로 거듭나며, 회심을 통하여 이 중생은 현실적으로 의식 속에서 생활로서 발현되게 된다. 오늘날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였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의 심각한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믿고 구원을 받은 순간적인 변화가 기독교 신앙의 거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됨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의 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화가 경시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을 비롯한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를 말하면서도 좁은 의미의 중생관이 아닌 넓은 의미의 중생관을 지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라는 용어를 중생이나 회심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회개 자체가 일회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점진적 과정이기 때문에 그가 생각한 중생의 개념은 성화를 아우르는 전포괄적 신생(新生, new birth)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이 회개가 중생이라고 이해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지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46) 

중생을 구원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서정으로 보는 좁은 의미의 중생관은 역사적으로 도르트 회의 (synod of Dort) 이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수행하면서 방어적으로 이루어진 견해이다. 47)오히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넒은 의미의 중생관을 지지하였고, 이 견해에 따르면 중생하게 하시는 말씀의 씨는 성령님 자신이시지만 그 중생의 씨앗이 회심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발아되는 그 모든 과정과 이후의 성화 과정까지를 포함하여 넒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완전하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구원하셨지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죄와의 싸움에서 당신 자신을 의지(依支)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심화하여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의 성화(聖化)는 곧 부패한 인간 본성의 끊임없는 쇄신이며,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죄와의 싸움과 죄 죽임,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통한 내적인 부활의 경험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성화란 성령께서 구원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작용이다.” 48)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는 성화를 소명과 칭의와 구별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였다. “칭의(稱義)가 성화의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시작이기 때문에, 성화(聖化)는 칭의에 수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칭의나 소명과 구별되어야 한다. 소명이 중생의 시작인 반면, 성화는 점진적 완성을 향한 소명의 연속이다. 칭의가 인간의 외면에 초래된 하나님의 행위로서 외부적인 공의를 부여한다면 성화는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전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공로를 직접적으로 의지한다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이 부르심을 입은 사람 안에 간접적으로 역사한 결과이다. 전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부여하는 단회적 행위라면, 후자는 개인이 받아들이는 성령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완성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전자에서는 사람을 성화시키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순전히 수동적이라면, 후자에서는 협동적이다.” 49) 

구원 받은 신자 전 본성이 거룩해져가는 성화(聖化)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과 삶으로 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의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적인 깨달음과 의지적인 순종, 성령의 역사 등이 요구된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적 성화관은 아주 간단하다. 수행하는 자가 누구이든지 심지어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 내면의 중심을 향하여 생각을 비우고 욕망을 버려 침묵의 수행으로 정진하며 신을 관상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과의 합일 대신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고전적인 개혁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의미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인간을 구원받았지만 죄와 싸워야 할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로 보는 대신, 생래적으로 영혼(괈魂)을 통하여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있지만 잡스러운 생각과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자신이 이미 도달해 있는 신적인 합일을 방해받고 있기에 그것을 거두어 버리기만 하면 신(神)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가!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도, 죄에 대한 통절한 뉘우침도, 성령의 은혜의 도우심도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니, 말씀이건 성령이건 이러한 자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인간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부패한 본성을 성령의 역사로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신과의 합일의 가능성을 깨닫고 신을 관상함으로써 신적인 존재가 되어 가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성화관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필자는 관상기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상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거나 주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상적인 뿌리가 바로 그러한 배경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관상기도가 주는 단기적인 목회의 유익을 뒤로 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실천을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여 그 모양조차 버려야 하며, 더욱이 관상기도의 사상적 배경들이 기독교회에 확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교리교육이 심히 무시되는 목회적 상황에서는 이러한 사상들이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진지한 교리적 반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유입되어 들어오기 매우 쉬운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이단들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④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교적 개념 
넷째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 대한 재해석의 문제이다. 고전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의 내재신론적인 해석을 통해 왜곡되기도 했는데, 관상기도의 실천은 이러한 내재신론적 해석을 신자들에게 부추기고 있다. 존 칼빈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정제되고 개혁교회에 뿌리내린 경건을 위한 교리들 중 가장 중요하고 신비한 교리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이다. 이에 대하여 존 칼빈(John 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의 결합,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심-간단히 말해서 신비적인 연합-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의 몸에 접붙인 바 되었으며-간단히 말해 그가 우리를 자신과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교제를 가진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50) 

그리스도와의 연합(곛合)의 본질은 존재론적인 연합이 아닌 영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이다. 그 연합이 영적인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역할을 하므로 그 관계가 영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신비적인 이유는 그것이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신비만이 아니라 지성적인 신비이며 인간의 본성과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성격에 따라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으로 나눌 수 있다. 51) 흔히 존 칼빈(John Calvin)이 이 교리를 진술함에 있어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 52) 를 의존했다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단순한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중세 신학자들 중 걸출하고 해박한 사상을 가진 대학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남겨놓은 문집의 양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로는, 베르나르의 신학의 신비주의가 오늘날 관상기도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와 동일한 성격의 신비주의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간단히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와 칼빈은 일치하게 그리스도(혹은 하나님)와의 연합을 이해함에 있어서 신과 인간 사이의 본질의 연합(union of essence)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두 사람은 이 연합의 본질은 영적인 것으로 보았다. 53) 이 점에서만큼은 베르나르가 칼빈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적 영향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함에 있어서 베르나르와 칼빈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함에 있어서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논점에 있어서 일치하였으나, 어떤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않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54) 칼빈이 영향을 받은 모든 앞선 신학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는 베르나르의 사상 전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의 견해를 절충적으로 참고하였던 것이다. 

개혁교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합치를 주장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유니오쿰 그리스토(unio cum Christo)의 교리는 성화를 통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적 교통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과거적 죽음이 현재적으로 실재화(actualization)됨으로써, 신자의 마음은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그 죽음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의 과거적 죽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신자는 죄에 대한 욕망을 향하여 죽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고자 하는 거룩한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이 초시간적으로 실재화 되어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경건의 비밀의 핵심으로 삼았던 ‘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의 교리이다. 55) 

성화의 이러한 이치에 대하여 랜달 그리슨(Randall C. Gleason)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 은혜는 법정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비록 우리가 법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칭의)를 받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는 전인에 대한 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해 가고 있다. 법정적 의의 전가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회개’인데 칼빈에게 있어서 이것은 실질적으로 성화와 밀접하다. 존 칼빈이 정의하는 회개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참으로 돌이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순전하고 진심어린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돌이킴인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와 옛 사람을 죽이는 것(mortification)에 그리고 성령을 살리는 것(vivification)에 있다.’” 56)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통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한다. 오직 욕심과 헛된 생각을 버리고 발견한 참된 자아에 자신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는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참 자아가 곧 그리스도이며, 그의 본질은 우주 안에 충만한 일자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그리스도적 범신론(Christolgical pantheism)이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연합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다는 그들의 설명은, 그것이 그들의 말로써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지만 개혁신학의 경건의 신비인 고유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불건전한 내재신론적 사고와 혼합한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의 참 자아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의 편재 안에 자신과 하나님이 합일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범신론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시대에서도 불건전한 신비사상으로 나타났으며 더 멀리는 플라톤 사상과 힌두교 사상, 그리고 불교사상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가깝게는 샤르댕의 그리스도 중심적 내재신론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신학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인간,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해석은 현대사상과 코드가 맞을 뿐 아니라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구에 강한 매력을 제공하고 있다. 

3) 기독론 
관상기도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독론은 그 실천을 위한 신비사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중보직,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중보직은 무시되거나 경시된다. 그리스도는 순수 자아와 일치하거나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계시되는 속성보다는 자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의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이 더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을 침투하는 신적 본질로써 그리스도를 주장하기 위하여 기독론에 대한 범신론적 해석을 주저하지 않는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기독론의 가장 심각한 훼손은 신화(deification)의 교리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동방교회의 테오시스(theosis)의 개념을 차용하여 범신론적·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을 덧입힘으로써 결국 밀교적 혼합의 인신화(人神化)로 나아갔으며, 관상기도는 이러한 이교적 신화를 위하여 필수적인 신비행위로 강조된다. 

①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에 대한 그릇된 이해 
첫째, 이런 신비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기독론(基督걩)의 이교적 변형을 시도한다. 관상기도운동의 사상의 뿌리인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전통적인 신학에서의 기독론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예 기독론을 기각하거나 변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혁신학의 중심적인 강조점은 창조(創造)로부터 종말(終末)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관계 전체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을 뼈대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피조물의 의존의 극치(極致)가 바로 구원서정(ordo salutis)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의존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것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의 도구적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로, 공로적 수단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57) 둘째로, 도구적 수단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과 복음이다. 셋째로, 유효적 수단인데 이는 인간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넷째로, 작용적 수단인데 이것은 유효적 수단에 협력하는 인간의 믿음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기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성령의 역사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뤄진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성품을 묵상하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 또 그것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도구일 뿐이다. 

레노바레 운동에서 강조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문제점에 대한 조진모의 다음 지적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겨냥한 것이다. “…레노바레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사역의 최종 목적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은 제자들로 훈련시키는 것을 영적 형성의 궁극적 사명으로 삼는다. 성경도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그가 반드시 성도의 삶 중심에 계셔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포스터가 의미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은 이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도들은 ‘공식적 방법’인 기도, 학습, 금식, 고독, 단순, 고백, 기쁨 등의 훈련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형성의 가장 훌륭한 모범되신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 레노바레가 말하는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가 지녔던 습관을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동일한 삶이 습관적으로 자리 잡힐 때까지 반복적으로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다…. 결국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게 하는 훈련이다.” 58)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에 대한 개혁신학적 의미는 경시되거나 무시된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세계와 직면하게 함에 있어서 자아와 일치되는 존재이고, 기독적 명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비하와 승귀의 신분 안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속성들보다는 인간 자아의 심리적 상승이 더욱 주된 관심사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신비주의의 공통된 내면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② 기독론에 대한 이교적 변용 
둘째로, 기독론(基督걩)에 대한 심각한 이교적 변용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범신론적 기독론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긴 하나 그것은 성육신(成肉身)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구원의 근거가 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편재해 계셔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합일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적인 범신론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것(세계)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가? 그분 자신이 사물 안에 부분적으로 스며듦으로써, 그분 자신이 하나의‘요소’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나서 질료의 중심에 내면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기반으로부터 이제 우리가 진화라고 불리는 것의 주도자요 머리를 취하심으로써 세계를 하나가 되게 하신다. 우주의 생명력의 원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솟아나셨으므로 그는 사람의 위치에 그분 자신을 두셨고 그리하여 능동적으로 그분 스스로 들어가신 의식들의 모든 발생을 자신 아래굴복하게 하시고 그것을 정화시키고 지도하고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속되는 교통과 승화의 행위에 의해서, 지구의 모든 혼을 그분 자신에게로 모으고 있다.” 59) 

관상기도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참 자아(自我)를 직관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곧 그와 합일을 이루는 것인데, 그리스도와의 합일은 곧 하나님과의 합일이다. 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의존이라는 신앙의 필요성을 자아를 향하는 허심(虛心)의 기도로 대치해 버린다. 이러한 신학 안에서는, 역사적으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을 위해 지불하신 죄값을 기초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는 고전적이고 개혁신학적인 기독론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그리스도를‘인간 자아 안의 그리스도’로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개념도 변형시키고 있다. 

③ 테오시스(theosis)의 교리에 대한 오해 
셋째로,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동방교회의 테오시스(theosis)의 교리를 역사적 근거로 내세운다. 이레네우스(Irenaeus)를 비롯한 고대의 교부들은 인간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신화(神化)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카타르시스(katharsis)-테오리아(theoria)-테오시스(theosis)가 그것이다. 60) 

카타르시스는 성령과 진리의 영향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깨끗이 씻겨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한 테오리아는 이렇게 정화된 마음과 영혼으로써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지성이 온전히 순수해져서 지성의 모든 억견(臆見)에서 해방되고 감정의 충동에서 떨어져나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테오시스가 이루어진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전적인 타자이시기 때문에 정통신앙을 가진 교부들은 이 사상을 신의 본질 속에 함께 섞여 들어가는 참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부여하신 인간 영혼 안에 있는 당신의 참 형상의 완전한 회복의 상태로 보았다. 61) 

이러한 신화(神化)의 교리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은 베드로후서 1장 4절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62)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것이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신화(deification), 곧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으며 이는 단지 신자가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 한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신화인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 나오는 (신의) 성품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이 아니라 특성을 가리킨다. 과거 마니교도들은 우리는 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생을 마친 후에는 우리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꿈꾸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로 넘겨져 그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을 흡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광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헛된 사변들을 무시하고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곧 우리의 완전한 지복에 필연적인 것이 될 영생과 영광에 참여하는 그 목적을 위해 우리 안에 거룩함과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사실로 만족해야만 한다.” 63) 

역사적으로 이러한 교부들의 신화의 교리, 특히 동방교부들을 중심으로 전개해 왔던 신화의 교리는 많은 미신적 요소와 이단적 사상이 침투되면서 참된 기독교적 인간론과 기독론의 심각한 변용들을 동반해 왔다. 기독교 초기에 있었던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의 이단 종파들이 인간 영혼은 형체만 다를 뿐 신의 본질의 일부라고 보고 육체의 껍질을 벗고 상승할 때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에게로 회귀하여 인간 영혼과 신 사이에 구별이 없는 혼연일체가 된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바뤼흐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설명과도 흡사한데64) 이렇듯 인간의 영혼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인간 신화의 교리나 뉴에이지 사상에서 발견되는 인신합치의 사상들은 이러한 신화 교리의 오류를 보여준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테오시스 교리는 동방교부들의 고전적 테오시스 교리로부터도 이탈한 밀교적 혼합을 의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동방교부들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현재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상기도운동은 그것을 주관하고 있는 단체나 인물에 따라 다양한 층차(層差)를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전개되는 관상기도 운동은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과 개혁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론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변용하지 않고서는 고유한 의미의 관상기도를 실천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관상기도운동이 그 뿌리에 있어서 고전적인 기독론을 심각하게 손상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를 향한 문을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코트 팩(Morgan Scott Peck)은말한다. “기독교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잘못은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괴팍스러워 보이지만 그 바탕은 매우 경건하고 덕은 엄청나게 크다.” 65)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중보자가 아니다. 역사 속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 사역에 대해 그들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자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자아는 본래 더럽고 죄로 물들고 파괴된 자아가 아니라 순수하고 신(神)과 일치를 이루는 자아이다. 인간이 이처럼 본래적으로 순수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인간을 통해 입증되었고, 이는 우리 모두가 거짓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정화될 때에 우리들이 돌아갈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간 존재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정화(淨化)되어 신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코트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의 낮은 자아에 기대길 중단하고 우리의 더 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또한 매튜 폭스(Matthew Fox)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적인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 분이다.” 67) 

이러한 사상은 토마스 머튼의 다음 주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구성하는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을 나누어 받았으며, 넓은 의미에서 그분과 ‘초자연적으로’ 일치해 있다. 이 일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혹은 어떤 신앙 행위나 사랑에 의해 야기된 뉘우침으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휘한다. 이 일치는 참되므로, 그것은 우리의 초자연적인 삶이다.” 68) 

4) 신론 
관상기도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에서 신론의 변용은 그들의 이단적인 교리의 바탕이 된다. 그들의 신관은 기본적으로 범신론(pantheism)이거나 내재신론(panentheism)이다. 내재신론은 범신론에서 의미하는 신에 인격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이다. 즉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문제인데, 이것은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이기도 하였고, 다양한 이단들이 양산되는 원천이기도 하였다. 내재신론은 관상기도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내적 자아와 그리스도, 그리고 관상에서 시작하여 신화의 일치를 이루는 근거는 세계와 하나님의 본질의 일치이다. 내재신론자들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신적 본질의 외화(外化)라고 보는데, 여기에서 온갖 기독교적 미신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①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문제 
첫째, 관상기도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관은 범신론이거나 내재신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내재신론은 역사적으로 범신론의 변종이다.69) 범신론이 비인격적인 신을 가정하고 있다면, 내재신론은 인격적인 신, 곧 유신론에 있어서 신봉되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을 창조세계 안에 있는 신의 보편적 존재를 주장하는 범신론과 결합해 놓은 것이다. 얼마 전 출시되었던 <아바타>라는 영화가 바로 이런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든 영적 사물들과 인간 영혼, 일자(一者)로서의 신 자신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영(靈) 아닌 것들과 대립한다. 역사적 
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재신론(panentheism)의 유혹을 받았고, 또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부인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신론(deism)의 유혹을 받았다. 

②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균형 상실 
둘째, 관상기도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론(神걩) 전개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에 대해 대부분 균형을 잃었다.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내재성(內在性)의 관계는 지극히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매우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까지 이 논지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사변화 되는 것을 경계하며 절제하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교회역사상 신비주의를 추구해온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개혁신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단순성 문제에 대한 균형에 머물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범신론이나 내재신론에 빠졌다. 칼빈 시대의 중요한 논적이던 오시안더(Osiander)의 범신론이 그러했다. 70)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이단들과 논쟁을 하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본질(本質)과 피조 된 세계와 인간(人間)은 하나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들은 신학 전체의 틀을 휘게 만들고 온갖 종류의 미신적 신비주의를 포용하게 만드는 빌미들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신비주의적 해석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론적인 해석들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 자신과 그에 의해 창조된 모든 영적 사물들의 교통(交通)의 본질이 존재론적이지 않고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하였다. 

오늘날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배경들을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일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관상기도의 실천의 배경이 건전한 신학에서 이탈한 신비주의(神秘主義)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이러한 실천을 계속하고 이론들을 발전시키다 보면 결국 그러한 사상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은사운동에 심취한 사람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체험과 운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신사도 운동의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에 대하여, 스위스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프란시스 튜레틴(Franscis Turretin)의 하나님의 존재의 무한성에 관한 다음의 논쟁적 해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의서인 <변증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제 1권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편재성(遍在性)을 논하면서 참고적으로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의 존재 양상’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71) △제한적으로(circumscriptively): 물질적 사물들의 경우이다. △ 한정적으로(definitively): 영적인 사물들의 경우이다. △ 충만적으로(repletively): 하나님이라고 보았다. 튜레틴은 피조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편재하심을 단지 덕(virtue)과 작용(operation)에만 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실체적 편재(substantial omnipresence)를 부인하는 소키누스주의자들과 보르스티우스(Vorstius)를 반박하며 개혁파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무한성과 편재성을 인정하는데 이는 단지 덕과 작용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본질에도 관계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72) 

프란시스 튜레틴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지나친 철학적 탐구를 자제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형의 물질(物質) 속에로의 확장이나 퍼짐, 그것과의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라, 신적 단순성을 가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적 본질’의 무한성인데, 이는 모든 피조물들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피조 세계 안에 어디든지 있지만, 또한 피조세계 내에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73)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개혁주의적 사상은 스위스 바젤(Basel)에서 활동하던 개혁파 신학자로서 초기 개혁파 정통주의 발전사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인 아만두스 폴라누스(Amandus Polanus)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장소는 제한적이거나 한 정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한적 장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다. 마치 크기를 가지며 나눌 수 있는 부분들로 나누어지는 유형적 장소에 놓여있는 유형적 사물처럼 제한적인 장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성을 가진 형상들 즉 천사와 인간 영혼처럼 한정적인 장소에 계시는 것도 아니다. 이는 지성을 가진 형상들의 장소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형적이지도 않고 제한적이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는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가진 한 형상은 동시에 두 장소에 한정(제한)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동시에 두 장소에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74)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인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는 하나님의 편재성의 교리와 연관되어 있는 신자의 중생을 통한 성령의 내주(內住)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신학적 숙고와 정교함은 오늘날에 더욱 유효하다. 그가 피하고자 했던 극단은 다음과 같았다. △ 성령의 내주를 다른 곳에는 없는 하나님의 본질이 한정적으로 신자에게 유입되어 존재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 성령의 내주를 신적 본질은 없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과 인과관계만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견 해.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내재신론적 해석을 경계하였던 사실은, 중생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스트리히트는 당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따라 중생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내주를 이 두 극단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성경적인 견해를 찾아간다. 그는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중생의 결과로써 이루어지는 성령의 내주를 무한자(無限者)이신 하나님이 유한자(有限者)인 인간의 육체나 영혼 속으로-문자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들어와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으니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편재성은 곧 세계 안에서의 그의 본질의 편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 안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내주는 다른 장소에는 없는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 안에 부어져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한 위는 다른 두 위(位)를 배제한 채 홀로 존재하지 않으신데 성령이 계신 곳에는 성부와 성자도 계시기 때문이므로 성령의 내주를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사람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스트리히트에게 있어서 중생의 또 다른 국면, 혹은 신자의 중생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은 ‘영’이다. 그는 이 ‘영’이라는 단어를 ‘주시는 성령’(스피리툼 단템, Spiritum dantem)이 아니라 ‘주어진 영’(스피리툼 다툼, spiritum datum)이라고 본다. 75) 그는 중생(重生)의 또 다른 표현 혹은 즉각적인 효과를 ‘영’(스피리투스, spiritus)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자가 중생과 함께 분여 받은 이 영은 엄밀히 말해서 성령께서 중생을 통하여 인간에게 분여하신 영이며, 이 영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혼이 살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76) 마스트리히트에게 중생의 다른 측면, 혹은 결과로서의 성령의 내주가 곧 ‘영’(spiritus)인데, 이는 삼위 하나님, 특별히 주도적으로 성령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영(괈)이다. 이로써 인간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 영적인 선을 실행할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성령을 살리는 영(스피리투스 비비피카레, Spiritus vivificare)이라고 가르친다고 지적하면서, 마스트리히트는 이 성령이 부여한 인간의 영혼 안에 주어진 ‘이 영’(spiritus hujus)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생명을 이루며(spiritualem constituat), 같은 방식으로 영적인 것들(spiritualia)을 향하여 (성향이) 기울어지고 적합하게 만들어주는데 이것은 본성의 영(spiritus naturae)이 본성적인 것들에 대해서 같은 성향을 가지고 적합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77) 

성령의 내주(內住)의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보르스티우스주의자들과 데카르트주의자들보다는 신적 내재론을 확대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세례파를 비롯한 열광주의자들보다는 신적내재론을 축소 제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은 오직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쿰 베르보(cum verbo)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78)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육체 안에 성령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담지(擔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성령 내주의 개념은 마스트리히트를 비롯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관상기도 지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지성적인 방식의 성령의 인도를 무시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관상으로써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강조하거나 우등한 것으로 보는 신학적 입장들은 마스트리히트를 비롯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가장 경계하고자 하였던 신관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육체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자신들은 그런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성령에 대한 경험을 그 경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과의 교통으로, 곧 계시 전달적 성격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성령에 대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인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오늘날 방언운동과 예언운동, 신사도운동 등을 통하여 발생하는 많은 신학적 문제점들은 우리에게 성령의 내주에 대한 마스트리히트의 균형 잡힌 신학적 설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5) 교회론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기독교사상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교회론(敎會걩)이다. 관상기도에 대한 현대인들의 욕구 자체가 공동체적 동기보다는 개인적인 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체적인 영적 연합체로서의 교회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상기도의 이러한 신학적 문제점은 현대인의 자아중심적 실용주의와 결합하여 신앙의 극단적인 개인화를 가져올 수 있다. 관상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려는 이상은 신앙의 타계화(他界化)를 가져와서,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역사의식의 결핍을 불러온다. 체관의 경험을 중시하는 영적 사색들은 유형교회의 불완전함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탈교회적인 신앙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퀘이커교도들이 무교회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서도 이러한 우려가 지나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론에서 이탈할 신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① 신앙의 극단적 개인주의화의 위험 
첫째로, 근본적으로 이러한 신비주의(神秘主義)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體驗)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극단적인 개인주의화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우려를 이은선은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오늘날 우리의 영성의 논의에서 너무나 개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위험성을 볼 수 있다. 개인이 혼자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측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물론 성도 개인에게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이 교회를 통해 육성되는 공동체의 영성을 소중하게 보신다. 그러므로 세속화 시대의 특성인 개인주의와 자아 상실과 인간의 파편 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영성이 육성되어야 하겠다.” 79) 

기존의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사역자들로서 자신들의 사역에 도움을 받기 위해 관상기도를 도입하는 경우에는 당장은 이런 염려가 적지만, 순수하게 관상기도를 접하고 그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될 때 그들은 공동체로서의 견실한 교회관(敎會觀)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며, 또한 관상기도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 자체가 체계적인 신학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탈신학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다원주의적인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서라도 신학적 문제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너그러운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교리적 입장 역시 불분명하다. 

② 교회의 역사의식의 결핍화 
둘째로, 교회에 대한 역사의식(곎史意識)의 결핍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신앙의 개인주의화는 신비경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오류이다. 지상교회는 신앙에 있어서 역사성과 초월성(超越性)을 조화롭게 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한 신앙의 경험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지만, 신앙은 신자가 그러한 초월적인 은혜의 경험들을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역사 속에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비주의에서는 이러한 초월성과 역사성의 균형(均衡)을 자주 무시한다. 그러나 복음적인 신앙은 이 둘을 조화롭게 추구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역사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 하며 사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삶은 개인의 실천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으로서의 교회 안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추구해가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이 세상에서 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신비주의에서는 오늘 지금 내가 관상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경험을 추구하지만 복음적 신앙은 오늘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걸어 온 역사적인 발자취와 그것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이바지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심을 갖는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모든 보편 교회들과 함께 그리고 유형교회들과 함께 이 목표를 추구해 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 교회는 영원한 교회의 시간 안에서의 나타남이며, 보편교회(普遍敎會)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교회는 가고 오는 세대의 교회와 역사적 연관을 가지면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해 간다. 그러므로 전통적이고 개혁신학적인 교회관에서는 교회와 역사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관상기도의 실천의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에서는 이러한 교회와 역사관의 연관 관계가 무시되거나 심하게 약화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을 지나치게 내재화하고 자기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내면주의화의 경향을 따르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80) 

③ 유형교회의 경시 위험 
셋째로, 유형교회(有形敎會)를 경시하는 태도이다. 언제나 개인의 신비한 체험을 신앙의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사람들은 지상에 있는 유형교회의 결함과 불완전함을 과대하게 생각하였다.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특정한 유형교회의 일원으로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그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구현해 가는 일에 헌신하기 보다는 신비체험 자체를 중시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불완전한 유형교회를 경시하거나 혹은 과거의 무교회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유형교회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의 퀘이커 교도들이 그러했고, 오늘날 여전히 남아 있는 무교회주의자들의 경험도 신비주의와 유형교회의 경시 풍조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81)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교단에 소속된 지역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식 기도원도 아니고, 또 스스로 수도원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애매한 형태의 기관들을 설립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학적 배경이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 조차도 분명하게 하지 않은 채, 함께 예배드리고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집단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단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④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론의 이탈 
넷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론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성경과 개혁신학은 신자의 구원을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론에서 전망한다. 즉 인간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창조적 중보자직 안에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연결들이 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이며 한계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고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의 연합을 현실적으로 성취해 가시기 위한 구원 경륜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죄인이 복음(福音)을 듣고 성령의 능력으로써 거듭나고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게 되는데 이는 이미 존재하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많은 지체들 중한 지체로서 이미 있는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처음부터 공통체적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성취된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관점 자체가 심각하게 변형되었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련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견해들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왜냐 하면 신자 개개인의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을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개혁신학의 고전적 관점 자체가 이미 무시되거나 거부되기 때문이다. 

6) 기도관에 대한 왜곡된 이해 
관상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기도란 무엇 인가?”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정의(定義)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탄원이며 간구이며 또한 감사의 고백이다. 기도 활동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활동이며, 따라서 기도는 언어를 통하여 그 구체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기도 활동은 영적인 활동인 동시에 인격적 활동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식(知識)에 기초하여 인격체로서 더 높으신 인격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간구이다. 그러나 관상기도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기도에 관한 개념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이러한 기도관은 명상과 기도 자체를 혼돈한 개념을 양산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내포 하고 있다. 

① 기도의 정의에 대한 왜곡 
첫째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의 성경적 정의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감사와 함께 예배의 특별한 일부분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며, 받으실 만한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뜻대로 마음으로 경외함과 겸손과 열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하며, 소리를 내어서 할 때는 분명한 말로 해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인 바, 죄를 자백함과 그의 긍휼을 감사히 인정하면서 하는 것이다.” 83)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상과 침묵, 그리고 반복기도를 중시한다. 그들은 기도 속에서 스스로 정적과 침묵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 중 일부이기는 하지만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로서의 호흡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84) 즉 규칙적으로 올바르게 호흡하는 것은 기도 속에서 정적과 침묵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비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호흡에 영적인 의미들을 도입하는 것은 완강히 배격하여야 한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서 정적과 침묵으로 죄를 나가게 하고 신적인 기운이 들어오게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호흡 자체가 죄(罪)를 뿜어내고 신적 기운들이 들어오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이교적인 주장이지 기독교적인 주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거룩한 생각의 집중을 통하여 죄를 물러가게 하고 신적인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며 규칙적인 호흡이 이러한 
명상에 도움을 준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80년대 중반에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며 천국줄 기도를 주장하던 이단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운 채 끊임없이 두 팔로 줄을 잡아당기는 흉내를 내며 명상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천국줄 기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두 팔을 교대로 천국까지 연결된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자신들이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신비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② 침묵에 대한 비성경적 강조 
둘째로, 기도에 있어서 침묵에 대한 비성경적 강조이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성경 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온통 침묵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침묵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의 하나이며 사라지지 않을 원현상이다. 태초 이전에 침묵이 있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은 침묵에서 나온 ‘말씀’이다. 침묵은 사랑, 믿음, 죽음, 생명 등과 같은 다른 원(原)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본래적으로 자명하게 존재한다. …침묵과 결합하면 인간은 침묵의 원초성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원초성에 참여하게 된다. 침묵은 항상 인간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유일한 원현상이다. 다른 어떤 원현상도 침묵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에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은 어떤 태고의 것처럼 현대세계의 소음 속으로 뛰어나와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85) 

그들은 침묵(굸默)을 동반하지 않는 기도는 마치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니거나 매우 낮은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침묵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침묵인가가 중요하다. 그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혼과 마음의 적극적인 활동이 중요한 것이지 침묵 그 자체가 종교적인 덕일 수는 없다. 물론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소음과 공해 속에 살고 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주한 삶에 피곤해져 있다. 넘치는 정보의 홍수와 감각적인 것들의 에워싸임으로부터 벗어나 침묵하는 것은 경건에 다가가는 일반 은총적인 환경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절실한 일이고 오늘날과 같은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청교도들이 규칙적인 침묵의 시간들을 가진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신적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 정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교도(淸敎徒)들은 성경의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함으로써 계시된 성품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감각들을 물질적이고 표상적인 것들로부터 쉬게 하고 마음을 모으고자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과 정적에 대한 추구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티벳 불교와 같은 다양한 신비주의 종파에서도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관상기도의 일종인 소위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 자체 안에서도 심각한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향심기도 속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명상 방법에 대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와 교회공동체들 안에 동양의 명상법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위험과 오류들로부터 벗어나지 아니한 시도 곧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비그리스도교적 명상과 혼동하는 시도의 움직임이 현저히 거세게 일고 있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 같은 방향에서 제시되고 있는 방향들은 무수히 많으며 또 어느 정도 과격하다. 어떤 사람들은 동양의 방법들을 오로지 참으로 그리스도적인 묵상을 위한 심리적 준비단계로 활용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가톨릭 신비가들의 저서들 안 에 묘사되어 있는 경험들과 유사한 영적 체험들을 겪으려고 애쓴다. 또 다른 부류의 어떤 사람들은 불교 이론에 고유한 것으로써 표상이나 개념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것을 유한한 실재를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위엄과 같은 수준위에 서슴없이 올려놓으려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부정신학을 활용 한다. … 부정신학은 하느님의 본성을 표현하려고 추구하는 모든 단언을 아예 무시하고 이 지상의 사물들이 하느님의 무한성의 흔적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에 의해 역사 안에서 성취된 구원 업적들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또한 ‘신성의 무한한 심연 안에 잠겨드는 데에 필수적인 상념 곧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상념까지 포기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방안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동양의 명상법과 조화시키려는 그와 유사한 방안들은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고유한 방법들과 내용들을 지녀야 할 것이다.” 86) 

개혁주의신학에서는 기도의 의미(意味)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신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명상이나 침묵하는 인간의 수행 정진을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도를 이처럼 엄격하게 제한된 의미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기도의 실천이 모호하고 폭넓을수록 기독교적 유일신론적 관점은 약화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강조하신 기도의 실천도 바로 이러한 신관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마 6:7). 전통적이고 개혁적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엄격하게 인격적인 존재로 강조한다. 

③기도에 있어서 지성에 대한 비성경적 무시 
셋째로, 기도에 있어서 지성(知性)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인 기도의 태도가 아니다. 신자의 기도는 인격적인 인간존재로서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 지성으로써 드리는 기도이다. 그리하여 기도해야 할 내용은 인간 지성 안에서 구체화되고 그 내용들은 인격적인 하나님께 구체적인 언어로 아뢰어지는 기도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존 오웬(John Ow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말을 사용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도 그렇게 행하시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26장 39, 42절의 말씀처럼 지속적으로 그리하셨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관상이라는 이 가장된 침묵 기도가 아닌 이 기도의 의무에 가장 열렬히 참여하셨을 때 그분은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 87) 

기도(祈禱)는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는 그 무엇을 일깨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언어화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과정을 통해서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에 열매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고전 14:14).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간구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심령으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고 이로써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依支)하게 되는 것이다(신 4:29, 시 5:1, 140:6, 요일 3:22~23).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구할 바를 다 알고 계시기에 기도의 실천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하는 자들에게, 존 칼빈(John 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추측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목적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기도해야만 하는 여섯 가지 이유들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찾으며 사랑하고 섬기려고 하는 소원으로 불붙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마다 거룩하신 닻이신 하나님에게로 습관적으로 피난을 가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 내어 놓기 부끄러운 욕망을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눈앞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마음 전부를 쏟아 놓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함이다. 넷째. 우리가 구하고 있었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확신함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묵상하기 위함이다. 다섯째. 기도는 기도를 함으로써 얻었다고 인정되는 것들을 더욱 큰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88) 

존 오웬(John Owen)은 이미 자기의 시대에 이러한 그릇된 명상기도의 실천이 미신적인 사상을 퍼뜨리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당시 묵상기도(mental prayer)라고 불렸던 가톨릭의 실천, 그리고 개신교도들 중 신비적인 신앙에 이끌리던 사람들도 따라 하던 그 기도는 사실 엄밀히 말하면 묵상기도가 아니라 기도적 명상이었다. 그러한 기도의 실천이 결코 복음적인 경건을 함양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기도가 고유하게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기도의 의무는 지성(知性)과 영혼(괈魂)의 행위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존재와 스스로 충족하심과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더불어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과 의와 전지하심과 편재하심을 인정하며 그들의 존재와 삶과 복락과 그들의 모든 중대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의지 그리고 그분의 기뻐하심에 대한 그들 자신의 총체적인 의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서, 그들의 신분과 상태가 요구하는 대로 그분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그들이 바라는 것들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것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신 것 때문에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이 집중하는 기도의 일반적인 개념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기도의 개념을 생각할 수 없다.” 89) 

또한 그는 기도적 명상이 갖는 위험성과 그 미신적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기도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이 지성(知性)의 작용과 이해(굊解) 없이는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영혼의 요구를 간구와 감사로 그분께 알리기 위해 영혼이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에 있어서 우리에게 권고되는 것은 기도의 외적인 요소들과 기도의 내적인 은혜와 효능이다. 전자에는 간절함, 열렬함, 끈질김, 지속적임 그리고 인내가 주로 속한다. 어느 누구도 그의 지성과 이해를 실행하지 않는 의무의 방식으로는 이런 식의 기도를 수행할 수 없다. 만약 이런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이 설령 기도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야만적인 광분이거나 야만적인 고집에 불과하 다.” 90) 

④ 만트라식 실천에 대한 미신적 이해 
넷째로, 짧은 단어나 문장을 반복하여 기도하게 하는 만트라(mantra)의 실천에 대한 미신적인 이해의 문제이다. 어떤 짧은 문장이나 기도의 제목,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반복하는 실천이 기도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매번 다른 단어나 문장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기만 하면 언제나 그렇게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진언’(眞言)이라고 불리는 만트라의 실천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자의 마음의 집중에서 나오는 기도의 능력이 아닌, 기계적인 실천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실천보다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의인을시험하사그폐부와심장을보시는만군의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렘 20:12). 

기도의 참된 능력(能力)은 인간 안에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깊은 기도의 가르침의 중심점을 만트라(mantra)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 계시에 두고 거기에 마음을 합치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기도의 실천은 성경 계시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지성을 초월하여 심령으로 신을 관조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다. 인간의 감각적인 안력이나 심지어는 인간의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직시할 수 없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본질과 동일하다고 진술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속성이 하나님의 누구이심(whoness)을 지시한다면, 본질(本質)은 하나님의 무엇임(whatness)을 지시한다. 두 가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성으로든 마음으로든 인간은 하나님의 무엇임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과 맺으신 관계 속에 계시되는 속성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갈 수 있으며,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살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존성과 초월성을 옹호하는 단순성의 교리이다. 개혁신학은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의 깨달음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판단한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⑤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 
다섯째로, 기도에 있어서 성령에 의한 신적 조명(illumination)에 관한 오해이다. 성경적으로 조명(照明)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성령으로써 이해(굊解)를 더하는 것이다. 91) 개혁신학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의 깨달음이 성령의 조명으로써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본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는 신비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도에 있어서 조명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조명은 성경과 개혁신학이 성경계시를 중심 에 놓고 말하는 성령의 조명과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조명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의 작용이 멈추고 자신을 신비체험에 방임하는 것이 조명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이교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다. 

존 오웬(John Owen)은 자신의 책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O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Prayer)에서 지성의 활동이 없는 기도가 단지 야만적인 종교 행위임을 언급하면서, 그런 예로서 플로티누스(Plotinus)의 <엔네아데스>(Enneades)를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분노도, 어떤 것에 대한 열망도 없다. 완벽한 정동의 안식이 있다. 이성도, 오감도 활동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신에 대한 황홀경에 사로잡힌 채 조용히 안식의 상태로 들어간다. 감각에 의해 흔들림도 없다. 본질 속에서 외부 행동에 의한 반사작용도 없이 전적으로 완벽한 안식의 상태로 들어간다.” 92) 

기도 속에 어찌 신비가 없겠는가? 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영의 신비를 체험하는 일은 고도의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신비(神秘)이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기도 속에서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질서를 초월한 영적인 질서를 성경(聖經)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의 기도는 반드시 이러한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적인 경건은 이 신비로써 지성을 무력화하지는 않는다. 신자가 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초월적인 영의 신비를 체험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지성의 작용은 멈추지 않는다. 존 오웬(John Ow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함에 의한 지성의 영적인 강렬한 고정이라면 말하자면 영혼은 비로소 우러르고 사랑하는 그 탁월하신 무한하심을 통해 경외와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고 영혼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받아들여야 할 그것으로부터의 무한한 격차를 인식함으로 다시금 자기 자신의 비하로 돌아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심의 영원한 토대가 되시는 그분께로 가까이감에 있어서 의지와 정동이 받아들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식과 만족이야말로 기도의 목표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풍성하심을 통해 빈번하게 누려지는 것이다. 이로써 영혼은 황홀경이나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함 속으로 고양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자기 자신의 이해와 의지의 능력 너머로의 움직임 속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모든 기능들과 정동들 안에서 은혜의 성령의 유효하신 역사하심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살아있는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친절하심의 친밀하심과 더불어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가운데 안식으로 충만하여진다.” 93) 

영적 체험과 지성(知性)의 작용은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와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구분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레온 우드(Leon Woo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지자의 두 가지 임무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특별히 계시(말씀)를 받을 때 무아지경에 해당하는 자기 암시는 없으며, 선지자 자신이 어떠한 계시적 경험을 스스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선지자는 단순히 기다렸으며, 또한 이성적인 능력을 잃지도 않았으며, 무아지경의 경험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성이 무시되지 않고 그 한계성을 초월하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경험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었다. 선지자는 항상 말씀을 들었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94) 

이 점에 대하여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도 선지자(先知者)의 영적 경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 5장 1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짓 선지자는 ‘신’(루아흐)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람 혹은 무(無, nothingness)로 만들어 버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 선지자는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인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메시지를 받았던 것이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외부로부터 특별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부패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다.”에드워드 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이상(vision) 혹은 시각(sight) 등으로 계시하셨는데, 계시의 수신자로서 참 선지자는 무의식 가운데서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지적 기능을 완전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96) 

이점에 있어서 개혁신학자들은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견지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지성의 활동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성적 이해를 통하여 성령의 은혜가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한 신자가 성령께 붙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고백과 다른 것이 아니다(행 18:5). 

성령의 역사와 성경 계시의 관계는 문과 돌쩌귀의 관계와 같다. 문이 그 힌지(hinge)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성령은 성경계시와 함께, 성경 계시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 이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97) 그런 점에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도에 있어서 지성(知性)의 활동을 무시하는데 이것은 정통적인 기도에 대한 견해가 아니다. 

⑥ 하나님에 대한 관상에 대한 종교다원주의적 이해 
여섯째로, 관상기도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에 대한 관조의 문제점이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배경이 되는 신비주의에서는 기도란 신에 대한 관조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 향심기도의 관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에 대한 관조가 곧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었던 토마스 머튼이 불교의‘선’에 대한 이해가 기도를 돕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98) 

본질적으로 관상기도가 강조하는 심령의 관조(觀照)는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통합적 영성을 지향하고 있다. 관상기도의 실천이 종교다원주의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상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강조되는 심령적인 관조는 통합적 영성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통합적 영성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가운데 있는 영적인 공통분모로서의 영성을 가리키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 없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가톨릭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학적 전환을 통하여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불교를 비롯한 이교들도 이러한 통합적 영성을 저항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99) 

요약하자면, 개신교는 현대에 들어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거부하는 시대의 정신과 영합하고 체계적인 교리교육(敎理敎育)을 멀리 함으로써 관상기도운동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적 종교 실천 에 대해 무저항적인 상태가 되었다. 각종 신비주의와 관상기도에서 부르짖는 종교다원주의적 주장들이 현실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평화주의 때문이다. 100) 

사상과 종교는 달라도 평화를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과 같은 극단적 인본주의 시대는 종교 문제로 인간이 갈등을 겪는 것은 마치 인간의 문제로 신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어리석은 것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모든 종파를 막론하고 할 수 있으면 이러한 현대인들의 합치된 평화관에 배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이런 속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자신의 고유성들을 양보하며 종교적 혼합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종교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1) 

토마스 머튼은 아마도 우리나라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기독교 안에서 참된 영성을 추구하며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관상기도를 이끌다가 종교다원주의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더욱이 토마스 머튼은 자살(自殺)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학자들 간에는 그의 자살의 원인이 관상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102) 그를 비롯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평화관(平和觀)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이웃들과 평화를 누리며, 창조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신적인 행복에 참여한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평화관과 는 배치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모든 이웃과의 평화의 원인이 된다는 성경적 샬롬(Shalom) 사상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통한 화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적이고 개혁적인 평화사상은 종교다원주의가 지향하는 평화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참된 하나님과의 평화, 그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해서는 인간의 절대적인 타락과 비참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강조와 복음 전파의 필요성, 철저한 회개와 성령의 역사,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실천 등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참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5. 관상기도운동에 대한 개혁신학적·목회적 대안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관상기도운동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위험한 신비주의의 성격을 현대인들의 정신에 맞게 변형된 기도라는 종교적 실천 속에 감추고 다가온 영성운동(괈性運動)이다. 교회역사에서 등장한 다양한 신비주의의 형태와 이단적 사상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순수한 경건(敬虔)이 사라진 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탈신학적이고 종교다원주의적인 관상기도운동을 비롯한 신비주의의 사상과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의 목회 사역 안에서 더욱 중생과 회심의 풍부한 증거들이 있어 
야 한다. 또 성경과 정통교리, 특별히 개혁신학을 철저히 가르치고 교육하여야 한다.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적인 기도의 실천이 얼마나 신비하고 은혜로운 것인지를 경건의 실천 속에서 직접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이러한 그릇된 기도운동에 대한 가장 좋은 치유책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는 이렇게 교회를 파고 들어오는 현대사상과 현대인들의 상황을 학문적으로 잘 이해하여 영적으로 교인들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1) 중생과 참된 회심이 있는 목회 
첫째로, 중생과 참된 회심이 있는 목회(牧會)가 이루어져야 한다. 중생이 인간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달콤함에 대한 영적 감각이 심겨지는 것이라면, 최초의 회심은 중생을 통해 부여받은 영적 감각으로써 최초로 맛보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움의 보고(寶庫)이며 자연 세계 안에 묻어 있는 신적 질서들의 정수(精髓)이다. 신비주의에 대한 모든 그릇된 열망은 성경 계시를 통하여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지성적으로 깨닫고, 정서적으로 감화되고, 의지적으로 행하게 되는 참된 경건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 사라지는 곳에서 발생한다. 

오늘날과 같이 강단에서 중생(重生)과 회심(回心)에 대한 애끓는 외침이 사라진 시대에는 더더욱 교인들이 신비주의적인 경험에 이끌리기 쉽다. 왜냐하면 참된 경건을 통한 신앙의 신비가 사라진 곳에는 언제나 비성경적 신비체험들이 환영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성경계시를 통하여 발견하고 성령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실천 속에서 사는 신자들은 심연 같은 자신의 어두운 자아를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중생한 영혼의 참된 만족은 자기를 구원하고 살리신 하나님의 성품(性品)을 아는 지식에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은 교회의 영광이 교회에 모이는 신자들의 수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성품에 합당한 복음적 인격과 생활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그리하여 복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책망하고, 죄인들을 중생시키고 회심케 하며, 이미 구원받은 자들의 회심을 더욱 깊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자신들의 목회 사역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치열한 분투 속에서 기도하고 목회하여야 한다. 

2) 성경과 교리, 개혁신학에 대한 철저한 교육 
둘째로, 성경과 교리, 개혁신학에 대한 철저한 교육(敎育)이 이루어져야 한다. 올바른 지식이 없을 때 인간은 경험과 인상의 크기에 이끌린다. 신앙세계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우리에게 애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신앙의 의무를 실천하는 일에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성경 말씀과 신학에 의하여 판단되고 검증됨으로써 우리의 신앙(信仰)과 신학(神學)에 가치 있는 것들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들이 형체 없는 질료(質料)들이라면 올바른 교리와 신학의 지식들은 이것들에 구체적인 형체와 모양을 부여하는 형상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앙의 경험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이 함께 섞여 있어서 그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신비한 경험들이 성경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대한 어떤 경험들은 우리 마음에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 너무나 선명한 인상을 남긴 나머지 그것들에 압도되어 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편견을 형성하게 되고 이렇게 생긴 억견 때문에 우리의 지성을 유순하게 하여 성경의 계시를 공정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적 경험들을 판단하는 대신 그 경험에 맞게끔 성경을 굽게 해석함으로써 그릇된 신앙관을 갖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신학을 진술함에 있어서 철학(哲學)의 도움이 요긴하기는 하지만 신학자가 어떤 특정한 철학 사상에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성경계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신앙의 경험이 요긴하기는 하지만 성경 해석자가 어떤 주관적이고 특정한 종교경험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복음적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온갖 유대교의 종교적 편견, 곧 이방인들에 대한 심리적 편견과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편견에서 벗어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한 것도 복음과 성령을 통해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보여주는 고백이다(빌 3:8). 

오늘날 한국교회에 확산되는 관상기도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참된 복음적 경건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한 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 신비 안에서 성경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건의 기쁨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종교적 허기를 채우려는 욕구의 발로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그릇된 신비주의운동은 언제나 있어 왔고 어디서나 심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된 개혁주의적인 목회는 성경과 교리를 균형 있게 가르침으로 올바른 기독교 사상을 세우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힘은 은혜(恩惠)의 힘과 사상(思想)의 힘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타락한 인간의 지성을 압도하고 부패한 의지를 쇄신하시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올바로 가르쳐 무엇을 왜 믿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오늘날 보석과 같은 복음적 기도생활의 거룩하고 경건한 신비(神秘)가 쓰레기 같은 관상기도의 세속적이고 종교다원주의적 신비로 대치되는 것은 그동안 교회가 절대 가치를 거부하는 시대정신을 따라가느라, 개혁교리와 신학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관상기도를 도입하는 조국교회의 목회들이 모두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 중 다수는 이미 이머징 교회 운동을 받아들였거나 앞으로 받아들일 교회들 중 대부분은 얼마 전까지 마케팅교회운동을 받아들였던 교회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목회자들이 분명한 교리(敎理)와 신학(神學)에 기초하지 않은 목회를 할 때 얼마나 쉽게 교인들의 종교적 요구에 야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들의 입교와 세례에 대한 자격을 엄격히 하고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목회사역의 진정한 가치를 교인들의 참된 회심과 거룩한 은혜의 보존에 두어야 하며,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굳게 세우는 일에 신앙과 삶을 바치는 데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목회자는 성경을 배우고 개혁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영적인 기쁨을 느끼도록 성경과 교리, 개혁신학(改革神學)을 가르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여야 한다. 

3) 복음적 기도 생활의 열렬한 실천 
셋째로, 복음적 기도생활을 열렬히 실천하여야 한다. 기도생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비교적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목회의 유익을 위하여 관상기도의 실천을 받아들인 조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은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나 영성운동가들의 신학적 입장과는 좀 다를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유주의신학(自由主義神學)을 표방하던 신학자들이나 영성운동가들에 의하여 관상기도의 실천이 새롭게 강조된다는 사실은 좀 아이러니하다. 복음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기도의 실천이 복음적 경건이 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자유주의신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강조된 새로운 기도운동으로서의 관상기도에 대한 강조는 복음적 기도생활을 통한 영적 유익보다는 고요한 명상을 통한 심적 유익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현대인들이 가진 인간 중심적 가치관과 신학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정신적 필요들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 다원주의적 명상 기도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실천들 속에는 당장에 교인들의 기도생활을 진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오늘날과 같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의 마음을 침잠하게 하여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신앙과 경건의 실천들은 논리적으로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건전한 신학(神學)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건의 실천도 건전한 성경해석과 신학적인 체계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성경에 대한 지성의 깨달음, 그것을 자신의 영혼과 삶에 비추시는 성령의 조명,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여야 한다. 복음적 기도의 경건한 실천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복음(福音)을 사랑하게 하고, 모든 비복음적인 영성의 신비에 기뻐하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관상기도운동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기도의 실천은 단지 인간이 원하는 욕망(慾望)들을 충족하는 수단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는 우리도 깊이 동의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사귐이다. 외적인 침묵 속에서도 정신이 분요하다면 그런 교제는 가능하지 않고, 외적인 부르짖음 속에서도 마음이 중보자 한 분을 바라는 신앙의 열망으로 가득하다면 그런 교제는 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적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합일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무한한 격차(隔差)를 인식하는 것이다. 광대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존재론적인 격차와 도덕적 완전성에 있어서의 격차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복음적 기도의 실천이 주는 유익이다. 그러한 신앙적인 인식 안에서 우리는 열렬한 기도의 실천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과 우리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의 정신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단지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일 뿐임을 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믿지만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바라는 것은 허심(虛心)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영광을 사모하며 그것이 신비한 경험이라는 사실도 알지만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오심이 아님도 안다. 신비의 즐거움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적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자들에게 알게 하여야 한다. 

존 오웬(John Owen)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과의 동행(同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가 가진 신앙의 두 가지 특징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渴望)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오늘날과 같은 관상기도운동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 조국교회 안에서 복음적 기도의 실천과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직시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열렬한 기도생활에 힘쓰게 하며 자신들이 먼저 철저한 기도생활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오늘날 온 교인들이 매일 모여 너무 큰 소리로 부르짖음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침묵하게 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하여 열렬히 간구하게 하자. 입으론 잠잠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는 울부짖어 외치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복음적 기도와 열렬한 실천 속에서 참된 기도와 경건의 비밀을 알아가게 하는 것이야 말로 관상기도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좋은 예방책이며 치료책이 될 것이다. 

4) 현대사조와 현대인의 정신에 대한 이해 
넷째로, 현대사조과 현대인의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역사에서도 어떤 사상이나 관습이나 유행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들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소력은 객관적으로는 그것들 자체 안에 있는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고, 주관적으로는 그 시대의 사람들 안에 있어서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정신적인 정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되고 있는 관상기도운동도 현대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침묵과 자아성찰, 그리고 신비 경험의 욕구에 힘입고 있다. 근대주의 사상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기준으로서 성경을 거부하고 그 대신 인간의 이성(굊性)을 절대시하였다. 그러나 근대주의에서는 적어도 인간 이성의 접근을 통한 통일된 지식의 구축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성주의를 통하여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의 모든 삶을 포괄할 수 있는 가치 체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04)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그러한 객관적 법칙, 도덕적 규범, 절대가치를 포괄하는 기준 자체를 거부하였다. 도덕적 법칙의 근거로서의 실재를 규명하고 찾는 메타담론의 시도는 기득권층의 소수이익을 위한 것이며 개인의 자율(自괹)을 억압하는 틀을 구축하는 것으로 받아들 여졌다. 105)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도덕의 절대가치(絶對價値)에 대하여 개인의 자율과 자유를 주창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을 신격화함으로써 절대가치의 근거를 개인 안에서 찾고자 한다. 오늘날 세계와 인간을 신의 본질의 확장으로 보는 범신론 주장이 환영을 받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은 관상기도의 실천과 신비주의와 일치하는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관상기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목회의 한 프로그램으로 수용하면 단기적으로 새로운 교인들을 모으고 또 기존에 있는 교인들에게 새로운 종교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관상기도의 실천이 기초로 삼고 있는 변형된 신학과 현대인의 정신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만 거짓된 사상 안에는 미혹(迷惑)의 영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경과 교리, 개혁신학을 철저하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현대사상과 현대인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가르칠 기회를 종종 가져야 한다. 더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간의 대화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관용의 정체와 그 영향에 대하여 진지한 이해를 성도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충고는 지금 우리에게도 적실하다(마 16:3). 그러므로 목회자는 매주일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로서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대사조의 종교적 의표(意表)를 직관하고 이에 대한 경고와 대책을 아울러 선포할 수 있는 뱀 같은 지혜를 함께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마 10:16). 성경과 건전한 개혁신학과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현대의 사조와 현대인들의 정신에 대한 학문적 이해는 이러한 신앙적 오류로부터 교회들을 보호하고 교인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버나드 램(Bernard Ramm)의 지적과 같이 오늘날과 같이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목회자로서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단순한 복음의 열정을 넘어서는 신학과 현대사상에 대한 학문적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목회자는 반드시 기독교사상으로 무장한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과 학문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버나드 램의 다음 충고는 모든 목회자들이 마음에 새길 가치가 있다. 

“어느 정도 신학은 그 시대에 의해 형성되고, 신학 역시 그 시대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깊이 알고자 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라면, 신학과 문화적 역사 간의 상호관계를 연구해야만 한다…예술은 그 시대의 정신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그것에 대한 관심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도록 만든다…복음주의 신학자는 당대의 철학을 알아야만 한다…그 시대의 철학적 과제를 다소간에 이해하고 있을 때에만 신학적 과제를 능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06) 

6. 결 론 

오늘날 조국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선교의 상황에 봉착하여 있다. 현대정신(現代精神)은 너무 깊이 교회 속에 파고들어 와 있고, 회심이 불분명한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경배해야 할 다른 하나님을 가르치고, 목회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을 가르치며, 교인들은 신앙을 가져야 할 다른 동기들을 찾고 있는 동안에 교회는 자신을 위한 믿음의 내용도 잃어버렸고, 세상을 향해 외칠 선포도 상실하고 있다. 

세속주의(世俗主義)란 존재와 가치의 질서 있어서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을 두는 것이다. 시대정신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고, 인간의 행복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도록 촉구한다. 오늘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조국교회의 신비주의가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복음을 대신하여 교회 속에 침투해 들어온 세속의 정신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성격을 띤 관상기도가 조국교회에서 널리 보급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날의 번영주의가 교회를 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힌 물질주의로 혼란스럽게 하였다면, 관상기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정신적 번영주의이다. 역사적으로 관상기도의 뿌리가 되는 사상들이 건전하지 않고 심지어 이교적이며, 신학적으로 분명히 성경으로부터 이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욱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참여와 신학자들의 지지는 지역교회 안에서 관상기도의 비성경적 실천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관상기도운동을 통하여 조국교회의 피상적인 신앙을 보완하여 보려는 비교적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도입된 새로운 신앙적 실천들은 항상 그 사상의 뿌리들을 함께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다. 누가 이론을 제기할 지라도, 관상기도의 뿌리는 신비주의(神秘主義)이고, 오늘날의 관상기도운동은 종교다원주의로 흘렀거나 그렇게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확산은 장기적 관점에서, 결코 조국교회의 영적건강에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참된 경건의 맛을 모르는 비회심자들과 교리적으로 정리된 지식이 없는 연약한 자들에게는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며, 복음적인 교리로부터 그들의 신앙을 더욱 멀어지게 하여 그들의 신앙생활을 비영적인 틀(unspiritual frame)에 가두게 될 것이다. 

관상기도운동은 그동안 조국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였던 여러가지 신비주의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목회(牧會)가 말씀과 은혜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능력을 잃어 버렸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적 경건의 신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난관들을 타개하기 위하여 우리 목회자들은 사역의 참된 복이 죄인들의 중생과 회심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죄를 책망하고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역사가 우리의 섬김 속에 언제나 나타나도록 열렬한 간구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가 교리(敎理)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목회자들은 지성(知性)의 힘을 다하여 성경과 신학을 탐구하고 개혁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참된 기도(祈禱)의 은혜와 능력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관상기도에 매력에 심취되지 않는다. 복음과 화해한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처절한 열망으로 불타오른다. 그에게 하나님께 대한 관상은 사치이고 자아에 대한 집중은 허탄한 것이다. 교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만,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다. 목회자인 우리들이 배타주의에 흐르지 않고 현대의 정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목회적 위기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참된 신앙의 거룩한 확산을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39

안동제일 2018-06-08 오후 20:53

관상기도에 대한 치우친 견해를 총신대 교수의 의견만으로 정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합동측에서는 기장을 인정 안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걸핏하면 자유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자유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가리키는 것이고, 지금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총신의 관점을 액면 그대로 옮겨오지 마세요.

우리 교단은 신정통주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총신에서는 신정통주의를 확립한 칼 바르트조차 자유주의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여기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파수꾼 2018-06-09 오전 00:25

그들의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관상기도에 대해 우려합니다.

목사님께 묻습니다. 

관상기도, 신학적으로 문제없습니까?

엔학고레 2018-06-13 오후 17:36

최근 관상기도가 새롭게 주목받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두고 우려하는 지적이 높습니다. 

'새로운 돌파구'처럼 여긴다는 점에 대한 우려입니다. 침체를 거듭하는 개신교의 반전을 위한 목회적 절실함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면 이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한국인의 특성상 그러한 관심은 맹목적 확산으로 증폭될 소지가 다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효력이 있다 없다라든지, 신비주의적이라든지, 타종교적이라든지 하는 문제는 본질에서 비켜난 논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행하고 있는 많은 예전과 찬양 행위, 통성기도와 묵상기도 등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방식이기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행하는 기도 역시 타종교나 무속과 주술에서까지 취하고 있는 종교 행위이죠. 그렇다고해서 기도를 중단하거나 찬양을 비신학적이라고 거부하진 않습니다. 

 

문제는 과도한 의미부여와 특별한 능력을 부르는 방식이라고 강조하며 남발하는 행위 당사자들의 이단성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사모하며 흠모하는 일에 특별하고도 유일한 어떤 통로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바른 신학입니다. 부연드리자면 '관상기도'와 같은 형식은 매우 오래 전에 기독교에 유입된 기도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다만 김남준 교수는 총신에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 패러다임을 계승하려는 학자중에 한 분으로 위에 글과 관점을 주장할 수 있는 분이시죠.  최근 총신의 방향성은 매우 개혁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장로님의 문제의식에 감사드리며 <의문과 질문이 사라진 교단과 교회는 추락하는 곳이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요즘 기장의 수준과 학풍이 하락세로 접어든지 오래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공부하고 연구하며 책상을 사수하며 기도하는 그런 분들을 뜨겁고 격하게 응원합니다.   

파수꾼 2018-06-13 오후 19:17

저는 저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다만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잘 정리해둔 기사가 있길래 퍼왔습니다.

기장에 속한 성도라고 기장신학만을 신봉하진 않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타노회 목사님께서 

경북노회 게시판에 회원이 되어서 관상기도모임을 홍보하는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사탄을 예배하기도 합니다. 

글을 쓰시기 전에 꼭 읽어주십시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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