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강단 앞에 보이는 산 밑의 밭에 풀이 웃자라 있었다. 서울로 오가는 주인네가 손을 볼 겨를이 없었나 보다. 애써 뿌린 농작물들이 풀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쓰러운 마음에 며칠에 걸쳐서 제초 작업을 해주었다.
그러다 얼마 전 주인네를 만나서 인사를 드리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 하니 고마운 마음에 귀퉁이 밭을 조금 내 주신다. 그때의 기분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이게 사는 맛이지. 사는 게 별거냐.’ 싶은 것이 들뜬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하다 보니 얻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얻은 밭에 마늘과 양파를 심었다.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지게 되리라. 그 열매들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맛을 느껴가는 것이리라.
사람은 주고받으면서 산다. 서로 간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그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주다 보면 받게 되는 것이지, 받기 위해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주는 것이 목적이어야지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우선 순위가 뒤바뀌면 안 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수가 없게 되니 전체가 흐트러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매한가지다. 순서가 바뀌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준만큼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나고, 손해의식이 생겨나면서 서로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고 끊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다.
예전에 한 번은 고등학교 딸을 둔 엄마가 하는 말이다. “야, 이렇게 해 줘놔야 나중에 받을 수 있어.” 얼마를 빌리기 위해서 먼저 의도적으로 작정을 하고서는 얼마를 빌려주는 것이란다.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인생의 처세술을 자랑스럽게 딸에게 가르치고 있다. 뒤바뀐 순서에 따라 살아가야만 할 딸의 고통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체 말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부교역자 시절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설문조사 때에 적어놓은 글이 언제까지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매점에서 자기가 친구에게 사 준 양과 친구가 자기에게 사 준 양을 비교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런 계산적인 모습이 자기에서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던 거다.
그 소녀가 이제는 어떻게 그 삶을 살아내고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세월이 흘러간 어느 자리에서 그 소녀가 살아내고 있을 그 삶을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써가고 있지 않는가. 준만큼 받지 못해 서운해 하고, 해준 만큼 되돌려 받지 못해 섭섭병에 걸려서는 좀생이처럼 안절부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볼 일이다. 사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멋도 부리지 못한 체 말이다. 흥정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