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어느 책을 읽다가 ‘위해서’라는 단어가 뜬금없이 ‘위에서’로 읽혀진다. 괜한 웃음이 나온다. 말장난 같이 여겨지지만 그래도 이런 엉뚱한 생각들이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위해서’인가? ‘위에서’인가? 도토리가 묵으로 탈바꿈하듯이 엉뚱한 작은 생각이 이런 글까지 써지게 하니 나름 재미가 있다. 누군가들 위에서 있는 것인지, 누군가를 위해서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니 말이다. 군림의 모습인지 섬김의 모습인지.
인생의 이른 청년 시절부터 신학생이 되고 전도사를 거쳐 목회자가 되다보니 본위 아니게 가르치려는 자리가 많았다. 가르치려고 들다 보니 은연중에 내 자신이 잘하는 것처럼 보여주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다 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꾸밀 때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는 게 별반 없는 자가 마치 다 아는 사람인 냥 되고, 되먹지도 못한 자가 다 된 위인인 마냥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빠른 모습이 있어 왔던 것이다.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는지’ ‘왜 그렇게밖에 못사는지’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왜 그렇게 빼려고 했는지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참 부끄러운 지난날이다.
성경의 야고보서 말씀이 두렵고 떨리게 찾아든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말과 삶이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침에 아이들이 일어나더니 그날도 자기들이 즐겨듣는 유행가를 폰으로 블루투스에 연결해서는 듣는다. 한창 노래를 좋아할 때가 아닌가. 그때 아빠로서 한 마디를 했다. “야들아, 목회자 가정에 찬송이 흘러나와야 되지 유행가가 뭐냐?” 그랬더니 한 녀석이 한다는 말이, “그러면 아빠는 목사님이면서 욕은 왜 그렇게 잘해요.” 그저 웃음만 터질 뿐 할 말이 없다.
내 딴에는 아이들을 위해서 쓴 소리를 한다고 했던 것들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아빠가 가장이라는 힘과 기득권을 가지고 함부로 쏟아내는 욕과 잔소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위에서’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인데, 이것을 헤아리지 못한 책임이 크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가을 하늘이 더없이 맑고 화창하다. 그 하늘 위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이 땅까지 오셔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시고는 삶의 본질을 일깨워 주셨으며 인생의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다. 그리고는 따라오게 하셨다. ‘위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위해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따라오게 하신 것이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